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에 발매된 archie의 새 앨범 <world in delay>는 한 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이번 작업에서 archie는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늘어지고, 어긋나고, 다시 겹치는 소리 속에서 그는 ‘형태’를 지우고 ‘감각’을 세운다. 하지만 그 감각은 건조하거나 차갑지 않다. 오히려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하고, 오래된 필름처럼 부드럽다.
CD를 모으며 쌓은 아날로그 감각, 전 세계 엠비언트 신을 읽어내는 넓은 시야, 그리고 어쿠스틱 기타로 직접 직조해 낸 선율까지. archie는 익숙한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 멜로디와 화성을 품은 엠비언트, 서사를 지닌 엠비언트를 만들어가며, 우리나라에 아직 없는 길을 스스로 열어간다.
이번 인터뷰는 그가 어떻게 이 낯선 온기를 완성했는지, 어떤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걸어가려는지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archie라는 아티스트가 지닌 아름다움의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이 만들어진 과정이 궁금했던 이들에게 이 인터뷰가 작은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
날짜 : 2025년 4월 15일
방식 : 대면 인터뷰
진행 : 이승원, 이예진
overtone: 이번 앨범 <world in delay>를 들었을 때, 공간을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번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부터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archie: 이번 앨범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시작됐어요.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주 일상적인 경험에서 출발했죠. 집에 설치된 통유리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어느 날 거리에 사람 하나, 차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한 모습을 마주했어요. 현실임에도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죠. 그 낯선 느낌이 제 안에 깊이 남았고, 자연스럽게 이걸 음악으로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world in delay>의 첫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overtone: 음악뿐만 아니라 앨범 커버, 영상까지 직접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rchie: 네, 이번 작업은 정말 제 감각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싶었어요. 커버 사진도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우연히 일본 작가의 이미지를 발견했는데, 보자마자 ‘이거다’ 싶더라고요. 빛의 질감, 색감,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공기의 밀도까지, 제가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분위기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어요. 바로 사용 허락을 구했고, 전체적인 비주얼 콘셉트도 그 이미지에 맞춰 조율했습니다.

overtone: 음악을 구성하는 과정에서도 이미지가 큰 역할을 했나요?
archie: 그렇습니다. 저는 음악을 만들 때 항상 풍경을 그린다는 느낌으로 접근해요. 특정한 빛의 방향, 그림자의 움직임, 습기 머금은 공기 같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고, 그것을 소리로 표현하는 식이죠. 이번 앨범은 특히 그런 이미지 기반의 작업이 주로 이뤄졌습니다. 단순히 사운드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을 그려내고 싶었어요.
overtone: 이번 앨범은 장르적으로 엠비언트에 가깝지만, 독특한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음악적 방향을 지향했나요?
archie: 저는 엠비언트 음악이 ‘흘러가는 배경’처럼 소비되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듣는 이에게 낯선 공간으로 이동하게 만드는 힘을 갖길 바랐죠. 이번 작업은 특히 독일, 일본, 미국의 엠비언트 음악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독일 엠비언트는 형태가 없이 추상적인 흐름을 지향하고, 일본은 섬세한 멜로디와 풍부한 공간감을 만들어내요. 미국은 보다 건조하고, 다듬지 않은 질감을 곧바로 드러내는 편이죠. 저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자연스럽게 융합해 보고 싶었습니다.
overtone: 곡들의 루핑 구조도 흥미로웠습니다. BPM을 일부러 맞추지 않으셨다고요?
archie: 네, 일반적으로 음악은 박자가 정확히 맞춰져 루프가 깔끔하게 이어지죠. 그런데 저는 이번엔 의도적으로 BPM을 맞추지 않았어요. 루핑이 조금씩 어긋나면서, 반복되지만 매 순간과 다르게 들리도록 했습니다. 현실에서 시간이 흐르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일정한 듯하지만 매 순간 미묘하게 어긋나 있잖아요. 그래서 앨범 제목도 <world in delay>로 정한 거예요.
overtone: 트랙들이 하나의 서사처럼 이어지는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구체적인 서사가 있었나요?
archie: 네, 앨범을 하나의 여정처럼 구성했어요. 첫 트랙에서는 ‘낯선 세계로의 착륙’이 시작되고, 이후 바람, 안개, 빛, 그림자, 천사 같은 상징들을 거치면서 진행되죠. 중간에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고, 마지막 트랙에서는 현실로 돌아오지만, 그마저도 처음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순간을 맞이해요. 이 흐름이 의식적이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느껴지길 바랐습니다.
overtone: 교토에서 어린이 합창 소리를 녹음한 일화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archie: 네, 교토 여행 중이었어요. 전혀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골목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어린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너무 순수하고 맑은 소리였고, 이 순간은 꼭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핸드폰으로 바로 녹음했고, 나중에 앨범 작업할 때 거의 편집 없이 원본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overtone: 이번 앨범에서 보컬 피처링도 인상 깊었습니다. ‘다린’님과의 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archie: 다린님과의 협업은 정말 운명처럼 자연스러웠어요. 어떤 트랙을 작업하던 중, 다린님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바로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락드렸고, 빠르게 만나서 세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곡이 지닌 이미지, 감정의 결, 전달하고 싶은 분위기에 대해 깊게 이야기했어요. 다린님이 보내주신 첫 번째 보컬 테이크가 너무 완벽해서, 거의 수정 없이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overtone: archie 님은 프로듀서로서도 다양한 아티스트와 작업해 오셨잖아요. 본인 이름으로 작업할 때와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archie: 전혀 다릅니다. 프로듀싱은 아티스트가 주인공이 되는 작업이에요. 저는 그들이 가장 빛날 수 있도록 그림자를 설계하는 역할을 해요. 반면 제 이름으로 작업할 때는 제 감정과 생각이 전면에 드러나죠. 그래서 더 자유롭기도 하고, 동시에 더 외로운 작업이기도 해요.

overtone :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라이브 공연을 준비 중이라고요?
archie: 네. 현재는 혼자 무대에 설 수 있는 라이브 셋을 준비 중이에요. 루퍼, 미디 컨트롤러, 간단한 신시사이저를 활용해서 몰입감 있는 공연을 구현하고 싶어요. 다음 앨범도 이 라이브 셋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방향으로 구상하고 있습니다.
overtone: 다음 작업에서는 한국적인 엠비언트를 시도하고 싶다고 하셨죠?
archie: 맞아요. 저는 한글이 가진 여백과 흐름을 엠비언트 사운드에 담아보고 싶어요. 한글은 한 글자에 다층적인 감정을 담아내고, 자연스럽게 깊고 느린 흐름을 만들어내죠. 영어처럼 빠르고 직선적인 언어와는 결이 달라요. 조동익 선생님의 <푸른 베개>(2020) 같은 앨범을 들으며 그런 가능성을 많이 느꼈습니다. 한글만이 지닌 리듬과 정서를 음악으로 풀어내고 싶어요.
overtone: 한글 가사를 쓸 때도 그런 부분을 고려하시나요?
archie: 네, 가사를 쓸 때는 의도적으로 과장된 표현을 피하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단어를 선택하려 해요. 또 멜로디 역시 한글의 리듬과 억양에 맞게 조율해야 해요. 영어권 멜로디를 그대로 적용하면 어색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세밀한 차이를 항상 신경 씁니다.
overtone: 마지막으로, <world in delay>를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길 바라시나요?
archie: 정해진 감정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익숙한 현실이 잠시 낯설게 보이는 경험, 일상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감각을 발견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 이예진
사진 : arch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