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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6~27일 양일간 열린 Bunnies Camp 2024 Tokyo Dome 공연 영상이 8월 16일 쿠팡플레이를 통해 공개됐다. 이미 SNS를 한 차례 휩쓴 하니의 상징적인 무대부터 베일에 싸여있던 밴드 세션의 연주와 250의 디제잉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재즈·알앤비 기반 밴드 킹 누(King Gnu)의 베이시스트 아라이 카즈키(新井和輝), 힙합 기반 밴드 사나바군.(SANABAGUN.)의 키보디스트 오오히 유다이(大樋祐大)와 기타리스트 이소가이 카즈키(磯貝一樹), 세션 활동을 주로 하는 드러머 소이(Soy)는 Coke STUDIO SUPERPOP JAPAN 2023 이후 다시 뉴진스의 사운드를 직조하며 프로듀서 250 주도로 탄생한 블랙뮤직 리듬을 생동감 있게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2~3시간 전까지 기대와 긴장으로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가 있던 관객들이 공연장에서의 기억을 집까지 안전하게 가져가는 데 그치지 않고 공연장을 찾지 못한, 찾지 않은 이들에게까지 전파하고야 말았다. 특히 기존 일본 곡을 커버한 민지와 혜인, 하니의 무대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달라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멤버들의 서로 다른 해석이 결합해 있었다. 그들을 이토록 주체할 수 없게 만든 건 분명 환한 눈웃음과 그 눈동자가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첫 번째 커버 무대는 바운디(Vaundy)의 ‘踊り子(무희)’를 준비한 민지였다. 바운디는 일본의 동영상 커뮤니티 니코니코 동화에서 노래를 시작했고, 2019년 말 유튜브에 업로드한 세 번째 곡 ‘東京フラッシュ(도쿄 플래시)’가 글로벌 히트를 이뤘으며, 2023년에는 1집 수록곡 ‘怪獣の花唄(괴수의 꽃노래)’의 역주행으로 연간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대중과 서브컬쳐 층을 모두 사로잡은 가수다. 그래서 지금 제이팝을 듣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바운디를 알고 있을 것이다. 민지는 이 곡으로 동시대의 버니즈들과 함께 호흡하려 했다. 비슷한 또래 팬들이 이미 잘 아는, 자기 역시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던 노래로 공감의 징검다리를 놓았다. 추가로 첫날에는 자기가 입던 한림예고 교복을, 둘째 날에는 일본식 교복을 입어 무대의 현재성을 강화했다. 공연 도중에는 선물이 든 가방을 객석으로 던지기도 하며 ‘지금’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를 그대로 보여줬다.
‘怪獣の花唄’ 대신 ‘踊り子’를 부른 건 뉴진스가 대학 축제에 나와 앵콜곡으로 ‘Hype Boy’ 대신 ‘Attention’을 선택하는 것만큼의 갭이 있다. 동시대 일본 버니즈들과 즐기기 위해서라면 ‘怪獣の花唄’를 불렀을 때 한 명이라도 더 따라 부를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이런 장점을 조금 포기하고서 ‘踊り子’를 골랐다. ‘踊り子’는 ‘怪獣の花唄’와 달리 민지와 어울리는 저음역 중심이고, 무대 중간 무릎을 꿇은 채 나지막이 “있잖아. 왜 내가 좋은 거야?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는데.” 하고 속삭일 만한 가사도 가지고 있다. 자기에게 맞는 옷을 먼저 입은 뒤 버니즈들이 좋아할 수 있도록 무대를 꾸민 것이다. 자신이 외부인임을 인정하고 나서 처음 만난 관객들에게 한 발짝 다가가려는 시도, 밖에서 안을 향하는 시선. 민지는 지금 자신의 시선으로 도쿄를 바라봤다.
조명이 꺼지고 타케우치 마리야(竹内まりや)의 ‘プラスティック・ラブ(Plastic Love)’와 함께 혜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면 일본인들보다 우리에게 더 친숙한 인트로. 80년대 발표된 이 곡의 음악적 뛰어남과는 별개로 일본 내에서 히트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2000년대에 와서 웨스트 코스트 사운드에 요트 록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처럼 시티 팝이라는 이름도 2010년대에 와서야 생겨났고, 소수에게서 명맥을 이어 오던 플라스틱 러브가 해외 유튜브 사용자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러니 ‘プラスティック・ラブ’는 일본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선이자 일본 바깥에서 부풀어 오른 상상이다. 이날 혜인의 무대 역시 이 환상 안에 갇혀 있었다.
거짓된, 플라스틱한 감성을 보여준 건 아니다. 혜인은 줄곧 비슷한 취향을 이야기해 왔다. 미국 레코드 샵에서 1964년 보사노바 명반 <Getz/Gilberto>를 집어 들며 “레전드”라고 하거나, 포닝 라이브에서 빛과 소금의 1990년 곡 ‘샴푸의 요정’을 흥얼거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배경을 몰라도 “Dance to the plastic beat”를 말하는 제스처에서 직감할 것이다. 이 성숙한 테이스트의 근원은 어디일까. 만 16세로 그룹 안에서 가장 막내지만, 동시에 가장 키가 크고 언니 같은 그 몸과 마음의 틈에 파고든 사춘기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연예 활동을 해 오며 품게 된 쓸쓸함 같은 것 때문일 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들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 스크린을 흑백으로 물들인 것도 프로듀서 민희진의 도움이니 말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이든 간에, 뉴진스에서 오직 혜인만이 할 수 있었던 그 무대 위에서 혜인은 한껏 멋 부리긴 했어도 한마디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그 시선은 온전히 현재의 혜인이 과거를 응시하는 것이었다.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의 ‘青い珊瑚礁(푸른 산호초)’는 특별하다. 이 노래는 제이팝으로도 시티 팝으로도 거의 불리지 않았다. 타국에서 잘 호출되지 않던 노래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사정이 훨씬 나았어도 어디까지나 과거의 노래일 뿐, 80년대의 한 페이지에 남아 종종 추억될 뿐이었다. 솔로 아이돌 팝은 2000년대 AKB 사단에 의해 일본에서도, 1990년대 말 SM에 의해 한국에서도 사라지기 시작해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옛날 문법이 됐다. (아이유에게 <Modern Times>가 없었다면 마츠다 세이코와 비슷한 가수로 남았을까.) 묻혀 있던 과거를 발굴하는 일은 언제나 새롭다. 아무도 하니가 도쿄 돔 공연에서 ‘青い珊瑚礁’를 부르는 미래를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무대는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이 무대만큼은 확실하게 있을 수 없었다. 모두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과거’라고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실러캔스를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부르며 눈앞에서 숨 쉬고 움직이는 실러캔스를 쳐다보는 동안 수억 년 전 옛 모습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2024년 하니의 ‘青い珊瑚礁’ 역시 1980년이지 않나.
그러나 하니의 무대는 과거의 재현이 아니다. 우리는 단발머리와 스트라이프 티, 롱스커트와 하얀 하이힐에 80년대 마츠다 세이코의 모습을 보면서도 단발머리는 버블 검 뮤직비디오에서 왔다는 사실을, 세인트제임스 티셔츠를 비롯한 의상이 모두 오리지널보다는 요즘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디테일을 정확히 캐치해서 전부 지금으로 바꾸는 뉴트로 공식. 지난 SUMMER SONIC 2023 무대 이후 새로운 팬층으로 등장한 뉴진스 아저씨(ニュージーンズおじさん)와 그 이상으로 도쿄 돔 팬 미팅을 찾은 젊은 남성 세대까지, 기존 케이팝 팬층 바깥의 대중을 사로잡은 비결이다. 그 문법을 접한 일본 버니즈들은 빙키봉을 사이리움처럼 흔들고 케이팝 응원법 대신 일본식 아이돌 콜을 외치며 하니가 준비한 리바이벌 무대를 환영했다. 객석과 가수가 융화(融和)하는 순간 모두가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지금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때로는 호주 억양으로, 때로는 ‘팜투리’로, 때로는 서툰 베트남어로 팬들을 마주했던 하니는 이날도 도쿄의 시선으로 도쿄를 응시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오랜 친구 같은 얼굴을 하고서.
도쿄 돔의 뜨거운 반응에 닛테레(日本テレビ)와 TBS 등 일본 방송국들은 뉴진스 멤버들의 솔로 커버 무대를 추가로 마련했다. 여기서 다니엘과 해린이 각각 새롭게 준비한 인어공주 OST ‘Part of Your World’와 우타다 히카루(宇多田ヒカル)의 ‘Automatic’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6월부터 이어져 온 선곡의 공통점은 하나, 멤버들에게 잘 어울리는 노래라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青い珊瑚礁’와 ‘Automatic’의 반응이 좋았던 건 두 곡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히트곡이기 때문이다.
일련의 시간을 통해 일본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라면 유행하는 노래도 좋지만, 유행을 좇지 않는 이들과도 어떻게 화(和)할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학창 시절부터 클래식 음악과 밴드 음악으로 갈리고, 서양 음악과 일본 음악으로 갈리고, 여기서 다시 다양한 장르 음악으로 세분되는 세계 2위 규모의 음악 시장에서 이들 모두를 사로잡기란 불가능하다. 뉴진스의 공략법은 한결같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Ditto’, 다양한 음악가들을 한군데 모은 팬 미팅, 자기 멋을 담을 수 있으면서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노래를 선택하는 것. 보편적 전략의 현지화가 도쿄에 푸른 초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