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은 선명하지 못하다. 최소한 우리는 현실을 선명하게 파악하는 법을 모른다. 지각은 미약하다.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현실에 우리는 앞길을 혼동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다. 소실(Sosil, 消失)이 현실을 논하는 말투가 몽롱한 연유다. 선명하지 못한 현실의 진상을 폭로하고, 우리를 교란하는 현실을 배반하고 싶어서다. 현실은 도피의 대상이다. <몽상은나의조랑말> 첫 곡 ‘멀어’는 곧대로 멀리 떠나려는 마음이 운을 떼는 순간이다. 하지만 시작은 동시에 극단을 가리킨다. “불행을 기다리던 사람처럼 두 발이 땅에서 자꾸 떨어지네”, “끝은 늘 정말 한순간에 다가와 어둠으로”. 그의 말에서 죽음의 향이 풍긴다.
두 번째 곡 ‘창밖에’에 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분위기가 갠다. 톤은 높아지고 이미지는 “반짝반짝”해진다. 창이 예술에 있어 각별한 사물이기도 할 것이다. 창은 오랫동안 관조, 채광, 숨통의 터널이었으며, 마그리트 같은 화가에 의해 새삼스레 초현실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자연이 예술이라면 창은 건축에서의 화폭이다. 다만 화폭처럼 타인의 몽상을 보는 대신 실재를 본다. 그러므로 몽상은 타인이 아닌 내가 한다. 나의 자리가 바로 몽상적 장소다. “어디를 보나 내게는 창밖에 머무는 사람들”이라는 가사는 이런 공간 설정을 연상시키면서, 화자가 도주한 곳이 죽음이 아닌 몽상이라는 희망적 언질을 남긴다. 그러나 그마저도 한낱 소절일 뿐 여전히 제목은 ‘창밖에’다. 문을 열고 나가면 다시 현실이 있다. 영원히 몽상 속에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곡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왜 나는 문을 열고 신발을 신지 못할까?” 물으면, 밑창 없이 세계를 대면할 용기가 없어서고, 왜 나는 “끈을 (…) 다시 묶어보려다가 방금 창밖의 소리에 모두 금방 잊어버리”는가? 물으면, 밑창 위로도 세계를 대면할 마음은 잡히지 않음이며, “왜 나는 모두가 하는 그 일을 못 하”는가? 물으면, 틀렸다고 답하며, 창밖의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밀실에서 같은 생각을 한다고 덧붙여야겠다.
이 괴로움은 최초에 외면당한다. 현실의 괴로움이 클수록 창 안의 ‘나’는 비현실적 공상으로 치닫는다. 3번 트랙 ‘미끄럼틀’은 정점을 내보인다. 언뜻 사랑 노래처럼 비치는 가사는 구원에 가까운 “너”와의 조우로 읽힌다. 그것은 종교적 존재일 수도 연인일 수도 있다. 실상 그 둘은 도피처로 정해졌을 때만큼은 구분되기 어렵다. 그래서 ‘미끄럼틀’은 이를 두고 “큰일”이라 한다. 사랑은 구원처럼 온다. 그러나 종교와 사랑은 창 안의 것이라 ‘나’ 안에서 몽상의 성질만을 띤다. 창밖을 압도하지 못한다. 힘찬 드럼의 도입처럼 나타나 현실의 집요함에 끝내 미끄러지는 리타르단도(ritardando)다. 몽상하는 찰나는 달콤하여 “끝이 어떨지 예감을 해도 거부할 수가 없”지만, 다섯째 곡 ‘44’에서 노래하듯, “미룬 슬픔이 찾아오면 (…) 회한의 기도도 몽상도 어느새 가로막힌 길이” 된다. 인간은 온 생애를 사랑에 담그고 다닐 수 없다. 모든 사랑은 결국 헛사랑이다. 심지어 어디에도 “너”의 묘사가 부연되지 않음으로 보아, 이 몽상은 말 그대로 몽상에 불과하다. 사랑의 대상이 몽상이라면 사랑이라는 몽상도 없다.
몽상의 허무를 본 주인공은 다른 도피처를 찾아 떠돈다. ‘슬픔과어둠’은 하소연을, ‘몽상은나의조랑말’은 허구나 꿈에 가까운 몽상을, ‘이젠 나아지기를’은 기도를, ‘눈과피’에선 분열을 경험한다. 마땅한 거처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상향 ‘노르웨이’에서는 결심한다. “들은 목소릴 못 들은 체 할 수는 없”다. “환상에 붙들려서 수많은 것들을 놓”칠 바에 “우두커니 서서 아침이 다가오는” 걸 기다린다. 신발 끈을 조인다. 창은 깨진다. 그러나 비참은 깨지지 않는다. 결심의 과실, 마지막 트랙의 제목은 겨우 ‘숨고싶은날’이다.
‘숨고싶은날’은 기묘한 자문자답으로 낙담처럼 진행된다. 마치 거절이 두려워 선수를 치듯 “나에게 말을 걸어줘요”라고 하더니 곧바로 “하지만 대답은 안 할 거예요”라고 한다. 이제 그는 “사람들의 부지런한 대화 속에” 있지만 다시 “숨고 싶”다. 그러다가도 “한숨 푹 자면 괜찮아질” 거라지만, 글쎄, 이 음반의 가장 어두운 면은 이제서야 나타난다. 나는 ‘숨고싶은날’이 <몽상은나의조랑말>의 마지막 트랙임을 확신하기 힘들다. 모든 곡이 순번을 지키고 1번으로 회귀할 때 우리는 다시 땅에서 두 발이 떨어지는 화자를 만난다. 그리고 반복 재생의 냉혹을 깨닫는다. 최소한 ‘숨고싶은날’이 화자의 생애 마지막 날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를 결말로 간주할 수 없음도 자명하다. 이를테면 현실은 우리를 무한히 벼른다는 것이다. 창밖과 화해할 수 없으면서 창밖을 향하는 모험의 종착지는 둘이다. 반항처럼 살다 자연히 죽는 것, 또는 현실의 승리를 인정하고 자의로 죽는 것. 이 열린 결말에 공포는 예사롭게도 서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