
대한민국의 전자음악가 키라라가 이번 앨범의 타이틀을 자신의 활동명인 ‘키라라’로 택했다. 왜 이제야, 왜 하필 키라라였을까? 정규 앨범으로는 다섯 번째, 키라라라는 페르소나가 태어난 이후 10년도 더 되어버린 지금에서야 대망의 셀프 타이틀을 내걸었으니, 본작이 스스로의 정체성이나 내면을 찾기 위한 기록이라 예상하는 것 역시 썩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넘겨짚는 것이 꽤나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허나 2022년 마리 끌레르 코리아(marie claire Korea)와의 인터뷰에서, 키라라는 “자의식에서 조금 멀어지고 싶다는 말 같기도 하다”는 질문에 “그 말도 맞다.”라고 대답한다. 꽤나 의문스러운 발언이다. “자의식에서 멀어지고 싶다”며 만들어 간 작품에 굳이 본인의 이름 석 자를 떡하니 내걸다니 말이다.
자의식(自意識)을 외면하는 작품이 스스로(自)로 귀결한다면 작품은 일종의 의식(意識) 행위를 거부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동일한 인터뷰에서 “어떤 뜻도 담지 않은 앨범을 만들고 싶다.”고 한 그녀의 언급처럼, <키라라>는 스스로에 대해 ‘의식하기’를 철저히 거부하며, 혹은 거부함으로써 ‘나’라는 본질에 더욱 내밀히 다가가는 작업이 된다. 감정에 몰입한 채로 이를 표현하기보다, 한 발 뒤로 물러서 감정의 양상을 있는 그대로 관망하고 또 전달하는 셈이다.

‘나’에서 멀어짐으로써 진정한 ‘나’를 발견하다
그녀가 이른 바대로 본작 <키라라>, 특히 작품의 초반부는 3집 <Sarah>나 4집 <4>에서 이어진 특정한 감정의 발현이나 의도적 맥락 발화가 의식적으로 제거되어 있다. <Sarah>의 애수도, <4>의 분노도, 혹은 다른 어떤 고유의 감정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피처링 참여 내용만 하더라도 하나의 특정한 의도를 감지할 수 없는 표현의 연속이다. 가사 하나 없는 고약한 스캣으로 일관하기(’음악’)부터 시작하여, 별안간 클럽의 생태를 중얼중얼 논하더니(’콘트라스트’) 비정형적 랩을 우악스럽게 쏟아내며 추적 행위 자체를 거부하고(’조각’) 나중엔 아예 괴성을 지르기까지(’증발’) 한다. 지향조차 불분명한 장명선의 채소 이름 나열(’샐러드’)은 일견 우스워 보일 정도. 만약 당신이 작품을 듣고 “뭐야 이게?”라는 반응을 보였다면 완벽히 키라라의 의도에 걸려든 셈이다.
이토록 산만한 구성은 과연 내부 감정에 대해 ‘생각하기’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나온 결과물이다. 스스로의 본질이나 감정을 정의하거나 규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어 버리니 불규칙하다 못해 무질서한 형상이 그대로 이미지의 형태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작품의 언어를 빌리자면, 각기 ‘대비(’콘트라스트’)’되는 ‘조각’들이 어지럽게 흩뿌려진 ‘망한 놀이공원’ 같은 ‘음악’이 탄생했다고 이를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샐러드’라는 단어가 등장함은 흥미롭다. 여러가지 채소, 견과, 과일, 생선, 육류 등 다양한 재료들이 비정형적으로 섞인 음식을 ‘샐러드’라고 부르는 것처럼, 키라라는 혼란스럽고 산만한 감정의 다발을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 대하려는 심산이다.
앨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조각’은 이러한 관점에서 샐러드의 ‘재료’와 대응할 수 있다. 여러 감정의 파편이 조각조각 산재하는 상태를 가까이서 관찰한다면 분명 정신없고 산만해 보이겠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 바라본다면 그저 조각이 한데 모여 있는 ‘조각모음’으로 보일 터, 이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 받아들인다면 그 조각모음은 비로소 하나의 ‘조감도’가 될 수 있다. 다양한 야채 조각들을 아무 규칙 없이 흩뿌려 놓는다 하여도 결국 위에서 내려다볼 땐 그저 ‘야채 모음’일 뿐이고, 그것을 하나의 식사로 대할 때 비로소 ‘샐러드’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14곡의 트랙 중에서도 ‘조감도’가 가장 균형 잡힌, 일반적인 악곡의 형태를 띠는 반면 ‘조각’이 가장 어지러운 진행을 보여주는 것 또한 이러한 관점 차이에 따른 표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죽음, 그리고 그 이후
물론 이러한 조감도는 별안간 사라질 수도, 불현듯 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 자아는 끊임없이 소모하고 변모하며, 이를 담는 그릇인 육체 또한 필히 파멸하고 만다. 그렇다면 육체의 사멸은 과연 정신의 해방일까? 작품의 키라라는 이러한 인식 속에서 육신이 멸하는 상황을 가정하여 서사의 낙폭을 극적으로 증대하는 흥미로운 전개를 보여준다.
현세와 내세를 철저히 분리하고, 상승과 하강의 구조로 둘 간의 이동을 명확히 시각화하기 위해 키라라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지구 밖’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한다. 그곳은 고요하고 어두운 곳으로, 형형색색으로 난분분한 ‘나’의 지구와는 명백히 대비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개념 설정에서, 지구 안에서 지구 밖으로 향하는 죽음의 과정은 곧 ‘상승’인데, 작품에서는 여기에 ‘증발’이라는 표현을 끌어온다. 물론 초성을 ‘ㅈ’으로 통일하여 죽음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게 하기 위함도 있겠으나, 실질적인 목적은 필멸의 육체와 대비되는 자아의 무형성과 존재성을 강조하고 물이 가지는 순환의 성질을 대입하기 위함일 공산이 크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화자의 태도다. 죽음을 통해 비로소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순진한 백과 청이 가득한 하늘로 떠나는 과정은 일견 벅찬 해방감으로 이어져야만 할 것 같지만 ‘증발’의 화자는 여전히 현세의 흔적 속에서 혼돈과 미련을 느끼고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이는 죽음의 과정이 끝나고 결과만이 남은 ‘지구 밖’에서도 마찬가지. 현세의 추억들을 “못 본 척하고만 싶다”고 말하면서도 바로 외면하지 못하고 거듭 되뇌는 것은 그 향수가 여전히 가슴 속에 남아 있다는 증거다. 반면 고요한 내세에서 정신 사나운 현세로 돌아오는 과정인 ‘격추’의 사운드에는 설렘과 두근거림, 벅차오르는 감정이 오롯이 녹아 있다. 마치 이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추락하기보다는 빠르게 활강하며 얼굴로 쏟아지는 바람을 기꺼이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앞서 언급된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련이 있다. 하늘로 증발하였다가 다시 격추되어 지구로 떨어진 화자의 자아는 새로운 형상(’조각모음 2’)으로 부활하게 되는데,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조차 나 자신으로 대하기로 한 태도가 여전하기에 ‘조각모음 2’의 소리는 그토록 경쾌할 수 있게 된다. 다음 트랙의 제목인 ‘Love Me’, “나를 사랑한다”로 스토리가 마무리되는 것 또한 화자의 태도가 더욱 성숙해졌음의 증거일 테다.
관계로서 비로소 완성되는 나
<키라라>가 온전히 ‘나’에 대한 이야기라면, 작품은 ‘Love Me’에서 끝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허나 키라라는 ‘Love Me’ 뒤에 비디오 게임의 ‘진엔딩’과도 같은 트랙 ‘FP’를 삽입하고, 앨범 소개란에 이런 짤막한 글을 남긴다.
“다들 예술가라서 그런지, MBTI의 뒷 두자리가 FP로 끝나는 친구들이 주위에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 중 한 명으로써 이 세상을 정말 산만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복잡한 삶을 단순하게 만들려고 지난 몇 년간 노력해왔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산만한 저를 그나마 하나의 정신으로 바로 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음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 누가 뭐래도 음악 만들기는 재밌습니다.”
앨범 소개글에서 키라라는 MBTI 분류 중 비교적 감정적이고 비계획적인 사람을 지칭하는 FP를 언급하며 주변의 예술가, 음악가 친구들의 존재를 거론한다. 여기서 키라라의 이야기인 <키라라>는, 키라라 개인의 기록을 넘어 그 주변 친구들과 함께하는 관계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두터운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음악’은 키라라의 음악을 넘어 음악을 매개로 하는 관계, 그 순수한 행복과 즐거움이 되고, ‘조감도’는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완전해지는 ‘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의 증발을 맞이하는 화자가 깊은 미련과 혼란을 느끼고, 평온한 지구 밖에서 혼란한 지구를 그리워하며, 벅찬 설렘과 함께 기꺼이 지구로 하강한 궁극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 하필 지구 밖의 키라라는 자발적으로 하강하지 않고 외부의 힘에 의해 ‘격추’당한 것일까? 산만하고 어지러운 현세를 사랑하고, 그 속에서 더욱 산만한 ‘나’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키라라>가 이토록 많은 주변인들과 함께 완성된 바로 그 이유. 세상 누가 뭐래도 음악 만들기, 그 중에서도 ‘같이 음악 만들기’는 너무나도 재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