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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취향 이후

by 권도엽|

(만들어진) 취향 이후 main image프랜시스 베이컨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Base of Crucifixion>

아름다움을 실증할 수 없으리라는 맹신과 함께 미학은 사변의 마지막 보루로 남았다. 기성 가치의 탈피를 추구한 근현대 예술조차 절대 가치가 잔존해야 한다는 관성적 믿음은 타파하지 못했다. 그러나 금세기 가장 실용적인 동시에 가장 순수한 학문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과학은 충분히 이를 잠식할 수 있다. 진화심리학 아래 미적 경험은 이데아나 물자체를 포함한 어떠한 형이상학적/절대적 가치론의 척도를 상정하지 않아 사회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고, 포스트-휴머니즘의 출현 이후 가치론은 인간의 축을 탈피할 것을 도모한다. 퀑탱 메이야수가 서술한 바, “오늘날 우리가 기꺼이 ‘절대자들의 종언’이라고 명명하는 무엇은 절대자의 타당성을 폐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절대자들을 인정하는 놀라운 허가로 이루어진다.” 이 대목은 예술 감상에서 대중이 취향을 존중할 것을 읍소하는 형국을 연상시킨다. 중세 미술의 종교화에나 존재했던 절대자의 함락 후 결승선이 부재한 달리기는 사방으로 펼쳐졌고 가치는 신념의 영역으로 전이했다. 음악에 대한 분석적 노력은 차트 순위에 지배적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종교로서의 예술성은 존재하지 않는 당위를 향해 맹목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눈앞에 닥친 이 음악을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문제다. 그렇기에 팝은 동어반복을 허락한다. 1960년대를 통과하지 않은 세대에게 페퍼 상사는 아직도 급진적이다. 이것이 마찬가지로 가치론에 해당하는 윤리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은 도발적으로 들린다. 척도나 밈으로 대결하는 예수와 알라와 과학에 대한 신봉은 합의에 개의치 않으며, 이교도를 배척하기 위한 질서와 사회적 동물의 적자생존 비법을 강조하며 유일 진리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 이 혼돈에서 세계는 다만 존재할 뿐 어떠한 목적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한낱 미물로서 이 질문의 덜미를 놓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권리는 실재하지 않지만 구성되어야만 하는 관념이다. 정말이지 살인 따위가 합법인 나라라면 누구도 살고 싶지 않은 법이니 말이다.

예술을 파악하는 방법론으로 취향과 견해는 어느 선까지는 대립한다. 특정 입장, 주의, 사조, 운동, 철학에 관련 지어질 견해는 하나의 인위적 척도라는 허점에서 금방 무너지고, 취향은 (사변적 실재론에서 수학이 점한 위치처럼) 절대로 군림한다. 취향 앞에 모든 가치가 무의미하고 우발적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취향은 곧 우연성만을 필연으로 만드는 무적의 역설이다. 합리성에 의한 견해조차 취향의 한 축 (그러나 다른 어떤 축이 그러하듯 척도로 성립하지는 못하는)으로 소화된다. 그러나 한 시대의 민주적 취향은 문화적 양상으로 짚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선험적이지는 않다. 이것은 사변적 실재론이 세계의 근원적 탐구인 반면 밈학은 이미 주어진 세계에 대한 경험적 구성이라는 차이를 일러준다. 그러니 현실의 문화에 대한 상관론으로 돌아와, 취향은 우리의 자아 정체성의 일부로, 꼭 그것이 형성되는 과정과 같이 선천성과 후천성을 고루 지나온다는 걸 상기할 수 있다. 취향은 절대적인 동시에 규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절대이며, 다시 한번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의심스러운 절대다.

밀란 쿤데라는 “모든 문화와 문화 활동을 동등하게 취급한다면, 예술 비평이 더는 의사 표현의 장을 찾지 못한다면, ‘예술의 역사적 진화’는 그 의미가 흐려져 붕괴할 것이요, 부조리한 하나의 거대한 작품 창고 같은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작금에는 예술도 비평도 부조리한 창고의 내용물을 담당하고 있는 꼴이지만 “모든 문화와 문화 활동”이 동등하게 취급되고 있지는 않다. 밀란 쿤데라의 촌철살인이 너그러워 보일 정도로 시대는 과격하여, 동등이라는 지점까지 갈 것도 없이 선행 조건이 될 가치론의 폐기만으로 같은 결론을 낳았다. 그러나 조건이 만족된 후에도 어째서 문화의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느냐 물으면 가치론이 폐기된 후에도 가치론을 탐닉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상관론적 집착과, 동물적 본능에 의해 반드시 이로운 것과 이롭지 않은 것을 타고나는 탓이라 할 것이다. — 예술에서 느껴지는 희열이란 순수 이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반사적인 경우가 잦다. 숭고와 카타르시스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공감 능력에 기원을 둔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생물학적으로 접근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되게끔 도달한 결론일 따름이며 인류의 특정 형질이 자연적으로 더 많이 선택된 결과다. 즉, 대개 미적 감각의 근원은 실용성에 있으며, 우리가 예술을 판명하는 굳건한 기준이 되는 감각이란 다소 충동적이다. — 때문에 더 많이 팔린 음악이 항상 덜 팔린 음악보다 우수하다는 의견에 대부분 동의하지 않겠지만, 더 많이 팔리는 음악의 전형은 존재한다. 가치론의 죽음을 견딜 수 없어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사후 보존하는 ‘예술 미라’에 가까운 현상이다.

미라로 제작될 시체를 고르는 작업은 주체적 선택이 아닌 집단적 결과(meme)이며, 현대는 화폐 가치를 지목하고 있다. 이를 충족하기 위한 소비력은 효율적으로 미적 경험을 선사하는 데에 주안을 둔다. 대중음악이 탄생하자마자 자본주의의 심화를 거쳐 더 쉽고, 키치하고, 빠르고, 강력해지는 방향을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 때문에 마케팅을 통해 대중에게 많이 노출되게 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어떻게든 차트에 오른다면 판매량은 가속한다. 빌보드의 어원이 광고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음악의 대규모 온라인 이주는 능률을 폭발적으로 상승시켰다. 음반 가게 사장이나 주변인이 아닌 스트리밍 앱의 알고리즘이라는 지칠 줄 모르는 녀석이 광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적절한 음악을 무한정 제공한다. 이제 음악을 듣고자 음원의 숲으로 뛰어들고 파헤치는 모험을 감행할 필요가 없다. 비로소 음악은 알아서 찾아오는 발 달린 말이다. 이때 저널과 커뮤니티의 논의, 별점이나 추천을 포함한 모든 공적 평가는 가이드나 미식의 차원보다 한 단계 뒤처져 음악 소비의 감화를 울부짖는 요청이 된다. 이는 비평적 투신으로, 합리성을 거부하는 예술계의 톱니바퀴 진행에 끼어들어 장애를 형성하려는 무모하고 외로운 시위다. 투신 행위라 함은 스스로 비평이기를 포기하고 취향의 절대 지위를 이용해 더 이상의 지지나 비판이 가능하지 않게끔 음악에 대한 기호를 표명함으로써 감상적 잣대를 그대로 들여옴을 뜻한다. 이는 생각보다 유효한데, 여전히 디깅에 뜻을 지닌 (혹은 지닌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많은 커뮤니티나 매거진 독자는 매체에서 매긴 점수를 인용해 화젯거리로 삼거나 무차별적으로, 또는 감각적으로 수긍한다.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논리적 담론은 전개되지 않는다. ‘해리 파치, 라 몬테 영.. 알아 몰라?’라는 인터넷 밈은 우스갯소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음악 좀 안다’는 사람들이 음악을 다루는 방식을 일차원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그런 행위가 필요한가? 비평가들의 첨언은 무엇에 대한 발악인가? 소위 헤비 리스너들은 음악이 본위의 가치를 상실한 채 화폐가치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차트중심적 사고가 불편한 모양이다. 물론 그것은 불편하다. 우선 자신의 취향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거대 군중에 대한 경계가 있을 테고, 둘째로 그것이 마치 절대 취향에 의한 가치론의 소멸을 빙자해 나타난 새로운 가치 척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데스 메탈을 듣는 사람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반면 KPOP 아이돌은 건드리면 무수한 공격을 받아내야 하는 요새다. 애당초 연역과 거리가 먼 보편성이란 낱말은 다수의 취미를 밀어붙이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 팝이 논하는 보편성의 잣대에서 반드시 불쾌로 인식되어야 할 메르츠보우의 한 공연 속, 여느 팝스타 공연의 관람객보다야 훨씬 격렬한 칫솔질(?)을 하는 이 광기 어린 사랑이 이미 반례가 아닌가? 예술의 주인의식을 거머쥔 대중은 집단주의의 폐해를 격렬하고도 자유롭게 드러낸다. 퀑탱 메이야수의 책 제목이 그렇듯 <유한성 이후>는 사변 안에 일찍이 드리웠지만, 현실 세계의 ‘가치론 이후’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시점이거나, 허무하게도 가치론 이후 다시 가치론이 등장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정보화 시대의 정보란 너무나 만연하여 무가치화되었다. 진위를 알 수 없고 판명하기조차 거부하는 이들에게 꼭 바라던 식의 이야기로 확증편향을 선물하는 알고리즘이라는 되먹임은 실로 현대가 ‘빅 브라더’와 ‘판옵티콘’의 세계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다소 성급히 조지 오웰의 통찰을 반박하려던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은, 음모론에 의해 세계정세가 흔들리고, SNS와 언론 기관이 사실관계 확인에 냉담하게 반응하는 지금에는 유년기의 꿈인 양 맹랑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한때 논란이던 음원 사재기는 청중에게 사기를 치는 나쁜 놈들이 있다는 사실 외에 우리가 언제든지 사기꾼을 반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도 명시한다. 차트를 달리는 경주마에 채찍을 치는 건 늘 대중의 몫이다.

들리는 음악을 듣게 만드는 알고리즘은 청자에게 채워진 목줄이다. 그것이 우리를 사육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가 시간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즉 청각적 허기를 위해 차려지는 한 상은 퀄리티나 기호에 관련 없이 딱 사료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면 그만이다. 유발 하라리의 의견처럼 생산과 소비의 과정을 인간 외 데이터적 존재가 (높은 확률로 인공지능일) 오롯이 움켜쥘 미래는 미적 사육으로 우리를 예술계의 반려동물로 간주할 것이며, 이 프롬프트가 좋네 저 프롬프트가 좋네 하는 적당한 호응만 더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음악 식사는 꼬박꼬박 주어질 것이다. 여기서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비평 남짓한 얘기가 아닌 예언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인간 본위의 가치를 잃기 싫어한다는 그 동물적 본능으로 인해 바야흐로 동물의 길로 접어든다. 에고의 사막화. 방금 전의 표현을 조금 달리하면, 음악은 식사보다 잉여적이고 더 최면적이며 밥 한 공기가 지하실 안에 수십 명을 가둬두고 춤추게 만들지는 않으니, 음악은 식사가 아닌 약물로 변모하는 듯 보인다. 도파민, 브레인 롯, AI 슬롭, 엘사 게이트까지. 쾌락의 역설이라는 오래된 논제를 증명하듯 인류사상 최대의 쾌락주의적 시대인 현대는 등 뒤에 중독과 결핍이라는 새까만 자폭장치를 달고 다닌다.

고로 초기 포스트모던의 경향처럼 반미학 또는 탈-가치, 즉 쾌락과 쾌락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가치 척도, 또한 쾌락의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불쾌와 결핍에 반하게끔 진행된 미술사는 감각에서 개념으로의 전회를 꾀했다. 하지만 그 기쁨이 생물학적 욕구에 근원을 둔다는 점에서 인류가 기쁨을 좇지 않을 때의 향방은 사육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유기체를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알고리즘을 등진 미적 극단은 휴머노이드다. SF에서 볼 법한 생물적 요소와 기계요소 간 대체는 포스트 휴먼 담론과 더불어 욕구를 제거하고 비생물로 진화한 신인류까지 상상하게 한다. 그야말로 개념주의의 극단이 가진 초상이란 이것이 아닌가? 가치론을 폐지하기 위해 가치에 연연하지 않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슬픔을 달래기 위한 예술, 더 잘 살기 위한 윤리를 믿지 않는다. 인간적 고뇌에서 벗어나려면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하면 그만이다. 삶보다 죽음의 상태가 더 공평하다. 고찰의 대상도 주체도 없기에 완전해지는 윤리와 공감하고 사고할 이유가 없기에 사라지는 예술, 데이비드 베너타가 주장한 단계적 멸종의 정반대에서 같은 결과를 실현하는 것, 궁극적이고 총체적인 거세. 아직은 생물 정체성을 외면하기보다 더 나은 욕구 충족을 지향하는 기술적 진보는 이 논변의 뉘앙스가 가히 악마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논변이 아니라 그 걸음걸이에 존재한다. 고난도 시련도 아닌 더 좋은 것만을 따라 역사가 거듭한 세속적 진화를 회고하라. 문명이란 에덴동산을 (감히) 재건하려는 망치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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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 퀑탱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정지은 역, 도서출판b)
  • 밀란 쿤데라, <89개의 말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김병욱 역, 민음사)
  •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데이비드 베너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이한 역, 서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