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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 Sakamoto Ryuichi의 <Opus>

by 이예진 | 

cover image of Sakamoto Ryuichi <Opus>
Sakamoto Ryuichi <Opus>COMMMONS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생전 사카모토 류이치가 좋아했던 문구다. 거장의 마지막 연주를 담은 영화의 OST인 이 앨범은 클래식에서 작곡가에게 유의미한 작품을 뜻하는 ‘Opus’를 표제로 삼는다. 뮤지션의 작품 중 후대에 남길만한 곡을 ‘오퍼스 넘버 카운팅’ 하듯, 생전 거장이 고른 마지막 셋리스트는 한 인간의 유한한 생(生)과 달리 영원히 남을 그의 유의미한 예술 작품이자 마지막으로 그가 후대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이다.

연주실황인만큼 사카모토 류이치의 페달 밟는 소리와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담겼다. 모든 트랙에서 그의 숨결을 들을 수 있는 이 앨범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게임 음악 ‘Lack of Love’로 운을 뗀다. 생명체가 지구상에서 유기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배려, 그 근원인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원작 게임의 메시지처럼, 그는 사랑의 결핍을 주제로 한 이 곡을 첫 순서로 연주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거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다. 가슴 시린 사단조의 선율로 주제의식을 부각하며, 마이너의 향연 속 메이저 코드와 전조 진행이 마치 구름 사이로 은은하게 빛났다 사라지는 달처럼 명암의 대비를 만든다.

Lack of Love (<Opus>, Ryuichi Sakamoto)

사카모토 류이치는 생전 절친한 동료 둘을 같은 해에 떠나보냈다. 그 때 쓴 추모곡이 <Opus>에 담긴‘BB’와 ‘for Johann’이다. 두 곡 모두 오케스트라를 축약한 형태의 악보인 리덕션(reduction)처럼 절제된 움직임을 보인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를 추모하며 작곡한 ‘BB’는 곡의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과거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Rain’을 사용하며 오스카상을 휩쓸었던 두 사람의 화양연화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컨택트>의 음악 감독으로 알려진 요한 요한슨은 <async>(2017)를 함께 만들정도로 각별한 동료였으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같은 해인 2018년에 세상을 떠난다. 이 때의 비통한 마음을 ‘for Johann’에 담아 연주한다.

분위기를 바꾸는 곡은 ‘Tong Poo’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이십대 후반인 1979년 Yellow Magic Orchestra로 발표한 대표 신스팝 곡이다. 빠른 템포에 밝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YMO 원곡과 <BTTB>(1998)에 수록된 버전에 비해 생동감을 지운 해석으로, <BTTB> 버전에서 스트라빈스키 ‘Petrushka’ 피아노 버전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코드 터치의 속주 편곡과 멜로디의 화음 라인, 폴리리듬으로 치닫는 반주 구성을 배제한 채 1분이나 긴 러닝타임의 다운 템포로 연주한다. <Yellow Magic Orchestra>(1979), <BTTB>(1998), <Opus>(2023)의 ‘Tong Poo’를 순서대로 들어보면 한 사람의 생의 시계를 보듯 거장 뮤지션의 세월에 따른 영혼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화룡점정은 단연 ‘Merry Christmas Mr. Lawrence’이다. 18개의 트랙을 달려 마침내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오는 순간, 마지막 연주 또한 끝나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 OST인 이 곡이 그의 손끝에서 태어나 40년간 살아 숨 쉬는 동안, YMO를 떠난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 인생 또한 함께 생동했다. 8분의 12박자로 여섯 음이 하나의 리프처럼 반복하며 한겨울 쌓이는 눈의 모양처럼 미세하게 변화해 나가는 선율이 흘러나올 때, 나는 그가 <Opus>에서 얼마나 이 한음 한음을 소중하게 여기고 꼭꼭 씹어 연주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라이브 앨범 <Playing the piano>(2009)에 수록된 버전에서는 같은 여섯 음을 세 개씩 하나의 덩어리처럼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를 반복하며 연주한다면, 2012년 현악 3중주 앨범 <Three>(2012)에서는 여섯 음을 동등한 크기의 중력을 받듯 연주하여 이어지는 현악기의 움직임을 상대적으로 더 돋보이게 한다. <Opus>에서의 해석은 후자에 더 가깝다. 이윽고 2분의 2박자로 탈바꿈하며 동양의 서정적인 선율이 시작되는 B 파트로 넘어가기 전, 마치 영화의 장면이 전환되듯 데크레셴도 되었다가 주제를 등장시키는 부분은 궁극의 표현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 Sakamoto Ryuichi의 <Opus> image28분의 12박자로 하나의 리프처럼 미세하게 변화해 나가는 여섯음 단위의 선율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 Sakamoto Ryuichi의 <Opus> image32분의 2박자로 탈바꿈하며 동양의 서정적인 선율이 흘러나오는 B 파트

Merry Christmas Mr. Lawrence (From Ryuichi Sakamoto: Playing the Piano 2022)

마지막 트랙은 영화 제목과 동일한 ‘Opus’다. 3박자 계열의 왈츠인 이 곡은 사카모토 류이치 특유의 곡선으로 유려하게 흘러가는 멜로디로, 어린 날에 자신이 드뷔시의 환생이라고 믿었다는 일화가 떠오를 정도로 드뷔시 작풍을 따라 마무리되며 공중에서 흩어진다. 이 장면에서 거장은 사라지고 텅 빈 피아노만 남는다.‘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로의 회귀. 나라는 존재가 소멸한 이후에도,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며, 만약 그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려는 마음이 예술가의 본질이라면, 사카모토 류이치는 그 본질을 몸소 실천하며 생의 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더없는 겸손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집대성했다. 바로 <Opus>로.

Rest in Peace,Sakamoto Ryuichi1952.1.17~2023.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