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미학
힙합 아티스트에게 아이돌적인 것은 디스 거리가 된다. 언더그라운드를 상징하는 힙합 문화에 반해 KPOP이 상징하는 층위는 정반대에 위치한 상업주의다. 이 대중음악의 유구한 이분법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의식 속에서 대립적 정체성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인디음악의 곁에는 다원과 작가라는 낱말이, 주류 음악에는 보편과 유행이라는 낱말이 어울려 있다. 그들은 저마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인디는 주류가 딛지 않은 자리에서 미학적 승리를 쟁취했고 주류는 체계를 통한 상업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향은 선행한 미학을 기피하고 고유성을 확보하려는 예술의 근본적 동력 하에 여러 양상으로 발전했다. 보다 양극화된 사례가 있는가 하면 중도적 사례 역시 빈번했다. 상업주의의 최전선을 달려야 할 아이돌은 이제 기피되는 주제와 사회적 주제를 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치며 심지어 죽음을 (그것도 자살을) 논한다. 상처 난 얼굴의 아이돌, 트리플에스(tripleS)와 아르테미스(ARTMS)는 무거운 정서적 접근과 주류적 관습 사이에서 획일화에 치명상을 남긴다. 또, 두 영역을 병용하여 생경한 미감을 얻어내기도 한다. 맥시멀리즘의 형태를 띤 우울의 모습이다. 가장 충실한 세계관, 가장 첨단의 비디오, 가장 커다란 군무, 가장 많은 인원. 항상 우울과 어울리는 장르라고 간주되던 발라드나 어쿠스틱이 아닌 전자음악과 팝의 문법에서 아이돌 고유의 대중친화적 이점을 놓지 않고 스펙터클까지 아우른다. 나아가 이것을 블록버스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단순 창작력 바깥의 이야기로, 시스템만이 가동할 수 있는 규모의 생산력은 굉장히 다양한 색깔을 한 음반 안에 채워낸다. <ASSEMBLE25> 속 ‘@% (Alpha Percent)’와 ‘Friend Zone’의 상반된 기조와 <Dall>에서 유독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Birth’의 사례가 그렇고, 이는 트리플에스와 아르테미스가 KPOP 그룹 중에서도 기획적 성격이 강한 활동을 이어간다는 점을 떠올리면 더욱 놀랍다.
다르다는 것 외에도 취하는 소재가 다분히 KPOP적이라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트리플에스의 정체성이 잘 드러난 ‘Girls Never Die’의 다음 트랙 ‘가시권’의 짝사랑 테마는 장르에서 즐겨 사용하는 주제이고, ‘Midnight Flower’에서는 아이돌 그룹이 곧잘 그러듯 낙천적인 태도도 보인다. 팝이라는 넓은 테두리보다 KPOP 특유의 요소를 적소에 이용해 K가 가리키는 것이 단순 국가 지칭이 아닌 장르적 특색으로 이해되게 할 만큼 KPOP이라는 규격은 더 명확히 한다. 뒤따르는 의문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심연의 이미지가 가득한 KPOP. 아이돌마저 죽음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의 잘못일까? 아니면 죽음마저 다뤄내는 아이돌의 우수한 역량일까?
날개환상통
우울에 나름의 역사가 있다면, 예술에서 현대의 우울이 과거의 우울과 유난히 달라졌다면, 그것은 현대의 우울은 가해에 무감각하다는 점이다. 약칭 ‘멘헤라’의 등장은 단순 우울증이나 멜랑콜리아의 개념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멘헤라’는 이미지를 갖는다. 지뢰계 패션과 쿠로미 키링을 한 이들은 자신을 규정할 새로운 용어를 필요로 하며 우울을 병이 아닌 정체성으로 환원한다. ‘멘헤라’에 이르러 우울은 영구한 내 몸의 일부이다. 우울이 태생적이라는 생각은 자기 파괴와 결핍의 연속을 낳고, 이때 유일한 가해자이자 피해자는 오직 나뿐이다. 그러니 그 생각이 진실이건 아니건 우울은 정치적 기호 밖으로 유유히 빠져나간다. 언론과 사회학의 말마따나 정치적으로 논해져야 할 정신질환은 개인에게 고립된 채 수면 위로 튀어 오르지 못한다. 대중음악에서 주요한 구성물이던 정치적 발화가 더 이상 전과 같은 입지를 갖지 못함도 같다. 사운드로만 전해진 우울은 원인 규명 대신 공감에 기대어 뱉어지지 못하고 청자의 몸속을 맴돈다. 평화를 갈구하고 전쟁에 이빨을 드러내던 음악은 죽었다. 주류 음악의 우선 의제는 연애 감정이다. 그러나 우울을 활용하려는 예술가에게 정치와 우울의 절연은 외려 반가운 일이다. 우울이 더 이상 체제를 비판할 필요가 없는 오롯한 감정으로 남을 때 우울은 유희될 수 있는 하나의 감수성이 된다.
세계관을 공유하는 트리플에스의 뮤직비디오 3편 (‘Rising’, ‘Girls Never Die’, ‘깨어’)에서 소녀들은 죽음의 기운이 만연한 곳에 어른들과 격리된 채 살아간다. 어울려 춤추거나 서로를 구원하기도 하는 이들은 연대의 소중함과 절실함을 암시하며 비극을 타개하는 방식을 제안하는데, 어디에도 이토록 절절한 ‘비극’이 과연 무엇인지 지목하지는 않는다. 아르테미스 역시 ‘Virtual Angel’과 ‘Icarus’에서 현실/가상/허구를 넘나드는 위치에 분열하는 자화상을 그려 넣어 퇴폐를 더하고 있다. 작품을 통했을 뿐 혼동되는 공간은 단연 우리에게 당면한 것이다. 공간적 특성에 따라 저마다 상이한 페르소나가 오가며 나타나는 불안정은 디스토피아적으로 묘사된다. 이 경우에도 시각적 교란과 움직임뿐, 세계관의 연대기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날개’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면서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지닌 ‘Virtual Angel’과 ‘Icarus’가 보여주듯 사실상 콘셉트는 고의적으로 흐릿한 상태를 선호한다.
문제가 없는 문제의식. 분노가 없는 대미지. 공란에 머문 구체적 일화는 감상자 개개인의 문제적 경험을 투영하는 창구가 된다. 누구나 한 줌 정도 쥐고 살아갈 우울을 보편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비판보다는 위안을 다룬다. 물론 그 비판과 위안 중 무엇이 연대에 더 효과적인 술수일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변모하는 우울의 소비 양상에 가장 영리하게 반응한 음악으로써, 직접 말하듯 ‘Club for the Broken’의 역할을 무리 없이 꿰찬 것이 사실이다.
그간 대중음악에게 정치란 늘 적대적으로 이야기되어왔다. ‘This Little Light Of Mine’과 흑인민권운동, 히피들의 행진가였던 포크와 록, LGBTQ+와 BLM을 상징하는 근래의 몇 가지 음악들. 누구에게나 각자 맞서 싸워야 할 문제란 존재한다. 다만 단결과 연대의 차이를 굳이 밝히자면 우리는 우리가 맞이한 비극에 그것을 지시하지 않는 방식으로도 단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비극이 아닌 모든 비극이 비극이기 때문이다. 이별은 항상 짓궂다. 상실은 항상 슬프다. 죽음은 항상 나쁘다. 거리에 나와 구호를 외치지 않는 이들에게조차 연민은 번져야 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유대. 그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세상은 한결 윤택해질 것이므로 비정치적 연대에 정치적 효력이 없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KPOP을 중심으로 뭉치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해서, 아무튼 이 소녀들은 가릴 것 없이 우리의 모든 비극을 긍정할 것이다. 비극을 긍정한다는 말이 좀 거창하게 들려도, 글쎄, 아무튼이다.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