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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이와 아스카의 괴물

by 이한수 | 

黒岩あすか <怪物>Tuff Beats

오사카 출신 싱어송라이터 쿠로이와 아스카(黒岩あすか)는 작년 10월 레이블 Tuff Beats에서 정규 4집 <괴물>(怪物)을 발매했다. 나온 지 반년이 넘어 글을 쓰기엔 늦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럼에도 시간이라는 게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일 뿐이라면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음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한 본작에 이제나마 몇 마디 덧붙이는 것 또한 의미가 있으리라.

처음 들어본 이름이라면 당연하다. 바다 건너에 살고 있는 인디 싱어송라이터를, 그것도 이번 작품을 통해 첫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는 아티스트를 알게 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확히는 상업 스트리밍 서비스가 처음이다. 10년 전 2015년 6월 사운드클라우드에 ‘바다’(海)라는 곡을 올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자기 노래가 쉽게 소비되는 것이 싫어 스트리밍 서비스를 탐탁지 않아 하지만, 함께 작업한 동료들이 조금 더 알려졌으면 하는 생각이 더 커서 도전을 감행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스포티파이를 통해 본작을 접할 수 있었다. 이 무명의 앨범을 추천해 준 이유는 물론 나의 작년 최고작 <屋根裏 YaneUra Oct. '80>과 같은 레이블에서 발매됐기 때문에, 그리고 그 모습이 쏙 빼닮아 있어서겠다.

독특한 점은 반복에 있다. ‘또 아침이 와서’(また朝が来て)로 시작해 ‘다시 한번’(もう一度)으로 막을 내리기까지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되풀이된다. 동시에 그 하루하루는 너무나 무료해서 달력이 넘어가는 속도를 체감하긴 어렵다. 반복되는 날들 속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그 사람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면 쿠로이와 아스카가 딛고 있는 세계는 밤(夜)과 빛(光), 그리고 목소리(声)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이 빛이 의지할 수 없는 것(頼りない光)이라서 아침은 실체와 달리 밤의 여집합일 뿐이며 이 세계는 어둠 속에 목소리만 울려 퍼지는 고독한 공간이 된다. 그 목소리는 때로는 울음(泣く)이고 때로는 노래(歌う)다.

그렇게 탄생한 검은 소리는 네 명의 밴드 멤버의 조력으로 완성됐다. 오랜 시간 함께 활동한 스하라 케이조(須原敬三)가 베이스를 연주하고 senoo rickey가 드럼, hama와 HEAT가 기타를 담당한다. 이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건 베이스와 드럼이다. 반복하는 멜로디의 세기를 조절하며 시종일관 파도치는 밤바다처럼 어둡고 깊은 풍경을 만들고, 중앙에 있는 보컬 주위로 공간을 터 확 트인 수평선을 그려낸다. 포크 사운드를 기반으로 주인공이 천천히 입을 떼며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기면서 사이키델릭 록을 교차시키는 모습이 미즈타니 타카시를 향한 존경을 비춘다. 실제로 하다카노 라리즈무라하치부를 언급한 인터뷰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하이라이트인 6번 트랙 ‘괴물’을 장식하는 건 굉음의 노이즈보다 건반이다. 약간의 변주를 제외하곤 같은 형식으로 일관하는 피아노 리프에 맞춰 쿠로이와 아스카의 동화가 열리고 닫힌다. 그리고 ‘저주를 걸어 줘, 내게 저주를. 저주를 풀어 줘, 괴물이 되기 전에.’ 내레이션을 지나 기타의 퍼즈와 강렬한 드럼으로 염원을 쏟아내는 순간, 저주를 걸어달라는 부탁과 괴물이 되는 저주로부터 발버둥 치는 모순의 의미를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먼저 이해하게 한다.

SNS에 올린 글 “당신의 저주는 당신밖에 걸지 못한다. 당신의 저주는 당신밖에 풀지 못한다.” 그리고 라이너 노트 “언제부턴가 걸려 버린 저주가 모르는 새 거대한 괴물로 변합니다. 무척 무서운 괴물로 변해버릴 수도 있지만, 직접 좋은 저주를 걸어서 정말 상냥한 괴물로 변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두 단서를 바탕으로 ‘저주’를 풀어보자면, 가사 속 화자는 저주를 스스로 걸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과연 스스로 ‘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걸리는’ 것이라면 저주라고 부를 만하다. 저주가 찾아오는 걸 막을 수 없다면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건 그것을 ‘좋은’ 저주로 만드는 정도가 아닐까.

7~80년대 포크와 록 사운드를 바탕으로 자신의 암울함을 그린 <괴물>. 하루 24시간이 밤인 것처럼 계속해서 어둠이 찾아오는 쿠로이와 아스카의 바다는 그가 바란 대로 사나운 파도 대신 따뜻한 자장가를 부른다. 조금씩 밀어 보낸 우울과 분노는 뭍에 다다를 무렵엔 상냥한 바닷바람이 되어 있었고, 이제는 괴물의 형상도 거대한 그림자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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