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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층이 쌓인 이름 사이로 선연한 공백, 스키니 체이스의 <선리기연>

by 권도엽 | 

cover image of Skinny Chase <선리기연>
Skinny Chase <선리기연>Jolly Records

힙합 본토에서 자란 한국계 외국인이 중국 고전을 원작으로 한 홍콩 영화를 제목 삼아 음반을 발표한다는 것. 스키니 체이스의 3번째 정규 앨범 <선리기연>은 불명확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여기서 <선리기연>을 단순히 국적 불명이 아닌 “불명확한 요소들로 가득하다”라고 한 것은 아티스트의 정체성과 별개로 음악적 특성까지 모호한 측면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1집 <희극지왕>부터 이어지는 콘셉트와 서사, ‘혹성탈출’이나 ‘월광보합’ 등과 같은 영화 제목을 차용하는 점은 음악이라는 근본적 테두리마저 흐리고 있다. 이토록 규격화하기 어려운 아티스트의 이토록 규격화되지 않으려는 음반. 그렇기에 <선리기연>의 가사 속 이야기를 조목조목 해석하는 일보다 내게 흥미롭게 다가온 탐구는 외려 그 연결이 지닌 장력의 정도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처음 <선리기연>의 트랙 리스트를 손에 쥔 이들은 당황을 금치 못할 것이다. ‘혹성탈출’로 시작하는 곡명이 ‘우마왕’, 심지어 ‘희극지왕’과 ‘종영자막’으로 이어지는 콘셉트 앨범이 있다니. 일단 영화랑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건 알겠으나, 도무지 머릿속에서 짜맞추기가 힘든 작품들이다. <혹성탈출>과 <희극지왕>이 수작이라는 사실 외의 특별한 무언가를 공유하는 영화던가? ‘종영자막’이라는 제목을 보고 무심코 극장가에 대한 헌사가 목적이라 생각해도 오산이다. 앨범 소개에 따르면 매직 리얼리즘 경향을 지닌 ‘희극지왕’ 삼부작의 완결편인 앨범이라는데, 1집 <희극지왕>의 경우 영화 <희극지왕>의 서사를 곧이곧대로 모티프 삼고 있기 때문에 후자를 원작이라 보아도 무방하나, 이번 <선리기연>과 주성치 주연의 서유기 연작(<서유기: 월광보합>, <서유기2: 선리기연>)을 연결 짓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음반의 시작에 해당하는 ‘혹성탈출’의 내용이 은하열차에서 내려 불시착하는 이야기라고 하니, 거꾸로 뒤집어봐도 서유기랑은 별 관련이 없다. 더불어 ‘불시착’이라는 요소에서 트랙 명을 혹성‘탈출’이라고 지은 비약적인 작명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 모든 독특한 제목들은 음반의 내용과 매우 느슨한 관계성만을 지니는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물론 주성치와 이소룡의 장르가 아주 비슷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홍콩 무술 영화에 영향을 받아 이를 트랙의 인/아웃트로 등 각지에 적극 활용한 아티스트의 이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탱클랜. 애초에 무협지의 단골 문파인 무당파에서 팀명을 빌려왔으며 첫 번째 앨범 <Enter the Wu-Tang (36 Chambers)>의 제목은 이소룡이 출연한 <용쟁호투>의 미국 개봉 명에서 따온 것이다. 이런 콘셉트, 달리 말해 이런 기믹은 우탱클랜과 맥락을 함께하는 동시에 사운드의 질감은 또 다른 이름과 밀접해 있는데, 그것이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기념비인 <Deltron 3030>이다. 건조한 붐뱁 비트와 언더그라운드라는 활동 범위, 그리고 <Deltron 3030> 역시 콘셉트 앨범이라는 부분에서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가시적인 측면을 넘어 자세히 파고들면 언급할 수 있는 아티스트는 더욱 많아진다. ‘우마왕’의 전주에서 읊조리는 “May I have your attention please?”는 에미넴의 ‘The Real Slim Shady’에서 우리가 들었던 것과 같고, 곧바로 뒤를 잇는 ‘오공’의 도입부 “One little, two little, three little”은 ‘Ten Little Indians’를 기반으로 한 런 디엠씨의 ‘Three Little Indians’를 떠올리게 하며, 1집 <희극지왕>의 인트로와 아웃트로 순서가 정반대로 뒤바뀐 구조는 제이딜라의 유작 <Donuts>를 연상시키는 등의 경우가 그렇다.

딱 잘라 말하자면 스키니 체이스의 콘셉트 앨범은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과 같이 적확한 서사를 구현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덜 허구적인 언어로 더 마술적인 형태를 겹겹이 취하고 있다. <선리기연>에게 주성치, 에미넴, 손오공, J, 야곱 등은 전부 ‘종영자막’에 수도 없이 올라와 있는 스태프들의 이름 중 하나와도 같다. 다양한 색깔이 한 데 섞이면 결국 무채색을 이루듯, 스키니 체이스는 신비주의를 위해서 숱한 이름을 이리저리 껴입는다. 조금 장난스럽게 표현하면 스키니 체이스에게 주성치는 일종의 아우터다.

이제 <선리기연>과 그 앞을 수놓았던 <희극지왕>, <J에게>, 그리고 스키니 체이스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뭐라고 규정하면 좋을지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알아낸 것은 그가 한 가지 규격에 사로잡혀 있기를 싫어한다는 감상뿐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공란으로 내버려두어도 좋을 것이다. 수많은 영화인과 영화 제목, 그리고 아티스트들의 흔적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어느 쪽에도 쏠려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균형. 그 균형을 스키니 체이스만의 빈칸이라 부르자. 샘플링을 토대로 하는 장르에서 다른 이들을 끊임없이 호명하는 와중에도 얽매임을 거부하는 정체성을 개성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칭할 순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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