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작가 코바야시 코다이 作
다이브(dive)의 다른 말은 ‘몰입’이다. 아오바 이치코의 몰입은 도파민의 쾌락이 아니라, 현실감각을 지우며 평온을 유도하는 세로토닌의 방식에 가깝다. 2020년 발매한 <Windswept Adan>에 이어, 그는 또 한 번 바다로 침잠했다. 팬데믹으로 공연이 멈춘 이후, 오키나와 최남단의 해안에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류큐 제도의 유인도는 아오바에게 정신적 피난처였고, 그 피난은 또 하나의 세계가 되어 음악으로 치환되었다. 우리가 이 앨범에서 감지하는 정서는 바로 그 ‘피난처의 정서’다.
그가 피난처로 인도하는 방식은 꽤 친절하다. 두 번째 트랙 ‘24° 3′ 27.0″ N, 123° 47′ 7.5″ E’에 적힌 좌표는 하테루마 섬의 등대를 가리킨다. 음악 속 피난처가 구체적인 이미지를 얻는 순간이다. 표류하듯 떠밀려가 마침내 도달한 곳, 한낮의 해변이 아닌 고요한 밤 바다, 그 위로 조용히 번지는 노란 불빛. 보이지 않아 아득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바다의 무게감과 존재만으로도, 세파에 닳은 현실은 잠시 잊힌다. 피난의 순기능이다. 그리고 그 안에 선 나는, 문득 낯선 감각을 마주하게 된다. 익숙함이 모두 지워진 곳에서 - 더욱이 그것이 자연이라면 - 나는 다른 생명체와 다르지 않은, 단순하고 미미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오히려 편안해진다. 아오바 이치코는 그 섬을 직접 겪어내며 음악을 썼다. 현존하는 장소를 깊이 통과한 영혼이 빚어낸 정서는, 그저 상상으로만 채색된 감정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 마디로 그의 작품 특징 중 하나는 현실 기반의 추상인 셈인데, 이를 청각화하여 전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아오바 이치코는 첫 트랙의 몇 초만으로 단숨에 자기 세계로 청자를 이끄는, 감각을 음악으로 정제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Coloratura’ 초입의 코러스 레이어는 세이렌을 연상케 하며, 이어지는 D 노트의 반복과 플루트 선율, 현악기의 상승 패시지가 자연스럽게 공간감을 형성한다. 청자는 그것이 ‘바다’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아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자마자 그렇게 느끼게 된다. 감정이 아닌 설계로 감응을 유도하는 셈이다. 청자는 아오바 이치코가 직조한 메커니즘을 통해 자연스레 인도된다.
이 앨범이 고도로 설계된 작품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 작품이 ‘신비롭다’고 느끼게 되는 것일까? 대부분의 탈 현실인 감각은 작품이 익숙한 형식에 위배될 때 생겨난다. 아오바 이치코의 음악은 규칙적인 비트보다 그저 ‘흐름’에 가까운 설계로 시간을 잊게 만든다. ‘Coloratura’의 후반부부터 등장하는 헤미올라(Hemiola) 구조는, 2박 계열의 선율 위에 3박 단위의 리듬 악기가 얹히면서 박자의 발판이 무너지고, 청자를 리듬의 바다에 부유하게 한다. ‘떠 있다’는 감각은 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이자, 바다라는 테마의 청각적 구현 방식이다. 정해진 박자로 걷게 하는 대신 망망대해로 청자를 끊임없이 밀어 넣을 때, 몰입이 곧 도피가 되고 탈 현실의 문이 되며 우리는 이를 그의 음악을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치유받는다’고 느낀다.
화성적으로도 이 앨범은 ‘규정되기’를 거부한다. ‘Luciférine’에서 명확한 종지 없이 이탈하며 유예되는 코드 진행과 낭만주의 말기의 프랑스 음악에서 흔히 보이는 온음계적 진행(도-레-미-파-솔-라-시-도가 아닌, 도-레-미-파#-솔#-라#-시#(=도)와 같이 온음 간격의 음계만 사용, 소위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냄)을 활용한 방식은 드뷔시와 라벨의 향취를 짙게 풍기며 종잡을 수 없는 바다의 이미지를 그린다. 그러나 아오바 이치코는 단순히 인상주의의 문법만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만의 감각으로 새롭게 배열한다. ‘aurora’의 전통 발라드 적인 코드가 그렇듯 그녀의 곡은 어디에도 정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저 순간의 흐름을 따라가되, 방향에 저항한다. 바로 그 순간성의 집적이 청자에게 일종의 초월적 경험을 부여한다. ‘지금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으로 귀결되지 않고, ‘어디에 있는가?’라는 존재론적인 감각만이 남는 것. 순간에 머묾으로써 평화로워지는 아오바 이치코의 음악 세계다.
청자를 끝없이 부유하게 만드는 음악 속에서, 아오바 이치코는 한 가지 표식을 남긴다. 바로 ‘mazamun’이다. 이 앨범의 중반부에서 언급되는 이 존재는 실제 오키나와섬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적 캐릭터로, 바다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 말을 거는 정체불명의 존재다. 아오바 이치코는 이 존재를 통해 ‘왜 이곳에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마치 동화처럼 부드럽고 조용한 톤으로 말을 건네지만, 피할 수 없을만큼 집요하게 되묻는 형태다. 빛 한 줄기 없는 바닷속을 유영하다 들려온 그 음성은 어쩌면 구원처럼 매우 다정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결국 존재를 직면하게 만들기에 뼈아프다. 단순히 자연을 그린 사운드스케이프적인 작품에 머물지 않고, 명상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존재의 응답을 시도하는 조용한 전환점이 되는 트랙이다.
‘mazamun’이 바닷속 질문하는 존재라면, 질문을 받는 존재이자 우리와 동일시 되는 생명체는 바로 이 앨범의 표제이기도 한 ‘발광 생명체’이다. 아오바 이치코는 인간인 우리를 발광 플랑크톤에 비추어, 그 생명체가 내뿜는 빛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인간의 감정과 같은 반응으로 보았다. 외부 자극에 반응하여 순간적으로 빛나는 유기체. 마치 고독한 상태로 있다가 어떤 일말의 자극이 와닿을 때 비로소 자신 안의 무엇인가가 반응한다는,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생의 발화로 감정을 보았다. 아오바 이치코는 이 과정을 ‘빛이 인다’고 표현한다. 빛은 오래 지속되지 않지만, 영원하지 않아 소중한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는 이를 특유의 통찰로 깊은 바다에서 발견했다.
이 정도로 깊은 사유를 가능케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소리의 부재’에 있다. 연주되지 않은 음, 비워둔 마디, 침묵의 시간들. 이 여백들은 청자가 이 앨범을 들음으로써 한숨 돌리는 계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서늘하게 나 자신의 존재를 감각하게 만든다. 클래식 기타리스트인 그녀의 기타 줄이 울리기까지 손가락의 스침, 마이크에 잡히는 소리 등 음계를 벗어난 소리가 음악을 이룬다. 이 작품이 일정 부분 음가 없는 소리로 가득 찬 ‘침묵’의 앨범이기도 한 이유다. 아오바 이치코는 이렇듯 음을 쌓기보다 비워내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며, 들을수록 더 조용해지는 곡들, 그 고요 속에서 청자로 하여금 비로소 자기의 감정을 마주하게 한다.
아오바 이치코의 음악이 듣는 이를 위로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말로 감정을 건네거나, 고통에 공감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같은 어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확인시켜 준다. 깊은 바닷속 홀로 빛나는 생명체처럼 말이다. 그 존재의 외로움은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의 음악은 슬프지도 않으면서 그저 마음을 움직인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말 대신, ‘나도 여기에 있다’는 현존의 방식으로써의 위로. 그렇게 아오바 이치코는 애써 외로움의 이유를 나열하지 않고도 청자의 곁에 머물기를 택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치유’라는 납작한 단어로 덮어버리고, 단순 포크 앨범으로 규정해도 될까?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포크라는 말로 가두기엔, 지나치게 정교하고 밀도 높은 구조를 지녔다. 클래식 기타연주자인 그녀의 기타와 보컬을 중심으로 하는만큼 포크적인 요소는 분명 존재하지만, 곳곳에 배치된 현악기와 목관악기, 앰비언트적인 요소들이 실내악처럼 섬세하게 구성되어 전체를 단단하게 지탱한다. 예컨대 ‘Tower’에서 피아노 아르페지오와 첼로의 피치카토가 만들어내는 왈츠 리듬은, 각 악기가 자기주장을 하면서도 특정한 방향으로 청자를 끌기보다는, 하나의 장면을 구성하는 조용한 중심으로 기능한다. 한 마디로, 이 앨범은 ‘소규모 오케스트라’다. 게다가 사운드는 매우 가까이서 연주하는 것처럼 설계되어, 몰입의 틈새를 허용하지 않는 치밀함이 돋보인다. 이 밀착된 사운드 속에서 우리는 그저 하나의 고요한 줄기를 따라가면 된다.
이렇듯 아오바 이치코는 단순한 싱어송라이터가 아니다. 그녀는 이야기를 소리로 설계하며, 더 나아가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히 짓는 건축가다. 동시대 일본 음악계에서도 그녀의 위치는 특이하다. 숲을 소재로 인스트루멘탈 음악을 낸 하루카 나카무라처럼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작가들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오리사카 유타처럼 자기만의 서사를 그리는 내면성을 지닌 아티스트들이 그녀를 매듭으로 연결되는 흐름이다. 고요하고 조용하면서도 절대 작지 않은 세계를 통해 청자로 하여금 개인의 정서를 다시 해석하게 만드는 독보적인 음악을 한다.
<Luminiscent Creature>는 우리를 바다로 밀어 넣는다. 앞서 이 바다를 ‘정신적 피난처’라고 서술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온함의 상징만은 아니다. 오히려 존재가 흔들리는 공간, 감정을 직면하게 만드는 칠흑 같은 어둠에 가깝다. 이 앨범은 감정의 소요를 드러내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을 삼키는 부동의 자세로 오히려 불안을 잠재운다. 또한 그 안에, 빛을 받기보다 스스로 빛이 되는 생물들을 보여주며 말한다. 당신도 그렇게 스스로 빛나고 있다고. 그러면 청자는 어느 순간, 침묵 속에서 자신도 발광(發光)하고 있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