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이 인간의 손아귀를 차츰 벗어난다. 프롬프트만으로 곡을 만드는 대표적 인공지능 음악 생성기 ‘Suno’는 입력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생성 가능한 곡의 스펙트럼이 좁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미 SNS 영상에서는 곧잘 활용되는 수준을 확보하고 있다. 기술, 서비스의 발전과 학습의 제약이 풀어지면 머지않아 인간의 것과 다르지 않은 솜씨를 선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AI 기술의 가속화를 따라다니며 세간에서 내내 논해온 존엄성이나 노동권 문제는 둘째치고 훌륭한 음악을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찾아오면 시장의 근본 규격이 무너질 가능성은 농후하다. 현재 ChatGPT에서 지브리풍 이미지 생성이 이루어지듯 단지 특정 지칭이나 언급만으로 유사한 음악을 생성하는 지경에 이르면 리스너는 취향을 위해 헤맬 필요가 없어진다. 디깅은 종말을 맞이하고 감상을 위한 창작만이 존재하며 좋은 곡을 생성하는 프롬프트 작성 노하우가 차트 순위보다 중요시될 것이다.
그간 작곡 시스템의 첨단화로 대중음악이 겪은 굴곡을 회상하면 그리 낯선 증상은 아니다. 어쩌면 이조차 과거 미디의 등장이 드럼 연주자를 전멸시키리라는 정도의 허무맹랑한 비관일지 모른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만큼 도래하기 어렵다.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늘 그렇듯 이 역시 가정법에 불과하다. 하지만 AI가 선사할 개혁이 미학뿐 아니라 구조적 변화를 동반하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될 가능성은 적지 않기에 포스트모더니즘부터 일었던 예술의 종말론이 다시 대두됨은 자연스럽다. 그것은 두려움에 의한 예비이자 의구심이나 기대이며, 상상이 주는 흥미로움에 더불어 현재가 미래의 비극과 얼마만큼 미리 맞물려 있는가를 확인할 대조이기도 하다.
생존 시나리오 1: 종합예술
대중음악은 탄생부터 고전음악에게 한차례 죽음이었다. 엘리트주의와 소리에 대한 순수성은 저물고 이미지, 스타, 머천다이즈가 자리를 꿰찼다. 외도를 동력으로 삼은 음악은 사지에서 치는 발버둥처럼 매체의 다원화를 자처하며 꿋꿋이 살아갔다. 이를 두고 용하다 해야 할지 추하다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달팽이관 언저리를 벗어나 전 예술의 융합체가 된 대중음악은 더 이상 유희만을 위한 도구는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거나 스포츠다. 우리가 음악을 두고 자주 사용하는 용어는 ‘감상’이나 ‘비평’이라기보다 ‘응원’이다. 공연장에 앉아 안락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듣는 관객은 형편 좋은 사람 취급을 받는다. 한 시도 놓칠 수 없는 우상의 강림에 아무리 시끄러워도 소리는 질러야 하고 아무리 천방지축이어도 발은 굴러야 한다.
청각의 죽음이 대중음악에게 구원일 수 있는 셈이다. 동질감이나 우상화라는 면에서 스타성은 소리보다 대체되기 어렵다. K POP이 퍼포먼스와 송라이팅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전조증상이다. 우리는 놀랍게도 다른 사람이 작곡한 여러 곡이라도 아이돌의 이름과 얼굴로 기억한다. 이런 구조가 특이점을 맞이하면 고전음악이나 순문학이 대중적 쇠퇴를 맞이했듯 스타시스템은 팝을 등질 수 있다. 음악으로 불리지 않는 어느 분야로 눈을 돌리거나, 여전히 음악이라 불리며 AI의 과격한 창작력에 기대거나. 그러나 그런 음악계를 선뜻 지지할 의사는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다.
생존 시나리오 2: 움직이는 음악
음악의 종합예술화가 시류에 가깝다면 그것을 거스르는 방식도 존재한다. 소리 외의 요소가 개입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창작의 주체성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고무적이다. 아무것도 들려주지 않거나, 악기를 부수거나, 악기가 아닌 것을 연주하는 식으로 행위예술에 근접한 음악은 대중음악사 초기부터 일찍이 실험되어왔다. (시기상 맞물렸을 뿐 대부분 음악계가 아닌 미술계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그들은 음악의 테두리를 끝없이 매만지며 본질을 되묻는다.
행위의 대체불가함은 스타성이 그랬듯 인간 존재에 기인한다. 인간의 행위가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기계의 행위를 통한 예술이 전시로 간주되는 것처럼 말이다. 일례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많은 피학적 예술은 시연자가 인간이라는 것에서 단순한 자기 전시를 넘어낸다. (장미, 가위, 총 등의 도구를 진열하고 그에게 어떤 짓을 벌여도 괜찮다는 메모와 함께 진행된 <Rhythm 0>은 한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가 얼마나 대담한 폭력으로 이어지는지 증명해냈다. 음악과 연관된 사례로는 백남준과 샬롯 무어만이 협업한 그 이름부터 ‘휴먼’ 첼로 연주가 있고, 대중음악에서는 손수 제작한 마블 머신을 연주하는 빈테르가탄이나 한 줄짜리 기타를 연주하는 브러쉬 원 스트링의 사례가 있다. 이들의 연주가 도구를 통하고 있음에도 행위의 음악이라 논한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를 제작하거나 연주해 내는 데에 따르는 인간적 어려움에 넓은 의미의 행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인간성을 그대로 체화한 행위의 음악은 창작 속 인간의 위치를 방부한다.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대체되지 않을 예술의 영역은 충분하지 못해도 존재할 수는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불완전함에 감사하기라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존 시나리오 3: 비명
지금까지의 시나리오는 어딘가 암울한 구석이 해소되지 않는다. 음악은 시각이나, 행위나, 다른 예술 혹은 상업 특성 등에 기대어 기생하는 수밖에 없으며, 순수하게 음악만으로 시국을 타개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이니 그렇다. 그런 감상은 대중음악에 대해 많은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첫째로 대중음악은 지금도 그랬고 과거에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순수한 청각 예술이 아니다. 대중음악은 이미지와 함께 (특히나 TV 문화와) 성장했으며 그때 고전음악은 일찍이 청각적 탐구를 넘어서 해체를 도모했다. 순수음악적 지향의 고전음악에 대해 대중음악은 사실상 반음악적 형태로 등장해서 새로운 문화를 형성했다. 대중음악은 지식인의 것이라기보다 만인의 것으로 나왔다.
둘째로 이러한 경향은 음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모더니즘 이후 대대적 사회 현상으로 뻗어나갔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중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분야 간 융합은 수월해졌다. 그러니 대중음악의 미래가 음악성을 상실하는 것은 마냥 슬퍼할 일이 아닌 본질이자 미리 예견된 일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음악성보다 굳건하게 대중음악의 기틀을 잡은 것은 사회적 요소다. 줄곧 대중음악은 반문화성과 정치적 저항, 스타를 통한 개인과 공동체의 사회적 대변 등으로 지탱되었다. 우리는 가장 단순하고 직설적이던 (소위 고급스럽지 않은) 펑크의 전투적 태도를 기억한다. 그것은 듣기 좋은 음악이라기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당하는 억압에 대한 분풀이 혹은 비명이었다.
때문에 2번에서 상술한 행위 음악과 비슷한 맥락으로 인간의 음악이란 기술 문명이 지배적인 시류에 저항하는 일군의 장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 노동의 자동화를 마땅히 거슬러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인간이 아날로그적 방법으로 이룩한 음악은 자체가 저항이다. 물론 AI 음악이 보편화되었다고 했을 때 이들의 음악이 수면 위로 올라서기는 쉽지 않다. 아티스트의 이름과 송라이팅의 가치가 대응하던 시기를 등진 현대의 언더그라운드/컬트 계열의 작품처럼 완전 자동화된 음악 시장에서 인간의 작곡은 약소한 지지만을 얻을 것이다.
여담: 프로그래머는 예술가인가?
게임 매체가 놀라운 속도로 미학의 주요 담론에 편입함에 따라 프로그래밍이 예술 창작 행위라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개발자라고 부를뿐더러 게임을 제외한 일반 프로그램 제작에게는 전혀 미적 잣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큰 문제는 되지 않는 것이 애초에 일반 프로그램의 제작 의도가 아름다움에 있지 않기에 아무도 반발하지 않는다. 다만 AI 음악 생성기의 보편화가 이루어질 때 해당 프로그램 제작자의 지위는 어떤 식으로 형성될까?
단순화해서 생각하면 만들어진 매체를 통해 감상자가 미적 경험을 한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곳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중개자가 있는 셈이다. 그것은 사람도 동물도 아니고 무엇보다 제작자가 면밀히 알고 있지도 못하는 정보를 토대로 행동한다. 결국 소비자가 취하는 것은 제작자가 만들어 낸 무언가를 통한 무언가지, 제작자가 제작한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는 음악을 듣지 AI를 듣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를 잭슨 폴록의 그림처럼 우연성에 의한 예술 정도로 일축할 수 없는 것이다. 잭슨 폴록은 물감을 뿌려서 그림을 완성한다지만, AI 프로그래머의 행태는 물감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물감이 적신 붓을 만든 이의 입장에 있으면서, 그 붓이 알아서 그림을 완성하게끔 독려하는 꼴이다. 확실히 당혹스러운 면이 있다. 우리는 AI 프로그래머를 절대 음악의 창작 주체로 간주할 수는 없고 그것을 매개하는 프로그램의 제작자로만 파악할 수 있으나 결국 그가 없으면 음악을 듣지 못한다. 그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음반 제작사이자 유통 업체이며 스트리밍 서비스인 동시에 큐레이터다.
이는 현재 음악이 구축한 시스템의 단일화된 집약체다. 그들은 이미 순수한 자아실현의 창구라는 역할은 어느 정도 상실했다. 철저히 공동체에 의해 구축되는 팝의 산업 구조는 AI 음악의 산업 구조로 전이되기 쉬워 보인다. 하지만 완전한 체계의 변화가 도모되는 과정에서 가치론은 다시 떠오를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프로그래머를 예술가라고 부를 것인가? 영향을 교류할 다른 아티스트나 미적 탐구 등을 염두에 두지 않는 만큼 프로그래머가 현대의 음악가가 누리는 인기와 같이 신성시될 일은 희박할 것이다. 그가 음악 산업에서 가진 권위는 막강할 것임에도 음악 청취에 대한 문턱은 또 한 번 낮아질 것이다. 창작조차 월정액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에서 저작권이 가진 위엄도 거리에 나앉을 것이다. 그런데 음악에 대한 감동을 누군가의 공으로 치환하길 즐기던 우리가 그것을 선뜻 없던 일로 할 수 있을까? 그런 음악이 소비력을 갖추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 공은 프로그래머와 기계보다 나을 것 없는 인간 중 누구의 몫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러니 이처럼 길게 늘어놓은 예상들의 본론은 새로울 게 없다. 팝스타의 박탈감마저 느껴지는 위대함과 기계가 선사하는 질식할 것 같은 평등,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없는 굴레의 반복. 지옥과 같은 이 무한한 연옥에서 심판의 날이 자꾸만 가까워지는 감각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