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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브릿지 ③ 다프트 펑크, 모로더, AI

by 이예진|

사운드 브릿지 ③ 다프트 펑크, 모로더, AI main image© 조르조 모로더(Giorgio Moroder)

AI가 만든 음악이 차트에 오르고,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가수가 스트리밍 수백만을 기록하는 시대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이 차에 탄 채로 어디로 가는지를 묻기보다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먼저 되짚고 싶어졌다. 그러던 와중 다프트 펑크(Daft Punk)의 <Discovery>가 떠올랐다. 2001년 3월 12일. 어제로 딱 25주년이다.

‘One More Time’부터 차례로 들으며 앨범을 넘기다 문득 <Random Access Memories>의 트랙 리스트를 펼쳤다. 세 번째 트랙, 앨범에서 유일하게 사람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Giorgio by Moroder’에 눈길이 닿았다. 전자 음악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앨범에서, 왜 이들은 이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달았을까. 그 질문에 답하다 보면, 지금 우리가 AI 음악 앞에서 던지는 질문들이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나 새롭지 않다는 것이 곧 같다는 뜻은 아니다.

조르조라는 기원

얼마 전 디깅을 하다 만난 도나 썸머(Donna Summer)의 프로듀서가 바로 조르조 모로더(Giorgio Moroder)다. 그녀의 1집부터 8집까지 제작하며 1970년대 디스코 붐을 이끌었다. 한국 독자에게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의 작곡가라고 하면 단번에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그 멜로디를 쓴 사람이 바로 모로더다. 톰 휘틀락(Tom Whitlock)과 함께였다. 다프트 펑크는 <Random access Memories>에서 그의 이름을 제목으로, 그리고 그의 육성 인터뷰를 트랙 전체의 뼈대로 삼았다. 'Giorgio by Moroder'라는 제목은 곧 '모로더에 의한 조르조‘라는 헌정이다.

그 헌정의 이유는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나 썸머의 앨범 <I Remember Yesterday>는 시대별로 여덟 트랙에 걸쳐 음악의 역사를 담도록 기획됐다. ‘I Feel Love'는 그 마지막 트랙, 가장 미래 지향적인 소리를 담은 자리였다. 결과는 전자 댄스 음악의 이정표였다. 다프트 펑크가 미래를 논하는 앨범에 모로더의 이름을 새긴 것은, 전자 음악이 처음 대중 앞에 섰던 그 자리를 다시 짚고 싶었다는 해석으로 읽을 수 있다.

도구와 연주자

어떻게 그 소리를 만들었는가. 1964년 전기공학자 로버트 무그(Robert Moog)가 상용화한 무그 신시사이저는 당시 한 번에 한 음씩만 출력할 수 있었다. 조르조는 이 제약 안에서 C, C, G, B♭을 하나씩 따로 녹음해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반복 패턴을 만들었다. 이렇게 완성된 네 음의 루프는 곡 전반에 걸쳐 이따금 음정을 바꿔가며 8비트 단위로 반복된다. 밴드도 오케스트라도 없이 신시사이저 루프만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 초기 사례였다. 이 트랙에서 사용된 클릭 비트는 이후 전자 음악 제작의 표준이 됐다. 다프트 펑크는 이 지점에 경의를 표하며, ‘Giorgio by Moroder’ 트랙의 엔딩을 그 클릭 비트 소리만 남기는 것으로 장식했다.

사운드 브릿지 ③ 다프트 펑크, 모로더, AI image21964년에 나온 최초의 무그 신시사이저 시리즈. © Wikipedia

이 시대의 도구와 연주자 관계는 명확했다. 웬디 카를로스(Wendy Carlos)가 <Switched-on Bach>(1968)에서 바흐를 무그로 연주했을 때도, 조르조가 도나 썸머의 보컬을 신시사이저 위에 얹었을 때도, 도구는 도구였고 연주자는 연주자였다. 소리도, 보컬도 달라졌다. ‘Hot Stuff’에서처럼 보컬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두성으로 발성을 바꿔 리버브를 깊게 건 부드러운 목소리를 신시사이저 패턴 위에 얇게 얹었다. 프레이즈도 짧고 분절적이다. 당시 일각에서는 ‘보컬이 악기에 묻힌다’라며 비판했고, 신시사이저 등장으로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기계음이 인간의 감각 안으로 스며드는 것은 삽시간이었다.

반발과 수용, 그리고 AI

1998년 셰어(Cher)가 ‘Believe’로 오토튠을 보컬 이펙트로 처음 전면화했을 때도, 다프트 펑크가 그것을 ‘One More Time’(2001)으로 이어받았을 때도 반발은 있었다. ‘사람이 노래한 것이 아니지 않냐’라는 의문은 매번 제기됐지만 유행으로 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반발 후 수용’의 패턴은 AI 음악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유추에는 한계가 있다. 세 전환을 같은 선 위에 놓기 전에, 각각이 얼마나 이질적인지를 먼저 짚어야 한다. 무그는 제작자의 의도를 구현하는 도구였다. 오토튠은 퍼포먼스의 미학을 바꿨지만, 여전히 인간의 목소리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AI는 다르다. 의도를 구현한다기보다 의도처럼 보이는 것을 스스로 생성한다. 프롬프트를 입력한 인간의 의도와 모델이 확률적으로 출력하는 결과물 사이의 경계가 어디인지, 지금 우리는 아직 명확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수용의 역사가 반복된다 해도, 그것이 같은 의미의 수용인지는 별개의 질문이다.

자니아 모네, 그리고 인간의 자리

AI 음악 생성 서비스 수노(Suno)로 제작된 가상의 R&B 보컬리스트 자니아 모네(Xania Monet)는 이 변화의 최전선에 있다. 그의 싱글 ‘How Was I Supposed to Know?’는 빌보드 ‘R&B 디지털 송 세일즈’ 차트 1위에 오른 첫 AI 기반 싱글 가운데 하나로 기록됐다. 배경을 모른 채 들으면 사람이 부른 곡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를 ‘AI가 만든 음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절반만 맞다. 시인 텔리샤 존스(Telisha Jones)가 가사를 쓰고 프롬프트를 설계한 뒤, 생성된 음원을 선별하고 편집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AI의 자율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기보다, 인간 기획자의 선별 감각이 결정적으로 개입한 경우에 가깝다. 텔리샤 존스의 역할이 없었다면 이 곡이 차트에 올랐을지는 알 수 없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여기서 나온다. 알고리즘이 인간의 개입 없이 홀로 완성하는 음악, 즉 자율 생성 AI 음악이 차트에 오르는 날이 온다면 어떤가. 자니아 모네 프로젝트는 그 경계를 아직 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경계가 좁혀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곡 자체를 들어보자. 화성 진행은 E♭m-G♭-D♭-C♭, 즉 E♭단조 기준 i-III-VII-VI 구조다. 도미넌트의 긴장감 없이 자연단음계 안에서만 순환하는 이 진행은, 나란한 조인 G♭장조의 안정감을 공유하며 어둡지만 저항이 적은 감정 곡선을 만든다. 2000년대 R&B 히트곡에서 반복적으로 쓰여온 ‘마이너-안정형’ 공식이다. 멜로디는 크게 도약하지 않고 3도, 4도 범위 안에서 계단식으로 움직이며, 보컬의 비브라토는 일정한 폭을 유지하고 프레이즈 끝의 호흡도 규칙적으로 삽입된다. AI의 흔적을 듣는다면 그것은 음색의 균질함에 더 가깝다. 고음역에서도 미세하게 흔들리지 않고 감정적 압력에 따라 음색이 달라지는 일이 없다.

이 곡은 이미 성공한 곡들의 검증된 패턴을 정교하게 조합한 결과물이다. 물론 인간 작곡가도 이런 진행을 쓴다. 차이는 이 선택이 어떤 감각에서 나왔느냐에 있다. 인간이 같은 진행을 쓸 때는 의식적 선택이든 무의식적 내면화든 어떤 경험의 침전물이 작용한다. AI의 경우 그 자리에 있는 것은 통계적 최적화다. 결과가 같아도 그 과정의 성격은 다르다. 도구만의 문제는 아닌 이유다.

크레딧과 책임의 소재

무그 신시사이저와 오토튠은 도구였고 그 도구를 손에 쥔 연주자와 제작자가 있었다. AI는 그 연결 고리 자체를 흐린다. 프롬프트를 입력한 개인인지, 모델을 개발한 기업인지, 학습 데이터의 원저작자인지 아무도 정해두지 않았다. 결과물은 하나이지만 책임은 분산된다. 자니아 모네 프로젝트처럼 인간의 창작 개입이 분명한 경우조차 ‘저작자’가 누구인지는 현행 저작권 체계로 명확히 답할 수 없다.

무그가 연주 방식을 바꿨을 때 저작권 형식은 그대로였다. AI는 그 시스템 자체의 재설계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재설계의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실질적인 규칙은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 플랫폼이 정한 약관, 스트리밍 서비스의 수익 배분 방식, AI 기업의 라이선스 정책이 법과 제도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다. 제도의 공백이 클수록,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은 결국 플랫폼의 논리가 된다. 재설계가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지 묻는 것을 미루면, 답은 우리 손이 아닌 곳에서 내려진다.

스며드는 것과 해결되는 것은 다르다

‘Giorgio by Moroder’에서 조르조가 남긴 말이 다시 들린다. 올바른 음악이 뭔지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우리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고. 음악의 형식에 대한 집착은 내려놓아도 좋다. 신시사이저가 그랬듯 AI 음악도 결국 스며들 것이다. 다프트 펑크가 모로더에게 헌정을 바친 것은 과거를 기린 것뿐만 아니라, 기술과 음악의 경계가 다시 흔들리는 순간마다 그 기원을 되짚는 것이 필요하다는 감각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 감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용과 해결은 다르다. 무그가 스며들었을 때 저작권 체계는 흔들리지 않았다. AI는 다르다. 스며드는 속도와 제도가 재설계되는 속도 사이의 간극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질문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가 그 질문에 답할 책임을 지는지를 지금 묻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