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첨단의 대중예술은 대중을 등진다. “시대를 앞서 나간”이라는 상투적 수식은 선구적 예술이 대중예술적 소재를 활용할 때 쓰는 누명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비요크의 경우는 확실히 그렇다. 비요크는 시점에 상관없이 절대다수에게 자신의 음악을 설득하려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비요크는 다른 아티스트들이 땅 위를 걸을 때 우주를 유영한다. 그런 그가 현대미술의 집약지인 퐁피두 센터에 입성하는 일은 전혀 놀라울 것이 없었다.
프랑스의 편집인이자 사진작가 알레프와 협업한 ‘Nature Manifesto’는 퐁피두 센터의 상징인 “애벌레” 에스컬레이터에 설치되었다. 작품은 여러 개의 스피커를 통해 여러 층을 연결하는 에스컬레이터 곳곳에 각기 다른 소리들로 재생되었다. 생물 다양성 포럼의 일환으로 알려진 만큼 비요크가 기존부터 강하게 의견을 피력해온 환경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다. 지난 12월 9일까지 퐁피두 센터에서 감상 가능했던 ‘Nature Manifesto’는 이미 온라인을 통해 일부 감상할 수 있으며 영상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비요크는 프로젝트를 행동으로도 옮기기 위해 젊은 생태학자들과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알렸다.
환경이 세계적인 이슈로 거듭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기에, 이를 논하는 예술품은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그러나 비요크의 시선은 우리가 환경을 다루는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을 아득히 상회한다. 보통 환경 문제에서 예술가들이 지적하는 부분은 ‘종말’이다. 환경의 악화로 인한 이상기후나 천재지변이 인류의 종말을 가져온다는 우려. 그렇기에 대부분의 작품은 종말을 위기로 삼고 그것을 극복하거나 극복하지 못함을 결말로 삼는다. 그런데 ‘Nature Manifesto’의 첫 가사는 이와 같다. “이것은 비상상황입니다. 종말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비요크는 다른 사람이라면 끝을 맺을 시점에서 오히려 시작한다. 그리고 말한다. “지금부터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종말은 이미 일어났지만 인류는 완전히 절멸하지 않은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비요크는 환경 문제에 앞장섬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멸종을 믿지 않는다. 음악은 종말에 대한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으로 나아간다.
“대멸종 이후 우린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방사능 작물 속에서 돌연변이 귀뚜라미와 퍼레이드할 것입니다.” “조립체의 등장과 함께하는 새로운 세계.” “생물학은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될 것이고” “팬데믹 이후 새로운 존재 방식이 생길 것”이며 “행성을 테라포밍할 것입니다.” 사실상 종말을 긍정하는 발언들. 기괴한 수준의 낙관적 태도는 환경 문제에 대한 어떠한 경각심도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Nature Manifesto’의 세계는 듣는 이에게 기괴함을 넘어선 공포감을 초래한다. 단순히 이해하기 힘들고 낯선 미래의 광경 때문이 아니다. 유난히 선언처럼 읽히는 한 줄의 노랫말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다. “삶은 승리한다. 우리와 함께 하건, 함께하지 않건.”
비요크가 존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생명이다. 비요크는 그것이 인류가 함께하는 세상이건, 그렇지 않건 생명이 존재하는 세상을 지지한다. 그렇다면 비요크가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인류의 미래’가 아닌 비로소 ‘환경’이 된다. 지금껏 환경을 다룬 작품들은 인류의 멸종 정도를 운운하며 오만한 인식 체계를 지녀왔던 셈이다. 그래서 그는 미래 세계에서조차 “새로운 파리 협정”을 만들고자 한다. 비요크는 시점에 상관없이 생물 다양성을 인류의 존속 문제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닥쳐오는 종말과 미래를 거부할 의사가 없다.
고차원적인 이념만이 전위를 낳는다. 비요크는 유별난 관점을 통해 환경이라는 주제와 미래주의를 결합해낸다. 구간마다 설치된 여러 개의 스피커는 미래주의 회화인 자코모 발라의 <줄을 단 개의 역동성>을 연상케 하고, 위로 솟구쳐 오르는 에스컬레이터의 운동성은 진화의 양태를 연상케 한다. (물론 이는 진화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보다 고정관념을 형상화한 것에 가깝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고조되는 음향과 IRCAM의 지원과 AI를 활용한 제작 방식 역시 미래지향적이며, SF적 생물체를 영상화하는 아티스트 balfua가 ‘Nature Manifesto’를 배경으로 만든 AI 영상 속 크리처의 유기적 변형도 마찬가지다. 비요크의 코스튬과도 겹쳐 보이는 이 크리처는 그가 생명체의 어떤 측면을 애정하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귀여운 외면보다는 생동하는 동물 본연의 성질.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정서보다 중요한 것을 믿는 그의 음악과도 합치하는 대목이다.
“산업 시대를 대표하는 건물에서 그들의 존재를 공유하고 싶었다.” 비요크가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이 말에서 ‘건물’은 퐁피두 센터를, ‘그들’은 음악 속에 깃든 동물들의 울음소리를 뜻한다. 그 속엔 물론 비요크의 목소리도 있음에도 동물의 울음소리를 무엇보다 강조한다. 그것은 멸종되었거나 멸종 위기인 동물들의 울음소리다. 우리의 오만함이 삭제시킨 영혼의 아우성. 그것을 지킨다거나 보호한다는 말조차 적당하지 않다. 우리에겐 그것을 훼손할 힘이 주어진 적 없다. 그렇다면 외려 우리의 오만함이 사라진 비상 상황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이고 “내가 있고 싶은 곳”이다. (Björk, ‘Jóga’ 중) 이상 세계는 인간을 요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