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팝, 너 요즘 미감 미쳤다고 말 많이 나와
근 1년 사이 미감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 영화부터 포스터, 패션 및 뷰티 브랜드, 미술관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미감이라는 단어를 들이댄다. 비주얼과 무대 퍼포먼스 등 시각적 세련미의 첨단을 달려 온 케이팝 씬 역시 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조금만 검색해 봐도 제니, 로제, 아일릿, 엔믹스, 하츠투하츠, 키키, 심지어 데뷔하지도 않은 민희진 보이그룹을 향한 미감 칭찬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요새 단어가 사용되는 양상을 보면 원래 말이 가진 뉘앙스와는 조금 차이가 있는 듯하다. ‘미감 미쳤다는 팬들의 글릿 응꾸 실력’, ‘아이돌 앨범 미감 무슨 일이야 (P)’ 등의 뉴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문구가 보여주듯 이 표현은 사물에도 사용되지만, 이 대상을 수식하는 ‘미감 좋다’ 또는 ‘미감 미쳤다’는 말이 추앙하는 것은 대개 사람이다. 즉 시각적으로 세련된 대상을 통해서 바라본 제작자의 미적 센스를 칭찬 또는 비난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정의해볼 수 있겠다.
이상하다. 케이팝에서 가장 주목받아야 하는 건 멤버들일 텐데, 미감을 강조하는 건 주인공이 아닌 제작진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일 아닌가? 케이팝의 암묵적인 규정을 깨며 제작자들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앞선 뉴미디어 검색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미감은 바이럴 콘텐츠의 제목에도 들어간다는 점에서 의도적이다. 케이팝을 향유하는 팬뿐만 아니라 케이팝 스스로가 미감을 셀링 포인트로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케이팝은 왜 이런 선택을 한 걸까? 미감 좋다는 평을 받는 세 사람을 통해서 그 비밀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감 좋다고 소문난 사람들
케이팝에서 미감을 이야기할 때 민희진을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한다. SM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서 등기 이사까지 올라갔던 민희진은 하이브 산하 어도어의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기며 이전까지의 신비주의적인 태도를 버렸다. 뉴진스 데뷔 전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직접 “저는 제작자다 보니까 제작자가 너무 나서면 주인공이 되는 친구들이 가려질 수도 있”다며 그간 방송 출연이나 인터뷰 등을 의도적으로 피해 왔음을 밝힌 바 있다.
그랬던 그가 뉴진스 활동에서는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터뷰 같은 외부 활동 뿐만 아니라 때로는 녹음 디렉팅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등 창작 활동에 있어서도 깊게 관여했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작곡, 뮤직비디오 촬영 등의 작업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손에서 이뤄졌다. 대표적으로 BANA와 돌고래유괴단이 있고 새로 설립한 오케이 레코즈로 합류한 것으로 보이는 신동글, 이영음 뮤직비디오 감독과 블랙큐, 김은주 안무가 등도 알음알음 이름을 알렸다. 민희진 스스로 “나는 프로듀싱 총괄이 목적인 사람”이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설계에 능한 사람이다.
한편 2022년엔 JYP 출신으로 러블리즈와 이달의 소녀 등의 A&R로 명성을 획득했던 정병기(제이든 정)도 모드하우스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걸그룹을 론칭했다. 그는 ‘Butterfly’의 후렴과 “김밥처럼 넌 만두처럼 달콤해” 같은 가사를 만들어낼 줄 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다. 트리플에스도 그랬다. 데뷔 티저부터 ‘우리는 하나이자 스물넷입니다’라는 거짓말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다. 꼬박 3년에 걸쳐 멤버를 차례로 데뷔시킨 끝에 2024년 <ASSEMBLE24>를 통해 케이팝 걸그룹 최다 인원인 24인조 그룹을 완성시켰다. 매번 단발성의 유닛을 만들고 활동한다는 콘셉트 또한 차별적이었다. 첫 유닛 Acid Angel from Asia(AAA)가 나올 때만 해도 “정말 이 유닛 다시 활동 안 하냐”, “24명이 다 사람 맞냐” 같이 방향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정말 많았다.
그렇다고 그가 바이럴뿐인 기획을 하는 건 아니다. 모드하우스의 두 걸그룹 트리플에스와 아르테미스는 2020년대 글로벌 표준에 맞춰 디스코드 채널을 운영하고 유튜브를 통해 라이브를 진행하는 등 해외 접근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팬덤을 형성했다. NFT 포토카트인 Objekt 수익 금액을 바로 정산하는 계약 구조, 다음 유닛 구성과 활동곡을 투표로 결정하는 그룹 운영 방식 등 적극적인 팬 참여형 수익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24인조 구성 역시 ‘사람 많으니까 특이하지?’, ‘이 중에 한 명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지?’가 전부가 아니다. 데뷔가 준비된 멤버부터 차례대로 활동하는 증분형(incremental) 성장 모델, 8명씩 3팀으로 나눠 병렬적으로 진행하는 활동 방식을 보여주며 다인원 그룹의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트리플에스를 향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의 독특한 전략도 함께 주목받는다.
2025년 9월 23일 스케쥴표 (출처: 트리플에스 팬사이트 라카이브)
오랜 기간의 작업 경력으로 업계의 인정을 받은 두 사람과 달리, 이해인은 아이돌 연습생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커리어를 전환한 특이 케이스다. <프로듀스 101> 출연자이자 <아이돌학교> 조작의 피해자라는 비극을 딛고 새 걸그룹 키스오브라이프의 디렉터가 됐다는 이야기가 세간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그를 향한 “불쌍하다”는 동정의 말이나 “화이팅” 같은 응원의 말은 금방 필요가 없어졌다. 키스오브라이프 명의로 처음 공개된 작업물 ‘Sugarcoat (NATTY Solo)’ 뮤직비디오부터 곧장 뜨거운 반응을 모았기 때문이다. 같은 <아이돌학교> 참가자였던 나띠를 스카웃하고 데뷔 EP부터 스토리텔링을 내세운 전곡 뮤직비디오를 기획하는 등 키스오브라이프의 성공 뒤에 그의 공이 있었다. 이후 ‘Midas Touch’, ‘Sticky’, ‘Igloo’ 등의 곡이 차트 상위에 이름을 올리며 S2엔터테인먼트와 이해인은 맨바닥에서부터 비평적, 상업적, 대중적 성과를 일구어냈다.
보기 좋은 음악이 듣기도 좋다
세 사람이 만들어내는 콘텐츠는 한 마디로 ‘보기 좋은 음악’이다. “특히 지금의 K팝은 ‘보는 음악’이다. 과거에는 정말 음악 자체만 가지고 콘셉트를 만든다면 이제는 좋은 뮤직비디오 감독과 스타일리스트 등 협업의 규모가 늘어났다. 지금도 음악만 할 수는 있지만 내 견해로는 분리되기보다 이제는 하나로 묶이는 쪽이 맞다.” 정병기는 IZM과의 인터뷰를 통해 ‘보는 음악’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단순히 비주얼이 더 중요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음악이 시각적 환경 속에서 소비되는 전제하에 기획돼야 한다는 의미다.
숏폼 플랫폼 등장 이후의 케이팝은 2분에서 3분 초반대의 짧은 러닝타임, 도입부부터 코러스 혹은 그에 준하는 파트가 등장하는 악곡 구조, 그리고 빠른 화면 전환과 직선적인 시선 유도를 가진 뮤직비디오 등이 특징적이다. 이때 시각은 음악을 설명하는 보조 수단이 아니라 음악의 소비 방식을 설계하는 조건이 된다. 다시 말해 청각이 시각을 위해 조직된다. 다음 3개의 노래/뮤직비디오가 이런 속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앞선 세 디렉터는 에스테틱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보는 음악을 만든다. 에스테틱이란 2010년대 영미권에서 등장한 신조어다. 본뜻은 미학이지만 점점 특정 시각적 분위기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다. 세기말과 새천년의 강렬함을 품은 Y2K, 보랏빛 무국적 가상 풍경의 베이퍼웨이브, 텅 빈 공간에서 근원적 공포를 찾아내는 리미널 스페이스가 그 예시다.
에스테틱의 특징은 크게 3가지를 뽑아보고 싶다. 하나, 시각적 이미지가 중심이 된다. 리미널 스페이스나 프루티거 에어로 같은 건 물론이고 발레 코어, 놈 코어처럼 때로는 아예 패션 트렌드로 동작하기도 한다. 둘, 노스탤지어와 공생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과거 특정 시점에 존재했던 스타일을 박제해 하나로 모으는 서브컬쳐다. Y2K처럼 확실히 과거인 경우도 있지만 종종 베이퍼웨이브나 카세트 퓨처리즘 같이 미래지향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들은 노스탤지어 혹은 아네모이아*라는 측면에서 주로 다뤄진다. 그러나 “베이퍼웨이브는 결국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확장되면서 실행된다고 볼 수 있다.”** “과거 시대의 모티프를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환상의 세계를 구축해 냈다.”***는 말처럼 미래지향적인 측면이 있다.) 셋, 하위 문화로서 (인터넷)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누군가 어떤 이미지를 가져와서 거기에 이름을 붙이면 다른 사람이 비슷한 이미지를 가져오는 식으로 세를 키워 나간다. 리미널 스페이스를 상징하는 ‘The Backrooms’나 베이퍼웨이브 하면 떠오르는 매킨토시 플러스(Macintosh Plus)처럼 구심점은 있더라도 한 사람, 단일한 작품이나 이미지만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 경험하지 못한 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말** 이하림, "생경한 그리움: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잔재의 이미지", 2020*** Nicholas Morrissey, "Metamodernism and Vaporwave: A Study of Web 2.0 Aesthetic Culture", 2021
세 사람이 디렉팅한 그룹의 사례로 들어가 보자. 뉴진스의 ‘Supernatural’의 뮤직비디오는 베이퍼웨이브를 도입한 예시다. 스크린에 대문짝만하게 나오는 멤버의 얼굴, 보랏빛 도시 풍경, 어색한 폰트의 ‘심박수’ 등 전반적으로 90년대 뉴잭스윙과 베이퍼웨이브를 섞은 모습이다. 트리플에스 크리스탈 아이즈는 앨범 제목부터 <AESTHETIC>이다. 수록곡 ‘Touch’와 ‘(숨겨 봐봐) Hide & Seek’는 1세대 걸그룹 이미지를 재현하고, 타이틀곡 ‘Cherry Talk’의 뮤직비디오 CG는 글래스모피즘 기반 프루티거 에어로 에스테틱 계열로 볼 수 있다. 키스오브라이프의 ‘Midas Touch’는 Y2K 에스테틱으로 뮤직비디오가 4:3 화면비고 나띠의 반짝이는 의상과 거미줄이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을 연상시킨다.
NewJeans ‘Supernatural’ (Part.1)
tripleS +(KR)ystal Eyes ‘Cherry Talk’
KISS OF LIFE ‘Midas Touch’
이들의 작업에서 영상은 음악을 압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상은 음악의 정서를 확장하고 음악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숏폼형 보는 음악이 시각을 중심으로 청각을 배치한다면 에스테틱형 보는 음악은 청각을 중심에 두고 시각을 조율한다.
같은 하우스 장르를 택한 하츠투하츠의 ‘Focus’ 뮤직비디오와 키키의 ‘404 (New Era)’ 뮤직비디오를 비교해보자. 전자는 포 온 더 플로어의 킥과 클랩에 맞춰 편집점을 잡는다. 후자 역시 4/4박자를 기준으로 화면을 전환하지만, 프리코러스 구간(1:10~1:24, 1:55~2:10)이나 아웃트로 구간(3:05~3:20)처럼 에스테틱을 앞세워 이 리듬을 느슨하게 가져가기도 한다.
첫 4박자에 이안이 중앙, 카메라 줌인
다음 4박자에 오른쪽 45도 로우 앵글로 빠르게 줌 아웃하여 전환, 다시 줌 인하여 클로즈업
다음 4박자에 왼쪽 45도 하이 앵글로 전환
다음 4박자에 이안만 유지한 채 배경을 전환하는 연속편집 방식
첫 4박자에 줌 인
다음 4박자 시작할 때도 여전히 줌 인
6번째 킥에서 화면 전환
에스테틱형 보는 음악은 소리에 적합한 에스테틱을 구현하는 식으로 보는 음악을 만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행하는 장르 음악으로부터 자유롭다. 음악에 맞춰 일종의 에피소드형 세계관을 만드는 것이다. ‘Ditto’의 세계, ‘Bubble Gum’의 세계, ‘ASAP’의 세계에 등장하는 뉴진스는 같은 인물이지만 모두 다른 캐릭터다.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시각 이미지가 음악에 대한 콘텍스트를 제공하여 단번에 이 콘텐츠를 어떻게 즐겨야 할지 알게 해 준다. 동시에 그룹의 정체성을 시험하면서까지 장르적 유행을 좇을 필요도 없다.
먹는 감이 아니라 먹히는 감
보는 음악이 대두하면서 미감을 강조하는 게 사람들에게 ‘먹히기’ 시작했다. 이 시작은 ‘Back to 2016’이라는 유행어처럼(?) 2010년대 중반까지 올라간다. 그 시기 특히 유튜브를 중심 삼아 ‘요트 록’, ‘시티 팝’이라는 이름으로 1980년대 음악을 재발굴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발굴한 음악들은 당대 각각 AOR(Adult-Oriented Rock) 또는 웨스트 코스트 사운드, 뉴뮤직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많은 사람들이 요트 록과 시티 팝이라는 카테고리를 장르라고 인식했지만 실제로는 음악 요소적 구분이 아닌 이미지적 구분으로 작동했다. BTS가 화양연화 시리즈를 발매하고 해외에서 인기를 얻고 안무 퍼포먼스가 요인으로 지목된 것도 이즈음이다.
2020년대 코로나 대봉쇄 시기를 통과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됐다. 일본의 음악 평론가 츠야짱(つやちゃん)은 음악이 에스테틱으로써 창작 및 소비되는 배경을 장르 혁신의 포화, DAW 접근성 향상으로 인해 증가한 인디펜던트 음악과 개인 정체성의 발화, 스트리밍 알고리즘 및 무드 중심 플레이리스트, 팬데믹으로 인한 온라인 공간 접근성 향상에 있다고 주장했다. 트렌드를 선두하고 있는 찰리XCX, 핑크팬서리스, 막달레나 베이, FKA 트위그스, 율, 에피, 더 딥 등의 아티스트가 에스테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를 채용함으로써 트렌디한 보는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케이팝이 에스테틱을 입는 것도 납득할 만하다.
츠야짱의 주장에 사견을 덧붙이자면 일본의 경우엔 니코니코 동화에서 활동하던 요네즈 켄시가 메이저 데뷔를 하면서 유튜브를 적극 활용했고, 이것의 연장선에서 2020년대 전후 음악 청취 시장이 음반 중심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조금씩 이동했다. 한국에서는 2010년 전후로 이미 멜론, 벅스 등의 스트리밍 서비스가 자리 잡았지만, 유튜브 뮤직을 기점으로 스포티파이, 애플뮤직 등의 글로벌 서비스가 종전의 국내 서비스를 대체했다. 개인형 알고리즘과 무드 중심 플레이리스트의 배경엔 글로벌 스트리밍 서비스의 약진이 있었다.
음원 생산 실적·스트리밍 매상 합계 과거 10년 추이. 군청색 스트리밍 파이가 증가한다. (출처: PR TIMES)
이용 중인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해외 서비스가 상위권을 장악하고 있다. 1227명 조사. (출처: PR TIMES)
2025 음악산업백서 중. 유튜브 뮤직이 멜론을 제쳤고, 스포티파이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디렉터에서 멤버로
제작자가 전면에 등장하는 흐름 속에서, 아이돌의 위치는 어떻게 달라질까. 미감을 강조해서 멤버가 주목받는 방법은 없을까? 디렉터를 중심으로 한 에스테틱형 보는 음악이 효과적이라 한들, 역시 케이팝의 주인공은 멤버들이다. 5세대(?) 케이팝은 DIY라는 방식으로 이를 타파하려고 한다. 주목할 만한 그룹은 코르티스와 키키다.
코르티스는 빅히트 뮤직이 방탄소년단과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보이그룹으로 ‘작사, 작곡, 퍼포먼스, 비디오그래피 등을 다섯 멤버가 공동 창작한다. 뮤직비디오와 EP의 크레딧을 봤을 때 이들이 결과물에서 전권을 행사하고 있는 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전 멤버가 작사 참여 등의 일부분이 아닌 기획 단계에까지 참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강조하는 그룹이라는 점에서 짚어볼 만하다.
이에 비해 스타쉽엔터테인먼트의 키키는 완성된 기획 아래 제작됐다. 뮤직비디오에서 에스테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그 모습은 4세대 걸그룹의 연장선으로 보였다. 각종 화려한 폰트와 음악 방송 UI를 집어넣은 ‘DEBUT SONG’ 뮤직비디오나 귀여운 과일 폰트가 특징적인 ‘딸기게임’ 리릭 비디오에서 두드러졌다. 지난 달 발매한 <Delulu Pack> 역시 제목부터 에스테틱 사용을 예견했고 ‘Delulu’와 ‘404 (Not Era)’ 뮤직비디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404 (New Era)’에 있다. 먼저 공개된 뮤직비디오에선 테크토닉 안무 파트나 프루티거 에어로 스타일의 초원 배경이 주목받았는데, 이번에 강조하고 싶은 건 시작할 때 다섯 멤버가 직접 촬영한 영상과 이어지는 멤버들의 어린 시절 영상이다. 멤버가 직접 캠코더를 들고 촬영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고 실제 홈비디오를 삽입하여 DIY 감성을 강조한다. 심지어 뒤이어 나온 ‘(불펌X) 우리끼리 '404 (New Era)' 뮤비 찍어봄 ㅋlㅋl’는 이 DIY 감성을 한층 더 강화한다. 핸드헬드 촬영, 하두리 스타일 워터마크,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면비, 최대 480p의 해상도, 화면 오른쪽 아래에서 혼자 손을 흔드는 식의 편집 모두 2000년대 DIY를 에스테틱으로 사용했다.
키키의 DIY는 실제 DIY가 아니라 에스테틱으로써 사용됐다. 2005~2010년 태어난 멤버들이 2000년대 감성을 체화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불펌X’라는 표현부터 처음 들어봤을 가능성이 있다. 뮤직비디오 대부분이 핸드헬드 촬영본을 편집한 것이지만, 멤버 외의 사람이 다섯 명을 촬영한 것도 분명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뮤직비디오 촬영 비하인드 영상을 보면 여타 그룹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DIY(Do It Yourself)는 1910년경부터 단독 주택이 보편적이었던 미국에서 전문가 없이 스스로 주택 수리나 인테리어 등을 하자는 의미에서 시작한 단어다. 음악에서는 1970년대 펑크 씬에서 레이블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음반을 녹음하고 유통하면서 확산됐다. 저항과 온전한 개성 표현의 수단으로써 DIY는 ‘정신’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코르티스와 키키의 사례는 본래 의미의 DIY가 아니다. 코르티스는 대기업 자본과 프로듀싱 하에서 만들어졌고, 키키는 DIY로 개성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DIY를 하나의 에스테틱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자체를 개성으로 만들었다. (딕 헵디지가 <하위 문화: 스타일의 의미>에서 이야기했듯 전복적이고 반항적이며 급진적이었던 하위문화는 종국 주류에 흡수된다. 펑크가 팝-펑크가 되어 DIY를 잃거나 청춘-펑크가 되어 저항 정신을 잃어버린 것처럼 이들의 DIY 활용 또한 그런 식이다.) 그럼에도 이 ‘허락받은 DIY’와 ‘DIY 에스테틱’은 ‘미감 좋다’는 칭찬을 일정 부분 멤버들에게 환원시켰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에스테틱과 케이팝
사회학자 길례르미 지올로(Guilherme Giolo)와 미카엘 버그만(Michaël Berghman)은 논문 <The aesthetics of the self: The meaning-making of Internet aesthetics>에서 인터넷 미학이 “개인이 자신의 경험에 의미와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 상자(Toolkits)”라고 분석했다. 전통적인 가치관이나 사회적 구조가 힘을 잃은 현대 사회에서, 대중은 파편화된 정보들 사이에 자신을 투영할 맥락을 갈구한다.
지금의 케이팝이 에스테틱에 집착하는 이유도 단순히 ‘보기 좋아서’가 아니다. 케이팝 제작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구축한 정체성, 즉 ‘에스테틱’은 멤버와 팬들에게 단순한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나는 어떤 미감을 제공하는/향유하는 사람인가”라는 자아 이미지를 완성할 수 있는 구조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룹과 팬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에스테틱은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케이팝에서 사용하는 기획의 언어가 됐다. 그리고 그 언어를 다루는 제작자들이 점점 더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DIY 역시 정신이 아니라 이미지로 호출된다. 포스트 장르 시대, 보는 음악의 시대, 자신의 경험에 의미와 일관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식이 돌출해 나오는 2026년. 이제 케이팝은 단순히 노래와 아티스트를 파는 게 아니라 거대한 미학적 세계관 안에서 대중이 자신의 정체성을 조각해 나갈 수 있는 비주얼 설계도를 판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