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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와 P 사이에서 외친 건배, 에스파 <LEMONADE>

by 정기엽|

cover image of aespa <LEMONADE>
aespa <LEMONADE>SM Entertainment

K팝과 팝을 구분 짓는 선은 언어가 아니라 애티튜드라고 생각한다. 양측 모두 프로듀서의 영향이 지대하지만, 팝에선 아티스트가 보고 느낀 주체성이 앨범에 담긴다. –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K팝에서는 기획이 인물보다 커다란 경우가 많았다. 주어진 콘셉트를 수행해야 하기에 소화력이 중요했다. 허나 K팝이 밟는 땅이 넓어지고, 투어 내지는 활동 자체로 오가는 나라가 더 다양해짐에 따라 여러 관점, 이야깃거리가 수용되며 K팝 내에서도 자기 목소리가 중심이 된 사례가 늘고 있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부터 최근 데뷔한 코르티스, 올데이프로젝트 등이 스튜디오부터 무대까지의 삶, 쏟아지는 관심에 대한 환희 등을 주제 삼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 그리고 이는 에스파도 마찬가지다.

역설적이게도 에스파는 기획과 아이덴티티가 그룹을 양분한다. 초기에는 SM에서 설정한 세계관을 알지 못하면 가사를 이해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럼에도 ‘Next Level’, ‘Savage’ 등의 히트 넘버를 남기며 입지를 넓히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투어 종료 직후 새 투어를 발표할 만큼 활발하게 국내외를 오가고, 멤버 과반이 외국인인 덕에 문화 다양성 흡수 또한 빨라 멤버들의 색채도 거침없이 자라났다. 이런 배경 아래서 ‘Supernova’가 기록한 공전의 히트 뒤 솔로곡이 담긴 싱글이 연타석 1위를 차지하면서 그룹의 음악 안에서 개인 또한 돋보이기 시작했다.

‘Whiplash’는 기획과 멤버간 배합이 최적의 균형을 찾은 사례로 남고, ‘Dirty Work’와 ‘Rich Man’은 에스파 4인에 조명이 더 쏠린 채 그룹의 커리어는 이어졌다. 이 모든 일대기를 소스 삼아 장점은 강화하고 단점은 교체해 재창조한 앨범이 바로 <LEMONADE>다. 에스파가 임팩트를 남겼던 요소가 곳곳에 섞여 있으며, 티징 과정에서 공개한 셀프 오마주 세계관 영상이 이를 은은하게 설명한다. ‘Whiplash’, ‘Spicy’ 등 굵직한 장면들을 다시금 꺼내 들면서 말이다.

‘WDA (Whole Different Animal)’은 신스 베이스가 스산하고 어두운 느낌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Dirty Work’와 닮았다. 해당 곡에서 섬세한 질감의 비트가 재미를 주는 점은 보존하고, 보다 힘이 실린 카리나의 도입부, 지드래곤이 “She a whole different animal” 을 외는 구절을 반복 삽입해 후킹 포인트를 두며 기존의 밋밋함을 보완한 곡이 앨범의 서막을 꾸몄다. 지드래곤이 ‘Whiplash’, ‘Girls’ 등 제목을 인용한 가사를 선보인 8마디 랩은 후배 그룹을 드높여주는 의도, 귀를 때리는 소리 사이 환기 장치로써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앞선 사례에 이어 타이 달라 사인(Ty Dolla $ign)까지, 이러한 피처링 아티스트들은 에스파의 목소리가 닿을 수 없는 음색 구현을 가능케 함과 동시에 소위 ‘큰물에서 노는’ 이들을 초빙해도 꿀리지 않는 자신감을 표방한다. 에스파가 일렉트로닉 댄스 트랙 위에서 높인 속도감을 타이 달라 사인이 레게에 가까운 리듬감의 랩으로 비트는 재치가 돋보인 ‘Switchblade’는 의외의 조합이 만든 반전의 짜릿함이 크다.

빠른 템포의 EDM이라면 타이틀 ‘LEMONADE’도 마찬가지다. 당당한 움직임을 자아내는 질주는 곡이 담은 자신감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가사에 ‘Drama’를 직접적으로 차용하며 내러티브 연결을 도모하고, ‘Spicy’처럼 여름을 겨냥함과 동시에, ‘Supernova’, ‘Whiplash’ 같은 중독적인 한 방을 남기겠다는 여러 의도 사이에서 러닝의 목적지가 모호해졌다. 과한 첨가물 탓에 맛과는 거리가 멀어진 음료 같이 말이다.

이번 앨범은 그룹의 과거를 망라하며 현재를 드러낸다. 특히 최근작 <Rich Man>의 아쉽던 음악적 평가를 뒤엎으려는 듯 해당 작품의 개선 및 강화가 눈에 띈다. ‘Angel #48’의 몽환적인 색채를 하이퍼팝으로 다듬은 ‘Camouflage’ 그리고 ‘Rich Man’ 가사의 당찬 멋과 록스타 콘셉트를 음악에 다시 한번 푼 ‘Can’t Help Myself’가 그렇다. 특히 ‘Can’t Help Myself’는 같은 장르의 1집 ‘Live My Life’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며 그룹의 바뀐 태도를 전한다. ‘Live My Life’가 순수하고 청량한 K팝다운 록을 택했다면, ‘Can’t Help Myself’는 미국 백인 록스타의 전형을 그룹에 이식했다. 에스파는 더 큰 세계로 도약하려는 듯 음악적으로 K팝 색채 너머의 다양성을 <LEMONADE>를 통해 흡수하기 시작했다.

흡수의 과정에서 말끔히 담아내지 못한 부분 역시 존재한다. 영어 전래동요 ‘Row Row Row Your Boat’를 끌어온 ‘Roll’은 직전 트랙 ‘Switchblade’의 강렬함과 충돌하는 이질감을 빚었다. 전까지 씹고 뒤엎던 드센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귀여운 멜로디로 인해 붕 뜨고 마는 것이다. 더 큰 세상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야심은 엿보이지만 다소 진부한 방식이다. 가창에 참여했던 영화 <테트리스> 사운드트랙 중 ‘Hold On Tight’에서도 한 번 사용됐던 접근으로, 이미 한 번 시도했던 전적이 있으니까.

발전의 보폭을 취한 부분도 있는데, 멤버 4인의 보컬이다. 소녀시대 ‘You Better Run’, 레드벨벳 ‘Bulldozer’ 등 선배 계보도 두루 소화해 온 ‘Bite’나 하츠투하츠가 불렀어도 무리 없을 ‘My Plan’ 같은 곡에서 되려 이들의 실력이 드러난다. 닝닝의 안정적인 목소리와 카리나, 지젤이 가진 특유의 발성, 윈터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음색은 랩, 보컬 할 것 없이 무난하게 흘러갈 수 있던 곡에 힘을 덧댄다. 네 명의 밸런스와 동시에 에스파가 쌓은 소위 ‘쇠맛’으로 언급되는 음악적 이미지가 합일을 이룬 곡은 ‘SHAKIN’’으로, 다 같이 부르는 구절에도 개개인의 특색이 살아 숨 쉰다.

록 하나, 발라드 하나, 분위기를 맞추는 선에서 여러 장르를 담은 이른바 ‘백화점식 구성’은 여전하다. 그렇지만 첫 정규작 <Armageddon>에 비해 타이틀 두 곡이 주는 파괴력은 옅어졌으나, 수록곡의 전반적인 퀄리티는 상승했다. 공연에서 빛나며 레이블의 영향력에 공헌한 에스파에 걸맞은 음악이 가득하다. 럭셔리관에서 물건을 사고 나왔을 때의 기세등등함을 듣는 내내 느낄 수 있게 될 정도로. ‘Girls’, ‘Life’s Too Short’, ‘Rich Man’까지 활동 전반에 내비친 당당함이 <LEMONADE>에선 한 곡에 국한된 게 아니라 앨범 전체에 고루 녹아 있다. 이번 기회로 표출한 애티튜드는 그만큼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