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crying-glacier.com/
우리가 얼마큼의 소리를 두고 음악이라 부른 이래 모든 음악은 음악의 몸체를 가늠하는 일이었다. 그 단어의 모서리를 서성이는 음악가들은 저변을 확장하거나 개념을 해체하는 데에 이르기도 했다. 누군가는 피아노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았으며, 누군가는 그 피아노를 부수었고, 누군가는 악기가 아닌 것을 연주하며, 누군가는 악기로 악기에서 날 법하지 않은 소리를 내었다. 그러다 창작의 한계를 실험하던 음악은 이제 의도된 소리가 아닌 현상적 소리를 겨눈다. 이 분야에서는 낯선 단어로, 픽션과 논픽션, 허구와 실재, 그리고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를 대두할 만한 사운드다.
뉴욕 타임스의 Op-Docs에 올라온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 <Crying Glacier>는 해당 영화의 감독이자 음악가인 루트비히 베르거 (ludwig berger)의 동명 앨범을 바탕으로 한다. 전형적인 앰비언트 음악으로 들릴 물소리는 루트비히 베르거가 알프스에서 가장 큰 빙하 중 하나인 모르테라치를 녹취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소리를 내는 것은 더 이상 모르테라치 빙하가 아닌 것들이다. 모르테라치 빙하가 녹으며 발생시키는 공기 방울이 터지는 소리와 녹은 이후의 물줄기 소리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매년 알프스의 빙하는 기록적 수치로 소실되는 중이다.
이 앨범에서 창작의 주체는 누구일까? 사운드 디자인을 도맡은 루트비히 베르거의 이름은 당연히 거론돼야 하겠으나, 밴드캠프에 올라온 앨범의 아티스트명에는 그의 이름 옆에 나란히 모르테라치 빙하의 이름이 적혔다. 루트비히 베르거는 음악에서 소리를 내는 주체로 모르테라치 빙하를 추켜세우고 있다. 무엇보다 환경파괴의 온상을 논하기 위해 빙하의 이름을 동원하고 싶었겠지만, 그런 어림짐작과 관련 없이 <Crying Glacier>의 크레딧을 일반 대중음악적 관점에서 살핀다면 프로듀서에 루트비히 베르거가, 소리를 발생시키는 모르테라치 빙하가 악기로, 그리고 그 모르테라치 빙하를 연주하는 실연자로는 바로 우리가 떠오른다는 점이 시사적이다. 그러니 앨범 크레딧에 세계인의 이름이 각기 병기될 자격은 충분하며, 그것은 이례적으로 수치스러운 이력이 될 것이다.
12개의 현이든 88개의 건반이든 악곡의 자율성은 현실을 통째로 연주하는 이에 비하면 얄팍하다. 물론 대가가 비례한다. 대중음악이 미적인 음향이나 정치적인 발화의 문제였다면 루트비히 베르거는 자기 자신과 청자를 포함한 현존하는 자연의 절멸을 두고 퍼포먼스를 내놓는다. 물론 그는 주최자일 뿐 수행하는 역할은 모두의 몫이다. 드러난 현실의 단면으로 성찰적 체험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음악으로는 드물게 기록 예술로서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음반은 뉴욕 타임스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본 제목처럼 ASMR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자율 감각 쾌락 반응)과 같은 형상을 띠고 있지만 속뜻과는 달리 쾌감보다 공포나 좌절감을 안기는 것이다. 혹은 빙하가 녹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별 불편 없이 안주하는 인간 군상을 은근히 명시하려는 것도 같다.
연구 단체 ‘글래모스’는 2100년까지 알프스 빙하가 현 면적의 80% 이상을 상실할 것으로 예상하고, 영화는 끝에 “루트비히 베르거의 녹음본은 빙하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놀랍게도 이 말만큼은 그다지 생경하지 않다. 우리는 <Crying Glacier>의 방식이 아니더라도 일찍이 환경에 대한 경고음을 지속적으로 들어왔던 것이며 전부 무시해온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이 음반으로 왔다. 듣고 싶지 않았고, 들어서도 안되었으며, 들었을 땐 너무 늦었을 소리이면서, 청취를 거부하기 위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가장 거대한 울음소리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