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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으로부터 집단, 행간소음의 <독백적 집단>

by 권도엽 | 

cover image of 행간소음 <독백적 집단>
행간소음 <독백적 집단>Self-released

대중음악을 비롯하여 가사문학은 주로 운문으로 간주되지만 드물게 산문이나 단순한 말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음반이 통째로 하나의 화자나 서사를 상정할 때는 그것을 희곡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많은 록 오페라나 콘셉트 앨범의 주제는 은연중에 그런 식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런 맥락에서 행간소음의 첫 앨범을 서사적 틀에서 살피는 것은 정확한 통로는 아니지만 기발한 우회다. ‘독백’이라는 낱말 아래 희곡을 떠올리지 않을 의무도 없거니와, 서사의 형태가 아니라고 그 속에 이야기가 없지도 않기 때문이다.

음반의 제목은 <독백적 집단>이다. 첫 번째 트랙은 금세 이를 도치하여 곧이곧대로 ‘집단적 독백’으로 출발한다. ‘아무것도 아니야’에 이르러 “막연하게 길을 잃”는가 하면 ‘이른 귀가’에서 “차가운 말을 두르”기도 하는 쓸쓸한 단상은 트랙의 말미 “하늘을 나는 비말”과 “모른 체하는 표정들”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타자의 독백에 대한 나의 독백이다. 그 후 찾아오는 ‘미등’을 위시한 ‘갈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당신은’과 ‘정동 23번에 대한 메모’는 전후 트랙의 문학성과 대비되어 독특한 위치를 확보한다. 이것을 언어유희적으로 이전 트랙과 직후 트랙 사이의 잉여 트랙, 즉 행간소음이라 부르면, 이쯤에서 희곡의 형식을 도출할 수 있다.

‘술래’에서 드러나듯 “네가 만든 말”과 “내가 만든 말”은 각기 다른 행에 배치되어 희곡의 대사 양상으로 나아간다. 이때 행간소음이란 말과 말 사이 발언이 부재하는 때 들려오는 모든 소리다. 발화는 다른 누군가에게 뜻을 전하려는 행위지만 기호화되지 않은 소음은 불특정 다수가 감각적으로만 수용할 수 있다. 또한 지향성이 부재한 소리는 자연히 일방향으로 전해진다. 소음은 답변될 수 없다. 행간에서 발생한 소음은 개인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백 또한 소음의 일종이다. 독백은 대화가 되지 못한 유일한 언어다. 피상적 이해에 그친다면 다른 사람이 누군가의 독백을 듣게 된다고 해서 독백이 대화가 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개인은 대화할 때는 행의 주체로 나타나지만 독백할 때는 소음의 주체로도 나타난다. 독백하는 ‘나’는 소음이다.

앨범은 독백과 더불어 ‘오늘 밤은’과 ‘새벽형 인간’을 통해 어제와 내일 ‘사이’의 오늘이라는 시제를 행‘간’소음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날은 “무심하게 흐르고” 나는 “매일같이 가라앉”으며, 모두는 “같은 날을 반복하며 점점 쓰러져”간다. 우리는 영원한 현재다. 우리는 현재가 아닌 시간에 존재할 수 없다. 또 모든 현재는 과거가 되어가는 와중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지워지는 존재다. 숱한 음원 제작 과정이 소음에게 그러하듯 우리는 제거라는 숙명을 타고났다. 그렇기에 ‘17시’의 “말해줘”라는 요구는 당혹스럽다. 지워질 것들에게 발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느린 춤’이 말하듯, 그 말이 아무리 큰 위로가 된다 한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 발췌하면 “지나버린 시간을 등지고 느린 춤을 추며 웃는 표정으로 모두 괜찮다고 아무도 안 믿는 귀한 위로들을 애써 나눠 갖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기이하다. 아무도 믿지 않는 위로가 어떻게 귀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자세한 진술은 결말에 있다. 이미 2년 전 싱글로 공개된 바 있는 ‘나에게 맺힌 수만 가지의 당신에게’는 ‘당신’의 행태를 낱낱이 나열한다. 어투는 애증으로 가득하다. 노골적인 타자에 관한 독백에 불현듯 기시감이 느껴진다. 우리는 독백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존재로 하여금 대화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독백이 그토록 쓸쓸하던 이유는 명확하다. 나의 독백이 대화가 될 수 없는 탓이다. 잠시 다른 아티스트의 노랫말을 빌려 말하면 “그대는 내가 아니다.”(이소라, ‘바람이 분다’ 중) 당신과 내가 다르다는 사실은 비극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나만의 수많은 응어리진 감정과 사고는 타자에게 곧바로 전달되지 못하고 독백이 되어야 한다. 그 부조리에서 증오는 발생한다. 그렇다면 증오보다도 앞서 존재하는 애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타인을 갈구하는 증상은 완전히 근본적인 심리다. 고로 나는 독백이란 소음을 계속해서 발설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독백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독백은 집단적이다.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건 누구를 대상으로 말하건 특정한 말이 답변될 수 없거나 이해될 수 없거나 상대방이 응할 의지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독백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를 빙자한 독백은 우후죽순으로 솟아난다. 우리는 마주 본 채로도 독백하며, 많은 말을 뱉는 동시에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못한다. 그런데 도리어 이 기현상에서 유대의 가능성이 움튼다. 단 한 가지 사실만을 인정하면 된다. 타인도 독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과 내가 똑같은 소음이라는 것이다. 한없이 가여운 나의 존재를 타인에게 입각하는 이타. 집단적 독백으로 하여금 행(대화)과 소음(독백)의 경계는 무너진다.

그러자 ‘나에게 맺힌 수만 가지의 당신에게’는 “이름”, “몸짓” 같은 외양부터 시작해 “오만”, “고통”이란 증오에서 “옛날”과 “호의”라는 애정, “자취”와 “충동”이라는 내면을 훑은 뒤 모든 것을 버리고 주체만을 기록해 나간다.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나에게 맺힌 수만 가지 당신. 내가 독백하는 이유이자 독백이 대화가 되기를 바라는 이유. 그리고 같은 이유로 독백하는 당신. 그렇게 우리의 가닿지 못할 위로는 고귀한 것이 된다. 첫 번째 트랙명의 도치는 그 모든 트랙을 망라한 앨범명으로 다시 치환된다. 집단의 독백이 아닌 독백하는 우리. “내가 만든 말로 너는 속고 네가 만든 말로 나는 속”으며 그 비극을 살아내는 “우리는 우리는 우리는 우리는”… 비극 속을 온몸으로 꿰뚫으며 울고 멍들고 다치고 치료하며 노래하는 우리는 <독백적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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