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즈타니 타카시(水谷孝)가 이 세상을 떠난 지 5년, 그의 조용한 죽음이 우리들에게 알려진 지 3년이 지났다. 그사이 하다카노 라리즈(裸のラリーズ, Les Rallizes Dénudés)는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에서 대중음악의 기록으로 편입했다. 밴드는 폐반된 1991년 작 세 장 <'67-'69 STUDIO et LIVE>, <MIZUTANI / Les Rallizes Dénudés>, <'77 LIVE>의 재발매를 통해 디스코그래피 복원을 마친 후 시중에 떠돌던 부틀렉 음반과 미즈타니가 보관하고 있던 녹음테이프를 조각 모음하여 라이브 앨범 발매 작업에 들어갔다. 22년 도쿄 키치죠지 라이브하우스 OZ 활동을 기록한 <THE OZ TAPES>, 23년에는 카와사키 CLUB CITTA'의 <CITTA' '93>과 키치죠지 바우스 시어터에서의 <BAUS '93>을 차례차례 릴리즈했다. 그 연장선에 <屋根裏 YaneUra Oct. '80>가 있다. 야사처럼 떠돌던 라이브 음원과 40년 넘게 잠들어 있던 녹음테이프를 ‘하다카노 라리즈 사운드’로 완성한 앨범. 그러나 이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아직은 조금 낯선 하다카노 라리즈와 당대의 풍경에 먼저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시끄러운 음악이 어울리는 시끄러운 시대, 일본의 6~70년대는 그런 시기였다. 6.25 전쟁 특수로 고도성장 가도에 오른 일본은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70년 오사카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온 나라가 들떠 있었다. 한편, 태평양 전쟁 패배로 GHQ(General Head Quarters) 통치 하 탄생한 ‘평화 헌법’과 일본군의 해체는 한반도의 전쟁을 맞닥뜨리며 일본에게 안전장치를 요구하게 했다. 주일미군의 계속된 주둔을 위해 1951년 맺어진 미일안전보장조약(안보조약)은 내용의 불평등성을 해결하기 위해 1960년 한 차례 개정을 실시했고, 당시 ‘일본이 다시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반대한 전쟁 세대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60년 안보투쟁). 조인을 막지 못한 시위대는 개정안에 담긴 ‘10년을 기한으로 하되, 이후에는 자동 연장한다’는 안을 가슴에 새긴 채 1970년을 기약하며 해산한다. 60년대 전체가 70년 안보투쟁을 향한 길목이었고, 모퉁이 곳곳에서는 거센 바람 소리가 잦아들 줄을 몰랐다.
도시샤 대학에 다니고 있던 미즈타니 타카시와 나카무라 타케시(中村武志), 와카바야시 모리아키(若林 盛亮)가 교내외 시위에 참여하는 것 역시 유난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시위는 학생운동 조직인 전학공투회의와 정치 진영 신좌파의 연합으로 이루어져서 시위 현장에서는 계파를 안전모에 표시하고 다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무당파들이 있었다고 한다. 미즈타니는 아나키스트를 의미하는 검은색 헬멧을 쓰고 다녔으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증언한다. 그러던 1967년 10월 8일 교토대 학생 한 명이 사망하는 하네다 사건에 강한 동기를 부여받은 와카바야시 앞에 두 명의 경음부 멤버가 찾아오면서 하다카노 라리즈가 결성됐다.
GHQ에 의해 미국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은 엘비스 프레슬리와 척 베리로 대표되는 로큰롤의 유입과 66년 비틀즈의 일본무도관 공연으로 록 밴드 수요가 급증하여 GS(그룹사운드)라는 이름으로 더 타이거즈, 더 스파이더즈, 더 다이너마이트 등의 메이저 밴드들을 대거 낳았다. 이들이 일본 록의 초석이 된 것과는 별개로 무분별하게 로큰롤을 수입한다는 지적과 다소 어색한 영어, 일본어 가사를 향한 비판이 따라다녔다. 블루스 록과 개러지 록 등이 주류였던 이 시점에 하다카노 라리즈는 67년도 사이키델릭 록과 독일산 익스페리멘탈 록, 동년 발매한 <The Velvet Underground & Nico>를 떠올리게 하는 노이즈에 어둡고 시적인 일본어 가사를 음악적 기반으로 삼았다. 시끄러운 음악이 어울리는 시끄러운 시대, 이들의 사운드는 사회 저항의 분위기와 주파수를 맞추며 태동했다.
태생이 저항적이지만 음악이 정치적인 건 아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피드백 사운드와 어둠, 살인, 피, 불꽃처럼 자극적이고 명도 낮은 단어들이 무기이자 전부다. 이후 데뷔한 두뇌경찰(頭脳警察)이나 무라하치부(村八分)가 오히려 메시지를 던지는 쪽이다. 미스테리어스한 미즈타니의 실루엣과 함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굉음의 공연장. 1970년 항공기 공중 납치 사건을 일으키며 북한으로 망명한 초창기 멤버 와카바야시가 실력의 한계를 느끼고 탈퇴했다는 이야기와 검은 헬멧을 쓰고 시위에 나섰다는 미즈타니의 차이는 하다카노 라리즈가 어떤 음악 집단인지를 분명히 한다.
밴드의 정체성은 미즈타니 타카시가 이룩한 것이지만, 하다카노 라리즈를 거쳐 간 수많은 멤버들 또한 영향이 적지 않다. <屋根裏 YaneUra Oct. '80>에서 느껴지는 블루스 록 풍의 기저에 야마구치 후지오(山口富士夫)가 있다. 앞서 언급한 더 다이너마이트와 무라하치부(村八分)의 기타리스트였던 그는 1980년 여름부터 1981년 봄까지 하다카노 라리즈의 기타를 맡아 총 7번의 공연에 참여했다. 본작은 그중에서도 80년 10월 29일 시부야 라이브하우스 야네우라 현장을 엮어 재현한 것으로 <'77 LIVE>와 <CITTA' '93> B사이드의 거대한 노이즈를 보존함과 동시에 포크 풍의 <MIZUTANI / Les Rallizes Dénudés>처럼 선명하게 들려오는 가사가 특징이다. 특히 77년, 80년, 93년 ‘夜、暗殺者の夜(밤, 암살자의 밤)’을 차례대로 비교했을 때 왜 야마구치 후지오 재적기를 ‘Double Heads’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다. 무라하치부의 <ライブ(라이브)>를 떠올리게 하는 도발적인 속주와 무겁게 가라앉은 톤에서는 하다카노 라리즈를 완벽히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보다 하다카노 라리즈와 완벽히 조화를 이룬다고 말하는 편이 적합하겠다. 두 번째 전성기의 주역은 분명 그였다.
라이브 위주로 활동한 밴드인 만큼 CD나 LP 등의 물리 매체 저장 공간의 한계가 아닌 공연 시간의 영향이 앨범 플레이타임을 결정짓는 것도 독특한 부분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가장 짧은 곡도 11분에 달할 정도로 긴 재생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소리가 크기도 하거니와 미즈타니의 개성 강한 보컬에 네 사람의 연주를 듣고 있자면 어느 순간 깊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리고 만다. ‘The Last One’에서 노이즈의 폭뢰를 한참 터뜨린 후면 역사로서의 하다카노 라리즈가 아니라 전위적 예술가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1967년 사회의 격랑 속에서 태어나 일본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이 된 이들은 제대로 된 스튜디오 앨범 한 장 없이 일본의 노이즈 록과 재패노이즈, 실험 음악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 하다카노 라리즈 사상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80년 라이브를 멤버였던 쿠보타 마코토(久保田麻琴)의 엔지니어링으로 부활시킨 90분.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진취적 노이즈의 현현 앞에 시간은 단순한 허상으로 전락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