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 미술가 제프 쿤스의 풍선 개는 자본주의 아래 예술의 공정 과정을 드러낸다. 작가 한병철의 말을 빌리자면 그에게 아름다운 것은 매끄러운 것이다. 스마트폰이나 자동차 표면의 디자인이 추구하는 미학. 음악에서조차 잡음은 제거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때 대중음악이 오래 지닌 자유가 함께 제거당한다. 매끄럽다는 것은 모나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끄러움은 획일화의 이념을 내포하고 개성을 차츰 갉아먹었다. 몰개성이 예술의 목적지가 아님에도 늘 그래왔다.
아마추어리즘은 구원처럼 보였다. 스포트라이트의 이면에서 개성을 주창한 인디 음악계가 ‘Lo-Fi’나 ‘홈레코딩’으로 불린 아마추어리즘의 자재를 택했다. 거칠거나 단순하거나 솔직하거나. 간간이 명맥을 이어온 반주류적 음악은 그 이름도 ‘야생마와 자유부인’인 듀오의 그 제목도 <야생마와 자유부인>인 음반에 이르렀다. 커버 속 이들은 모래밭에 앉아 프레임(틀) 바깥을 쳐다본다. 한 명은 붉은 옷을, 또 한 명은 검은 옷을 입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아나키의 상징이 겹쳐 보인다.
오해는 아니지 싶다. ‘날 괴롭히지 마요’에서 말하듯 그들은 “가능하다면 Yes or No로 나누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말할” 심산이다. “으름장은 통하지 않”는다며 으름장을 내놓는 이들의 음악은 잡음과 동시에 역동성을 갖춘다. 말 울음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야생마와 자유부인’ (이 곡은 지난 2월 베이스와 드럼, 퍼커션을 추가해 밴드 버전으로 재발매되었다.)의 “높은 천장 내겐 아무것도 아니지”라는 가사와 “자유로운 들판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위나 앞으로 치닫고, 이어지는 ‘Annoying Bitch’의 “나는 거스르는 년”, “심기 불편하게 하는 년” 같은 자기 멸칭은 젠더 담론에서 광의로 등장하는 개념 ‘유리 바닥’의 붕괴로 다가온다. 아마추어리즘은 야생마와 자유부인에게 솔직함과 큰 연관을 갖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형식과 주제 사이 무엇이 선행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어쿠스틱, 블루스라는 수식이 무색하게 유사성은 음악 외부에서 눈에 띄었다. 야생마와 자유부인은 무키무키만만수나 미미시스터즈를 연상시킨다. 물론 단지 멤버 구성만이 근거는 아니다. 그들은 아마추어리즘의 수호자이자 기수였다. 국내 대중음악에 이런 반기는 아주 드물게 발생했지만 가치 증명은 충분했다. 질감을 애착하는 시장에 창작의 순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서툴고 거친 저층에서 발현한다. 이러고 보니 “거스르는 년”이라는 노랫말, 그것은 찬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