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닉 유스를 배척하는 주류가 존재한다는 관념 자체가 그들의 매력을 지속시키는 근본적 환상이다. (…) 소닉 유스는 실험주의를 사회적·실존적 부적응으로부터 분리시켰다.”
- 마크 피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 프레드릭 제임슨
independent [adjective]:
1. not wanting or needing anyone else to help you
2. not controlled or ruled by anyone else
3. not influenced or controlled in any way by other people, events, or things
- <Cambridge Dictionary>
‘인디’라는 슬픈 낱말이 있다. 산업을 등지고 독립을 선언해야 했던 이들이다. 다만 여느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도 진짜 비극은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으로부터 나타난다. 차츰차츰 인디는 주류 진입을 위한 디딤 발 혹은 ‘개성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누군가에게 봉사하는 음악이 되었다. 본래 이념, 미학, 진보의 장이던 그곳은 감상주의적인 겉치레로 쓰였다. ‘인디’가 단순 분류가 아닌 곧 지향에 관한 어휘였음에도 그랬다. 말하자면 언더그라운드는 항상 언더그라운드이기를 자처한다. 많은 경우에 관습이나 시스템에 대한 정치적 반발과 엮여 나타났던 지하 예술은 철학자 마크 피셔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소닉 유스를 비판하며 ‘아방가르드 보수주의’라고 일컬었듯 주류에게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어쩌면 음악의 계층은 세 쪽으로 나뉘었다. 메인스트림 밑에 인디, 그리고 그 밑에 언더그라운드나 컬트라고 불릴 존재들이 도사린다. 그들은 철저하게 그들의 방식대로라면 아마도 영원히 메인스트림에 발붙일 일이 없을 것이다.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애석하게도 ‘Pale Blue Eye’나 ‘Sunday Morning’과 함께 거론되며 감상적 국면을 위주로 파악된다는 점을 떠올리자.) 땅 밑에 남은 그들의 이름은 무엇일까? 사회적 약자, 소수자, 차별과 멸시의 대상, 기괴한 취향의 소유자 등… 넓게 말해 퀴어라고 할 만한 (여기서 나는 ‘퀴어’를 단순 LGBTQ 씬을 넘어선 어휘로 활용한다. 요한나 헤드바가 <아픈 여자 이론>에서 ‘아픈 여자’를 지칭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들은 정작 지금에 이르러 그들 자신의 유구한 컬트 문화와 맞닿는 맥락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차펠 론, 빌리 아일리시, 트로이 시반, 이브스 튜머 등 퀴어라는 텍스트 아래 이해되는 유명 가수는 본래 다른 경향의 음악을 추구하다 뒤늦게 시류에 올라타거나 퀴어를 정체성보다는 패셔너블하게 소모하는 사례가 잦다. 많은 이들이 이를 퀴어 문화의 범람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나 이미 대중성에 편입되기 위해 자아 정체성을 희석해야 한다는 대목에서 퀴어의 정치적 국면은 좌절을 맛보고 있다.
언더그라운드에 남은 부류는 둘이다. 배타하는 자와 배타당한 자. 그러다 보니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접근성은 이질적 분자를 어떻게든 사회적 분자로 개조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쇄당했다. 또 한 가지 더, 기술복제의 제한이 사라진 현대 매체 특성에 따라 예술은 포화 상태를 맞이한 것이다. 해체주의와 절대주의 미술의 등장이 1세기가 넘어가는 현대에 더 이상 온전한 아방가르드란 존재할 수 없는 이데아처럼 상상된다. 사회의 모든 난점을 낱낱이 저항하고도 전부 반려되거나 포용되어 전위예술은 갈 곳 없는 모양새다.
그리고 향후 21세기의 초석이라 불릴 사반세기의 변곡점이 도착했다. 이때 대중음악이 내놓은 토대는 단순했다. 과거로의 회귀(복고주의), 혹은 기술 발전에 편승해 미래로 치닫기(하이퍼 팝). 이때 후자가 언더그라운드를 포섭하며 음악사에 만연하던 쾌락주의나 소비주의 등의 미래지향적 색채는 더욱 강해졌고 정치적 당위를 획득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유사한 흐름을 보인 60년대의 사이키델릭을 회상하면 그 종지부가 피로 얼룩진 알타몬트 페스티벌이었다는 점이 섬뜩함을 남긴다. 물론 현 전자음악이 사회적으로 어떤 난관에 봉착할지는 미지수이나, 과거와 달리 특별하게 강경한 태도도 아닐뿐더러 내적 논리가 허술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변혁을 도모하기에 부족함이 사실이다. 문명을 인정하는 순간 문명은 승리한다. 자명하지 않은가? 우리가 소리 지르고 춤추고 ‘사랑과 평화’를 외치는 공연장조차 체제의 손바닥 안을 뒹굴 뿐이다.
아방가르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대중음악이라는 이념적 사막 위에 산 채로 버틸 수는 없다. 그런 와중 혁명이 도사리던 시대에조차 섬멸하고 말았던 노 웨이브 장르를 들고 나선 PCR의 정체는 가늠하기 어렵다. 전 세계 어느 곳보다도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개념이 적확히 맞아떨어질 이 땅 위에 나타난 이들은 스스로 본인의 음악이 새롭지는 않다고 말한다. 앨범을 통으로 비디오와 결합하고도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를 차용하며, 그것들은 대개 폭발적이고, 그로테스크하고, 종종 섹시하며, 퀴어적이다. 펑크가 가진 무정부주의 성향과 어우러진 사운드와 가사가 거친 인상에 힘을 싣는다. 그들이 앨범 창작에 영향을 받았다고 대담하게도 인용하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기념비적 영화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의 계단’ 장면과 같다.
물론 지금은 1925년이 아니다. 좌파 운동이 철저히 자멸한 지금 개혁을 논하기란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시의적절하지 않다. 혁명과 아방가르드의 쇠락 이후 아무것도 논할 수 없는 처지에도 굳이 노 웨이브라는 언더그라운드 장르를 택하는 이유는 알게 모르게 신화적이기도 하다. ‘UNI...from Brother Walter’에서 말하듯 그들은 음악적 노아를 자처하고 지하에 방주를 짓고 있는 셈이다. ‘정상’으로 분류되는 많은 사람들은 이를 두고 미친 짓이라 일컬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은 제 기능을 못하는 단어다. 사회 속에서 정상과 비정상은 합리성과 무관하게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다. ‘Bricks★★★‘에 언급되듯 현대의 정상인은 “컴퓨터는 낡은 단어”인 시대에도 “소처럼 일하는” 누군가이자 ‘Dior Jean Hazard‘에 드러나듯 “적의를 향하면 죽”는 “초월자”, 즉 폐쇄적이고 만연한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종속된 인간 군상이다. 그들은 꿈을 꾸는 방법을 모른다.
그러니 이들의 해체적인 음악을 두고 선율을 논한다기보다 그들의 존재가 현재 대중음악의 시류에 어떤 문제를 환기하는지 통감하는 일이 우선이다. 노 웨이브의 장르 특성상 후렴 배반적 사운드는 음악을 흥얼거릴 수 없지만 흥얼거려서도 안 되는 것으로 만든다. 후렴이야말로 대중음악이 생성한 일종의 체제이며, 중독성이 사고의 마비를 자아내는 기제라는 점에서, PCR의 음반은 소비된다기보다 존재하며, 들려온다기보다 끼쳐온다. 비로소 ‘Francis’에서 찾아 헤매던 자유의지 그리고 자아가 실현된다. 때아닌 급진성을 지닌 <People Come Raging>은 창작의 목적이 자아실현에 있다고 말하는 어쭙잖은 밴드의 뒤통수를 무자비하게 내리치는 셈이다. 그 쨍한 노이즈가 내게 말하기를 평평한 것은 자아가 아니다. 자아는 넘실거리거나, 뒤죽박죽이거나, 울긋불긋하거나, 너절하게 산재한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그렇다. 지극히 개인적인 개인의 음악이란 이런 방식으로 실천돼야 하는 것이다. 이제 아방가르드와 언더그라운드는 없다. 영원히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굴을 무한으로 뻗게 한다. 더 깊고 고독히 파고들어 미적 진보의 성역이라는 방주를 건설한다.
하나 그 방주의 끝에 지상의 숙제가 외면할 수 없을 만큼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밴드가 스스로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듯 언더그라운드를 어떻게 하나의 문화로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너무나 막중하여 손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타협은 곧 패배다. 비타협은 고통스럽다. 그 양자의 지난한 역사를 대중음악은 지겹도록 확인했다. 다음이 있다면 제3 안을 논하는 일일 것이다. 변증법, 혹은 몽타주.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상주의적 구성안. 문을 열어젖힌 사람이 무언가 이룩해주길 바라는 무책임함으로 글을 적는 나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는 어떤 기적. 이것들을 바라는 일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그것으로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우리는 퀴어로써, 언더그라운드로써, ‘비정상’으로써의 소명을 지탱하고 있기는 한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멍청하다 할지라도 아직 꿈을 꾸는 방법을 잊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