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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의 식지 않는 매직 아워, 레드벨벳 <Velvet Summer>

by 정기엽|

cover image of Red Velvet <Velvet Summer>
Red Velvet <Velvet Summer>SM Entertainment

레드벨벳은 여름에 지나치게 묶여 왔다고 생각한다. 스산한 겨울 스릴러 ‘Psycho’, 기품 있는 봄의 정원 ‘Feel My Rhythm’ 등 귀를 사로잡은 음악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계를 능통하게 오가는 그룹에게 뚜렷한 상징은 전파를 방해하는 요소다. ‘Ice Cream Cake’, ‘Bad Boy’ 등 ‘빨간 맛’이 ‘Power Up’하게 두기엔 레드벨벳이 쌓은 스펙트럼은 넓고 깊다고 생각했다. 소유할 수 있는 토지가 너무나 넓으니 생기는 아쉬운 탄식이 있었다. 그러나 <Velvet Summer>를 듣고는 숨을 도로 집어넣었다.

데뷔 12년된 마당에 새삼스러운 특징이지만 이 그룹에는 강렬한 콘셉트의 레드와 부드러운 느낌의 벨벳으로 나뉜 노선이 있다. 많은 걸그룹이 그렇듯이 시원한 분위기를 에워싸야 하는 서머송의 특징상 기존 여름 EP는 레드에 가까운 색채였다. 하지만 본작은 제목부터 벨벳이고, 시작점부터 명확히 새 타겟을 조준한 덕에 색다른 바람을 불어넣었다. 동일한 계보의 전작들이 태양을 직면했다면 <Velvet Summer>는 선글라스를 쓰고 해를 만끽하는 일렁임이다.

K팝에서 컨템포러리 재즈의 인상이 스친다. 드문 일이다. 도입부터 보사노바를 담고, 레게 리듬을 적신 ‘Surfin’ Boy’와 <티파니에서 아침을>, <톰과 제리> 등의 스코어를 작곡한 영화 음악 작곡가 헨리 맨시니의 ‘Lujon’을 샘플링한 ‘Orchestra’가 특히 그렇다. 타악기인 루존을 모티브로 만든 곡에서 루존의 소리를 과감히 생략하고 기품만 남겼다. 마침 헨리 맨시니가 재즈에 능통한 작곡가였다는 점은 우연일까. 해당 장르의 인상을 증폭시키는 재료는 레드벨벳의 보컬이다. 여러 악기와 알맞게 어우러진 톤과 유려한 가창으로 협연한다. 목소리에 혼이 서려 있다. 혼(魂)이 아니라 Horn.

고조와 저하의 낙폭을 능숙하게 제어하는 보컬이 살린 곡이 타이틀인 ‘Surfin’ Boy’다. 슬기가 포문을 연 후 여리지만 힘을 꼭 쥔 아이린과 외려 힘을 풀며 여유를 택한 웬디가 교차하는 도입, 조이와 예리의 짧은 랩과 모두의 목소리가 합세한 후렴까지 지루할 틈이 없다. 그간 솔로로도 활발히 활동한 웬디와 슬기의 조화가 돋보이는 브릿지 파트도 뛰어나다. 코러스가 가득한 구간임에도 노래 소리가 중심을 잃지 않고 강세를 둔다. 조이가 리드하는 후렴으로 이어지는데, 청자는 그저 음압의 롤러코스터를 즐기면 그만이다.

노래를 잘 소화하는 팀임을 또 증명한 케이스 ‘Hot Girls Cool Vibe’도 주목해 볼 법하다. 다양한 바리에이션의 베이스가 확보한 저음 위에 올라타 속도감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관악기, 키보드, 기타 등 연달아 포인트로 등장하는데, 각각에 알맞은 배합의 가창이 자리를 채운다. 1대 1로 합을 맞추는 춤의 파트너가 바뀔 때마다 능숙한 손짓으로 이끄는 것처럼.

뛰어난 연주 앨범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몸담은 공간이 뒤바뀌는 착각이 든다. 이 앨범을 들을 때도 7, 8월 오후 7, 8시의 모래사장이 짧게 아른거렸다. 음반을 열고 닫는 바다 소리도 그렇고, 중간에 삽입되는 배기음, “Hula” 라는 발음으로 묶인 후반부 ‘Hula Hoop’, ‘Hawaii’의 존재가 각기 다른 싱글의 배치라기보다 음반 한 장의 밀도를 자아낸다. 평화롭게 살랑이는 바람과 사람들의 움직임을 느끼며 잠드는 환상. <The Red Summer>와 <Summer Magic>은 표현하지 못한 혹서기 저녁의 기분 좋은 따뜻함이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