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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의 '슈베르트' : 필연과 덧없음에 관하여

by 이예진|

cover image of 백건우 <Schubert>
백건우 <Schubert>Universal Music Ltd.

“선생님, 왜 슈베르트입니까?” 카메라 불빛과 타이핑 소리가 뒤섞인 간담회장, 기자가 질문했다. 데뷔 70주년, 여든을 맞은 거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답했다. “음… 한 마디로 ‘필연적’인데요. 작품을 선택한다기보다, 작품이 내게 오는 것에 가깝죠.”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슈베르트를 연주한 이유는 ‘필연’이라는 단어로 갈음된다. 네 개의 소나타가 그 답이다. 슈베르트의 생의 집약이자, 그 위로 포개어진 거장의 음악 인생. 해맑은 청년 시절부터 절망과 수용,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200년의 시차를 둔 두 예술가가 비로소 한 호흡으로 공명한다.

이번 슈베르트 앨범은 네 개의 피아노 소나타로 구성되어 있다. D.664, D.894, D.784, D.959. 흥미로운 것은 작품이 쓰인 순서와 달리 D.784와 D.894가 뒤바뀌어 수록됐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기승전결의 흐름처럼, 빛에서 광대한 고요함으로, 그러다 어둠을 마주하고 끝내 그간의 모든 길을 통합하는 서사를 그린다. 어쩌면 거장이 슈베르트를 경험한 내면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슈베르트의 삶은 압축적이다. 31년 간의 생애. 그 안에 돈도, 명예도 없이 그저 숨 쉬듯 곡만 쓰다가 세상을 떠난 청년이 있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은 억압되어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밀고와 검열이 만연하던 시대. 발언권을 박탈당한 시민 계급은 살롱, 가정음악, 자연으로 도피하며 에너지를 내적으로 수렴했다. 억압 속으로 내향화한 시민의 시대, 이른바 ‘비더마이어 빈’이다.

네 개의 소나타는 그 압축된 삶의 장면들이다. D.664, A장조 소나타(1819)가 맨 앞에 놓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앨범을 플레이하면 흘러나오는 첫 선율은 명랑하고 순수하다. 22살. 그의 인생에서 드물게 밝았던 여름. 한 마디로 아직 상처받기 전의 슈베르트다. 친구 포글과 함께 슈타이르로 떠난 여행에서 산과 호수, 소박한 마을 사람들의 환대를 마주한다. 앞서 말한 비더마이어적 낙원의 실존이다. 세계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이 곡에 묻어난다. 이곳의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조세핀 폰 콜러를 위해 쓴 소나타라는 점에서 기교적으로도 쉽고, 덕분에 표정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기쁨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A장조의 1악장.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이 흥얼거리는 콧노래처럼 흘러간다. 빠르기는 알레그로 모데라토임에도 백건우는 이를 마치 서두를 것 없다는 듯, 여유로운 템포로 연주한다. 덕분에 다른 버전의 다소 빠른 템포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슈베르트 특유의 ‘노래하는 선율’이 풍성하게 밀려온다. 처음 주제에서 나왔던 ‘딴-따단’하는 부점 리듬이 베이스에서, 또다시 소프라노에서 반복되는 것을 만끽하며 듣다 보면 어느새 곡의 말미에 도달한다.

안단테로 흘러가는 2악장에서는 오스트리아 특유의 즐거움 뒤의 슬픔이 스며든다. 차분한 호흡으로 백건우의 코 숨소리를 따라 주제를 따라가다 보면, 알베르티 베이스에 애수 어린 선율이 흘러나온다. 4분의 3박자, 오른손 음 하나에 잔잔하게 반복되는 왼손 반주. 여백이 많다. 마치 가곡의 그것처럼, 성악가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슈베르트 연주를 두고 백건우는 ‘무엇을 하려 애쓰기보다 하지 않으려 해야 한다’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했다. 베토벤처럼 논리를 따르거나, 모차르트처럼 흐르기보다, 기악곡임에도 호흡을 머금은 선율의 구현은, 어릴 적 성악을 하고 1815년 한 해에만 가곡을 144곡 쓴 슈베르트 내면에 노래의 샘이 끊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한번 타건하면 그 이후를 컨트롤 할 수 없는 피아노의 특성상, 슈베르트의 선율은 ‘무엇을 더 해야 하나?’라는 압박을 줄 수 있다. 그것을 내려놓음으로써 슈베르트에 가닿았다. 거장은 오랜 ‘구도’ 끝에 ‘무위’에 도달했다. 3악장은 우리가 피아노에 기대하는 바로 그 화려한 연주가 담긴 트랙이다. 모차르트처럼 발랄하게 흐르는 선율과 대비를 이루는 묵직한 옥타브 베이스가 극적이다. 강렬하게 내리치는 포르티시모에서는 20대 청년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친절하고 사려 깊게 말을 건네다 화려한 피날레로 펼쳐 보이는, 20대 초반의 슈베르트다.

이윽고 이어지는 D.894는 G장조 소나타(1826)다. 앞선 생동감 있는 트랙과 대비되는 초연한 주제는 무언가를 더 이상 원하지 않기로 한 사람의 목소리를 닮았다. 사실 이 곡은 29세. 그러니까 자신의 죽음을 어느 정도 예감했을 때의 곡이다. 뒤이어 수록된 D.784가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고 고통에 시달린 26세에 쓰여진 곡이라면, 이 곡은 매독의 급성기를 넘긴 후 체념과 수용의 정서에 도달한 시기에 쓰였다. 슈베르트 특유의 가곡적 선율은 이 작품의 주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말과 말 사이의 쉼표. 어떤, 평정에 이른 차분한 정적이 깃든 시작이다. 백건우는 이를 마치 무도회장의 두 남녀가 손을 맞잡고 정중한 스텝으로 움직이듯 연주한다. 소프라노와 베이스의 움직임마다 스텝을 바꾸는 모양새.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이렇게 운명을 딛고 나아간다는 듯이, 그 자리에 멈춰선다.

만약 당신이 죽음을 직감한 청년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슈베르트는 이 해에 빈 황실 궁정 악단의 부악장직에 지원했다가 낙방한다. 우상인 베토벤이 빈의 음악계에 우뚝 서 있고, 그 그늘 아래에서 슈베르트가 야심을 내려놓고 내면 세계로 파고들던 시기에 쓰인 곡이다. 2악장에 들어서도 d단조로 기도하듯, 명상하듯 흐르다가 중반부의 격렬한 폭발 이후 더 깊은 고요로 침잠한다. 백건우의 단호하며 절도 있는 포르티시모로 시작해 포르잔도가 연속되는 주제에 이어, 대조를 이루는 피아니시모 아르페지오 패시지의 아름다움이 밀려온다.

미뉴에트의 3악장, G장조 론도의 4악장에는 같은 건반을 연달아 연주하는 연타의 주제가 드리워진다. 가뿐한 움직임. 그렇게 결국, 아름다움이 슬프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이른다. D.664의 밝음이 아직 슬픔을 모르는 무구함이었다면, D.894는 고요하게 기쁨을 드러낸다. 환상을 버림으로써 도달한 세상과의 화해. 알프레드 브렌델이 이 소나타를 슈베르트의 소나타 중 가장 완성된 것 중 하나로 꼽은 것은, 바로 이 경지 때문일 것이다.

장엄한 발걸음.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울림처럼, 유니즌으로 움직이는 D.784, a단조 소나타(1823)의 주제에는 어떤 노래의 건조함마저 느껴진다. 첫 트랙이었던 D.664와 비교하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4년 사이에 슈베르트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들린다. 1822년 말, 매독에 감염된 이후, 당시 치료제로 쓰이던 수은은 그 자체로 독성 물질. 극심한 고통 속에 수 개월간 병원 생활을 하던 슈베르트는 친구 쿠펠바이저에게 전하는 편지에 이렇게 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인간이라고 느낀다네.”

유니즌에 이어, 오케스트라의 드럼처럼, 긴장감을 조성하는 트레몰로가 낮게 깔린다. 오페라 “알폰소와 에스트렐라”의 실패, 흥행에 참패한 “로자문데”까지. 대외적인 성공에 대한 꿈이 산산조각 난 상황. 이 소나타는 그즈음에 쓰였다. 베토벤처럼 압축적이고 강인한 에너지. 그였다면 더 복잡하게 썼을 레이어들. 슈베르트는 보다 단순하게 썼다. 그것이 오히려 고통을 더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2악장 안단테의 주제는 처연하다. F장조로 둥글게 그리는 거대한 질문과 같은 선율에 응답하며 따라붙는 중저음역대의 대답은, 어딘가 애써 밝은 척하면서도 석연치 않은 의미심장함을 남긴다. 위로받아도 해결되지 않는 마음. 그 뒤에 이어지는 고음역대의 셋잇단음표 선율 표현에서 거장의 무결한 터치를 느낀다. 그러다 대위적 주제로 흘러가는 3악장 알레그로 비바체는 짧고, 힘 있고, 빠르고, 묵직하게 광기에 가까운 질주로 D.784를 마무리한다. 이 소나타는 오랜 시간 주목받지 못했다. 퉁명스럽고, 날 것 그대로의 고통이 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슈베르트의 중요한 소나타 중 하나로 재평가받는다. 꾸밈없는 절망의 표현이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그로부터 5년. 슈베르트는 생의 끝을 두 달 남기고 D.959, A장조 소나타를 쓴다. 놀라운 것은 11월 19일, 세상을 떠나기 전인 9월에서 10월 사이에 D.959를 포함한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썼다는 점이다. D.958과 D.960 사이, 세 소나타의 중간에 위치한 작품. 백건우는 이 곡을 두고 오랫동안 답을 찾지 못해 남겨두었던 곡이라 했다. 15세에 유학 초창기에 배웠던 D.664와 이 곡을 한 앨범 안에 담았다. 슈베르트의 인생을 통해 백건우의 음악 인생을 집약한 앨범이다.

D.959는 마치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악장별 기승전결이 뚜렷하다. 1악장 A장조의 당당하게 절제미가 있는 분절된 주제로 시작해, 2악장 f#단조로 완전하게 침잠한다. 그러다 3악장 스케르조에서 밝고 분주하게 도약하며 움직인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A장조로 회귀한 4악장 론도에서는 오랜 병고 끝에 겨우 돌아온 집처럼, 품이 넓은 위로의 선율을 건넨다.

이 앨범에서 가장 긴장감 넘치는 파트는 2악장 안단티노에 있다. f#단조의 우울하고 구슬픈 뱃노래와 같은 고요한 주제가 흐르다가, 고음역 옥타브, 트릴로 이어지는 불안하면서도 극적인 움직임은 포르티시모로 울리는 코드로 폭발한다. 이윽고 피아니시모의 선율과 대비를 이루는 부분에서, 각각의 포르티시모와 피아니시모가 서로 영향받지 않고, 독립된 에너지로 존재하도록 거장은 완벽한 컨트롤을 해낸다. 직전 포르티시모의 소요를 가라앉히는 피아니시모가 아니라, 이전부터 자연스레 흐르고 있던 피아니시모를 연출해 낸다. 이윽고 폭풍이 지나간 후 돌아온 처음의 고요함은, 쓸쓸하고 처연한 안개 길을 걸어가듯 재현된다.

1악장과 4악장에서 베토벤의 월광 같은 구조가 보인다. 셋잇단으로 움직이는 왼손 위에 화음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색채. 가까운 거리에 살았음에도 너무 동경한 나머지 찾아가지 못했던 베토벤이 1827년 세상을 떠났다. D.959는 그 다음 해, 슈베르트 역시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시기에 쓰였다.

마지막 재현부에서 슈베르트는 쉼(pause)을 등장시킨다. 평생 노래하던 작곡가이기에, 이러한 갑작스러운 쉼을 쓰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것은 생이 잦아드는 찰나의 숨과 같다. 백건우는 흐르다가 멈추길 반복하는 이 선율들을, 정적의 불안에 잠식되지 않은 채 쉼을 쉼으로 온전히 두며 ‘무위’를 실천한다. 이윽고 교향곡과 같은 입체감으로 장대한 마무리를 향해 나아간다. 불필요한 의지를 거두어낸 휴지 속에서 이 곡은 완성된다.

마지막의 ‘쉼’에서, 슈베르트는 어쩌면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끝내 도달하지 못할 노년을. 그리고 상상했을 것이다. 오래 살아보는 것, 많은 것을 잃어가는 것, 그럼에도 끝까지 음악과 동행하는 삶을. 그 상상의 영역을 몸소 살아낸, 팔순의 거장이 이 곡을 완성했다. 병약한 청년 슈베르트와 지금의 백건우 사이에는 200년의 간극이 가로놓여 있지만, 적어도 이 음악 안에서만큼은 그 시차조차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슈베르트는 왜, 병상에서조차 펜을 놓지 않았을까. 이미 수백 개의 레퍼토리를 보유한 백건우는 왜 또다시 새로운 녹음을 시작했을까. 독일어에 ‘Vergänglichkeit’라는 단어가 있다. 덧없음. 작품을 남기려는 예술가의 의지는, 지금 이 순간이 이미 사라지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화성적, 대위적 구조를 직조하려 애쓰기보다 그저 신이 부여한 영감의 샘에서 길어 올린 슈베르트의 선율은 흘러가는 시간 그 자체를 닮았다. 이러한 덧없음을 아직 모르는 D.664의 청년은 즐겁고, 이윽고 병이라는 형태로 그것을 마주한 D.784의 청년은 절망하며, 마침내 D.894에 이르러 이를 수용한다. 그리고 덧없음 자체가 음악이 된 D.959에 이르러, 백건우는 ‘애써 하지 않는다’라는 깨달음으로 음악이 흘러가도록 두며 연주한다.

이 덧없음은 비극이 아니다. 외려 그 덧없음으로 인해 이토록 아름다운 선율이 쓰이고 연주될 수 있었다. 슈베르트의 음악이 영원한 것은, 그가 서른한 살에 요절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음악이 이미 ‘Vergänglichkeit’를 알고 있었기에 시간을 초월할 수 있었다.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가 여든의 나이에 이 음악을 다시 꺼내 든 이유도 마찬가지일 테다. 언젠가 연주할 수 없는 날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건반 앞에 앉는 것, 그 행위 자체가 이미 덧없음을 포용한 결과다. 슈베르트가 예감으로 쓴 노년의 곡을, 백건우는 생(生)으로 살아낸 뒤 연주했다.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