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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리스트, 21세기의 선우예권

by 이예진|

cover image of 선우예권 <LISZT>
선우예권 <LISZT>Universal Music Ltd.

클래식에도 아이돌이 존재한다면 그 시초는 바로 리스트다. 19세기 최초의 스타 피아니스트. 뛰어난 음악성 뿐만 아니라 수려한 외모에 손가락도 길었다. 그에게 마음을 뺏긴 팬덤을 일컬어 ‘리스트 마니아’(Lisztomania)라고 불렀다. 마치 마이클 잭슨의 장갑처럼, 리스트의 장갑은 팬들의 실랑이에 찢어졌고, 급기야 그가 연주하다 끊어진 피아노의 현(絃)은 목걸이로 만들어졌다. 투어도 돌았다. 오늘날 우리가 ‘리사이틀’이라고 부르는 형식을 정착시킨 인물이다. 1840년대를 중심으로 유럽 주요 도시와 러시아를 순회했다. 그야말로 스타의 탄생이다. 그는 피아니스트의 틀을 깼다. 기존의 곡들을 연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 자신의 색깔을 입힌 ‘편곡’으로 ‘리스트 특유의 레퍼토리’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공연으로 인한 수입까지. 이번 앨범의 라이너 노트에 적힌 표현처럼,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찍이 보여준 음악가”다.

선우예권 역시 다르지 않다. 반 클라이번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하고, 세계적인 레이블 데카와 계약한 뒤 세 번째 앨범으로 ‘리스트’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 국내 피아노 스타의 탄생과 함께 형성된 팬덤, 그리고 피아니스트로서 전성기의 나이. 이번 앨범 역시 리사이틀을 동반한다. 그야말로 젊은 시절, 커리어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발매한 앨범. 그렇기에 이번 앨범의 수록곡 면면은 11개 트랙 중 대미를 장식하는 대곡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3~4분 내외의 소품들로 짜임새 있게 구성되었다. 대부분 ‘가곡’을 원곡으로 하는 멜로디가 짙은 구성으로, 한 번 들으면 대중의 귀에 각인 되어 오랜 시간 동안 사랑을 받아온 곡들이다. 대중에게 한 걸음 과감히 다가간 행보다.

다만 첫 곡은 낯선 곡이다. ‘고타 군주들의 묘지 섬(Die Gräberinsel der Fürsten von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가문을 위한 곡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의 형, 에른스트 2세가 쓴 가곡을 리스트가 편곡했다. 한 마디로 리스트의 ‘사회생활’이 낳은 편곡이다. 맥락이야 어찌 되었든, 곡은 아름답다. Eb의 아르페지오가 꿈결처럼 펼쳐지고, 그 위를 서정적인 선율이 수놓는다. 죽음을 다룬 곡임에도 말티츠의 시가 원천인 덕에, 평화와 꽃의 은유로 아름답게 쓰였다. 마치 성악가가 노래하는 가곡처럼 흘러가는 이 멜로디를 따라 듣다 보면 우리가 흔히 ‘리스트’라는 이름에 기대하는 화려하고 테크니컬한 빠른 템포의 넘버와 대비되는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된다. 리스트가 ‘인간의 목소리를 담은 피아니스트’라는 선우예권의 시각처럼,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곡을 처음에 배치함으로써 연주자가 바라본 관점과 주제가 선명히 드러난다.

물론 이 앨범에는 우리가 선우예권과 리스트라는 앨범명에 기대하는 ‘위안(Consolations)’, ‘사랑의 꿈(Liebesträume)’, ‘헌정(Widmung)’, ‘메피스토 왈츠’와 ‘헝가리안 랩소디’까지 모두 수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앨범이 보편적인 리스트 컴필레이션 앨범과 다른 점은 바로 비주류 레퍼토리인 조세프 데사우어(Josef Dessauer) 원곡의 ‘유혹(Lockung)’ 수록에 있다. 선우예권은 이 작품을 작년 말 유튜브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중저음역대의 비교적 묵직한 멜로디의 걸음걸이 사이로 고음역의 비눗방울이나 투명한 유리알이 피어나는 듯한 텍스쳐가 인상적인 곡이다. 선우예권은 이번 리스트 연주를 두고 ‘fine한 와인잔’에 소리 표현을 빗대었는데, 그 표현이 떠오르는 트랙이다. 익숙한 넘버들 사이로 희귀하고 표현적인 자신만의 ‘디깅’ 트랙을 배치함으로써, 앨범의 독특한 색을 더하고, 동시에 선율적이라는 점에서 전체의 궤를 같이한다.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트랙을 연주자의 의견을 타진해 배치할 만큼 데카와의 협업 구도도 돋보이는 부분이다.

마지막 트랙인 ‘헝가리안 랩소디’를 두고 선우예권은 ‘피날레와 같은 트랙’이라고 했다. 공연을 앞둔 리사이틀에서는 직전 트랙인 ‘메피스토 왈츠’가 피날레인 것과 달리, 앨범에서는 이 트랙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광시곡 특유의 절도 있는 절제미가 돋보이는 도입부는 같은 음을 두 번씩 선언적으로 연타하는, 마치 팡파레와 같은 움직임을 지닌다. 호로비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듯한 마초적인 움직임과 달리, 선우예권은 이를 훨씬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연주한다. 9분 46초 간의 러닝타임 동안 우리가 리스트에 기대한, 직전 트랙인 ‘메피스토 왈츠’의 발랄한 화려함과는 사뭇 다른 다크 판타지를 맛보게 된다. 앞선 가곡 베이스의 트랙들과 달리 앨범의 말미에 두 트랙을 나란히 배치한 것은, ‘테크닉이 음악에 우선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로서의 음악, 리스트의 본질로서 먼저 리스너를 설득하고 싶은 선우예권의 의도가 느껴진다.

선공개로 공개된 트랙은 2번 트랙에 위치한 ‘Consolations No.3’, “위안”이다. 이 곡은 저 멀리 안개처럼 피어나는 왼손 연주 위로 청자의 귀에 노크하는 듯한 오른손의 첫 두 음에서 연주자의 해석을 가늠할 수 있다. 동시대 조성진의 “위안”이 애수가 알알히 박힌 강한 타건이었다면, 선우예권은 이를 마치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실례되지만 들어가도 됩니까’라고 조심스럽게 묻듯 첫 음을 뗀다. 이는 평온함(placido)이기도, 또 안전한 선택이기도 하다. 쇼팽 녹턴과 자주 비교되는 이 곡은 리스트가 직접 작곡을 한 곡이다. 저마다의 작곡가 태생의 언어와 숫자로 점철되어 제목의 가독성이 떨어지는 클래식 곡들 사이로, “위안”과 같이 주제와 메시지가 직관적인 제목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간의 목소리를 피아노로 담아낸다는 선우예권의 의도에 가장 밀착한 트랙이 있다. ‘그레첸 암 슈핀라데(Gretchen am Spinnrade)다. 물레 앞의 그레첸. 이 곡은 슈베르트 원곡의 가곡(D.118)을 리스트가 편곡(S.558, No. 8)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 그레첸이 물레를 돌리며 파우스트를 그리워하는 장면을 노래한 곡. 시종일관 돌아가는 물레가 화자의 내면과 맞물려 혼란을 표현한다. 피아노 한 대로 물레를 표현하는 반주와 성악가의 선율이 마치 각기 독립적인 피아노로 노래하듯이 연주된다. 슈베르트의 좀 더 거칠고 성난 호흡의 텍스쳐가 리스트에서 유리알처럼 투명한 물레의 질감으로 다듬어지고, 이를 선우예권이 담백하게 봉합하는 세 겹의 매개가 느껴진다.

아마도 가장 대중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곡은 “헌정(Widmung)”이 아닐까.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리스트는 음악사에서 자주 회자되는 관계 중 하나다. 원곡은 슈만이 클라라에게 바친 곡. 부점 리듬과 함께 두 음이 쌍을 이루어 움직이는 패턴의 도입부는 마치 한 쌍의 새를 보는 듯하다. 리스트는 중반부에 원곡에 없던 아르페지오와 옥타브를 넣으며 화려한 편곡을 선보이지만, 재창조라기보다 원곡에 비해 다소 과장된 듯 들리는 순간도 있다. 그럼에도, “당신은 나의 더 나은 자아”로 끝맺는 뤼케르트의 시를 바탕으로 한 곡인 만큼, 더 펼쳐 보이고 싶었던 리스트의 연가를 선우예권이 마치 숲속의 정원에서 햇살을 받으며 연주하듯 아름답게 해석했다.

19세기의 리스트, 21세기의 선우예권 image2© 유니버설뮤직

선우예권은 이번 앨범 발매일에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십 대 시절, 자신이 음악을 가슴으로 이해하기 전에 테크닉적으로 완벽하게 연주했던 과거를 회상했다. 클래식 음악계는 여전히 콩쿠르 입상이 메이저 레이블 계약과 연주 투어로 이어지는, 그리하여 성공적인 음악 생활을 위해서는 각종 대회에서의 수상이 중요한 흐름을 보인다. 이 앨범에 실린 “메피스토 왈츠”를 기계처럼 완벽하게 연주해 내는 전국의 청소년들이 얼마나 많단 말인가. 그만큼 이 곡은 ‘리스트’와 ‘콩쿨’이라는 두 글자에서 빠지지 않는 곡이기도 하다. 이 앨범은 ‘인간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가곡 편곡 곡들 위주로 구성됐음에도, “메피스토 왈츠”를 실을 수밖에 없었다. 공연에서도 엔딩을 맡는 이 곡은 어쩌면 리스트가 남긴 악마의 재능이자 음악의 메시지보다 테크닉에 먼저 매혹되고 마는 우리의 본능을 마주 보게 만든다. 실제로 선우예권은 20대 때 리스트가 ‘과시적이기도 하고 보여주기식 연주가 많은 작곡가’라는 의구심을 품고, 그를 연주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화려한 기교의 향연으로 리스트를 소개하는 대신, 그의 음악이 지닌 풍부한 표현력과 철학적인 깊이를 드러내고 싶었다는 선우예권의 말처럼, 이 앨범은 그러한 방향으로 기획됐다. 그럼에도 메피스토 왈츠를 실은 것은 대중성과 프로그램의 균형을 고려한 선택처럼 보인다. 원곡보다 앞서 질주하기보다 ‘두꺼운 고무줄의 저항감을 느끼며 당기듯이 연주했다’라는 그의 표현대로, 곡과 기교 사이의 ‘철저한 중심’이 돋보인다.

결국 이 앨범을 통해 우리는 클래식이 대중성을 확보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친숙한 선율과 짧은 피스, 그리고 감정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제목. 리스트는 그러한 곡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선우예권도 커리어의 정점에서 그 구조를 선택했다. 앞선 ‘고타 군주들의 묘지 섬’에서처럼, 귀족의 곡을 편곡하면서 자신의 후원자에게 봉사하는 동시에, 음악 교사로서, 또 스타 피아니스트로서, 호기심 많은 편곡자로서 오직 ‘피아노’라는 악기에 천착한 그의 행보는 후대의 피아니스트인 선우예권에게도 본능적인 끌림 혹은 영감을 주었는지 모른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무대 뒤의 수많은 관계자와 음악계의 움직임 속에서, 씬과 대중을 향해 한 발 다가갈 것인가, 자기 세계로 침잠할 것인가. 그 답은 최근 국내 클래식 시장의 흐름 속에서도 반복해서 확인된다.

이 앨범은 베를린에 위치한 교회에서 녹음되었다. 배경을 모른다면 스튜디오 녹음으로 들릴 만큼 울림과 공간감이 균형 있게 잡혔다. 이 앨범의 상업적 성패를 논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19세기의 리스트와 21세기의 선우예권. 같은 악보를 사이에 둔 두 피아니스트의 연주 장면이 겹쳐진다. 각기 색채는 다르더라도 피아노로 인간을 표현하려는 두 마음의 방향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