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팝의 우생학: 민족주의는 어떻게 문화제국주의의 아종이 되었나

by 권도엽|

팝의 우생학: 민족주의는 어떻게 문화제국주의의 아종이 되었나 main image(사진: gettyimages)

2026 슈퍼볼 하프타임쇼의 주인공은 배드 버니도, 레이디 가가도, 도널드 트럼프도 아닌 푸에르토리코가 아니었을까? 미국의 속령이지만 히스패닉과 에스파냐어로 상징되는 땅. 거기에 하나를 추가하자면, 본토와 그들을 갈라놓은 바다처럼 애매하고 서늘한 거리감. 미국의 반이민 정책과 노골적인 백인 중심 이데올로기에 정치적 올바름과 다양성은 뒷전으로 물러났고 소위 워키즘(Wokeism)은 단숨에 구시대적 가치로 전락했다. 그런 와중 미국 최대 규모의 행사 중 하나일 슈퍼볼 하프타임쇼에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배드 버니가 올라 에스파냐어로 무대를 가득 채웠고, 자신들의 문화로 세트를 가꾸었으며, 시끌벅적한 세간의 관심과 간섭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트럼프는 소셜 미디어에 “끔찍하다. 역대 최악”¹이라고 말하며 격한 반응을 보였고 배드 버니의 노래는 다시 한번 차트에 올랐다. 이렇게 보니 슈퍼볼 공연이 보여준 것은 좌파 진영에서 ‘제국주의’까지 거론해가며 비판하는 트럼프 정권의 거친 행보와 특정 지지층과의 이해관계로 나타난 패권주의에 대해 푸에르토리코라는 작은 섬이 한방 먹여준 것으로도 보인다. 그런데 이 구구절절한 상징성에 어딘가 찝찝한 기운이 가시질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미 한차례 확인했던 워키즘의 한계? 여전히 강경한 미국의 극우 세력? 폭력과 대립으로 변질된 민주주의에 대한 탄식?

서부 개척 시대에 도금하듯 씌워진 낭만을 걷어내면 아메리카 대륙에 낭자했던 혈흔이 보인다. 시대적 뉘앙스 없이 말 그대로의 제국주의가 판치던 시절 아메리카는 일제히 유럽의 손안에 들었다. 돌이켜보면 인류사상 가장 성공한 인종청소나 다름없는 원주민 탄압은 아메리카라는 말 뒤에 단연 백인이 따르게 만들었고, 그들이 그 땅의 본래 주인처럼 구는 모습을 이상하지 않게 만들었다. 근대의 토양이 된 아메리카의 격변은 그 후 세계사적 흐름을 생략하더라도 지금의 푸에르토리코인이 한때는 푸에르토리코인으로도 미국인으로도 불리지 않았음을 일러준다. 같은 맥락에서 가해자로 치부되던 민족이 작금의 피해자가 되는 폭력의 패러다임 전환도 곧잘 찾아볼 수 있다. 총칼을 차고 탱크를 탄 이의 정체성은 아리아인, 유대인, 로힝야족, 일본이나 중국인으로 변화하고, 냉전의 개막과 동시에 한반도가 그러했듯 민족의 테두리조차 끝없는 재편성을 겪는다. 관습과 생김새를 도려내면 너 나 할 것 없이 호모 사피엔스에 불과할 이들의 지긋지긋한 진영 논리는 과거 국적의 변화와 중첩이 낳은 문화 양식의 혼종을 설명하지 못한 채 여전히 국가 이데올로기의 중력으로 작용한다. 정체성이 민족의 토대를 이루는 통시적 문화 공감 능력을 상실하고 나서도 말이다. 미국 본토나 푸에르토리코가 원주민 문화를 상실하고 팝 또는 라틴 아메리카로 대체되었을 때 그 땅의 원주민이라는 관념도 이동한 것이다. 한창이던 제국주의의 어느 극점과 얼마 전까지 미국이 이룩한 냉전의 승리 이후를 일컫듯 ‘팍스 ~’의 단일한 국가성은 존재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문화 체제에 한해서는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다. 영국이 간접 통치의 결과로 후에 왕실을 중심으로 한 과거 식민지와의 연합을 이루어낸 것처럼 20세기부터 빠른 속도로 침략해온 문화적 팍스 아메리카나, 약칭 팝의 위세는 어마어마한 아성을 떨치고 있다. 팝 문화는 인터넷 발전과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무력으로 행해야 했던 개항을 자발적 참여로 바꾸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²을 더 이상 국가에 대한 서술이 아닌 세계에 대한 서술로 만들었다. 문화적 유전자는 확실히 유전자보다 강하다. 심지어 그것이 만들어진 것이라³ 할지라도 그렇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인간이 체계적인 선택과 무의식적인 선택의 방법을 통해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다면, 하물며 자연이 그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묻는데, 21세기에 이 문장을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두 단어가 덧붙어야겠다. VICE VERSA.⁴

BTS를 산업 스파이로 이해하는 법

J, Q, K 등을 앞에 달고 각국 사정에 맞게 수용되는 팝에 한국만큼 성실하게 협조하는 곳도 드물다. 냉전의 격전지로서 미국의 원조를 업고 급속도로 성장하며 산업화된 도시 양식을 확립했고, 몇 개의 랜드마크를 제외하면 전통성을 짚어내기 어려운 빌딩 숲을 갖추었다. 소위 한국적인 것은 역사 책에나 나오는 대과거의 것이 되었다. 대과거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우리의 평범한 과거조차 이미 전통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KPOP에서 복고주의는 K가 아닌 POP을 향한다. 아이돌과 인디를 막론하고 1980년대 전후를 겨냥하여 다시 구현되고 있는 뉴 잭 스윙, 시티 팝, 팝 발라드는 이미 20세기 말부터 한국의 문화가 영미권과 동화된 상태였다는 점을 알려준다. 물론 전통에 발을 걸치려는 시도도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크로스오버 장르가 대중에게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최근이다. 지난 시절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이날치와 송소희의 음악이 차트를 오르내리고 국립중앙박물관의 굿즈가 연일 이슈가 되는 요즈음이다. 그리고 마침내 BTS가 ‘아리랑’을 차용하는 일이 일어났다. 한민족의 가장 진한 음악적 스테레오타입을 함유한 이 민요는 팝 역수출의 대표 예인 그룹의 소재가 되었다. 앨범 발매 소식에 무심코 꽹과리나 장구 소리를 연상했던 이들의 빗나간 예측에 BTS는 라이언 테더, 마이크 윌 메이드 잇, 제이펙마피아 등 호화로운 해외 유명 제작진으로 화답했다. 영어로 가득인 가사에 아리랑은 아주 잠깐 울려 퍼진다. <ARIRANG>은 해외 시장에 한국의 소리를 알린다는 미명 아래 실질적으로는 외국의 소리를 재현했다. 이런 ‘끼워팔기’ 전략은 크로스오버계에 성행하는 방법론이다. 이날치, 송소희, 국립중앙박물관의 건물이나 굿즈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여기서 개항 이후를 의미할 ‘현대’란 필연적으로 서구 문화다.) 결과이며,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 2025)처럼 ‘미국과 일본의 음악 문화 등을 잡식하며 성장한 케이팝을 토대로 한국계 미국인 중심의 제작진이 만든 넷플릭스 영화’라는 혼종도 출현하고 있다. 한국적이라는 것은 모호하고 규정할 수 없는 개념인 동시에, 해외를 모방한 문화라 할지라도 언젠가 국내에서 답습된 바 있다는 자의적 경험으로 한국적이라고 인식하는 착시의 판에서, 우리는 아직도 믿지 못할 한국성에 열광한다.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자본과 문명이 자연현상이자 불가항력처럼 군림하며 다른 사상의 가능성을 압도하고 통제하는 금세기에 각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은 침투하는 방식으로만 왕좌를 탈환할 수 있으리라는 이념. 자의건 타의건 변질된 전통성이나마 치켜세우기 위해 그들의 방법론을 역이용하는 것. 현대에 수용되기 위해 현대적 구색을 갖추고 정체성을 찔러 넣는 일종의 양두구육. 이것은 같은 현상을 조금 투쟁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크로스오버 아티스트가 늘 막중한 사명감을 지니고 활동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의도와 관련 없이 그러한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침투시킨다는 개념에서 언뜻 떠오르기도 하는 바이러스성(Viral) 매체는 공공연한 팝의 새로운 메신저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문화 간의 격전은 실로 그 문화의 생사를 결단한다. KPOP이 미국 틴에이저에게 한국 문화에 대한 반향을 일으켜 식품이나 관광에 대한 소비욕을 자극했으며, 미국 사회 곳곳에도 이 수요가 반영되어 관련 제품이 생산되고 판매됨은 이제 낯설지 않다. 그들은 모호한 한국의 민족 정체성에 호의를 띤다. 일찍이 선전 문구 제작에 열중했던 나치가 유사과학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성명을 효율적으로 꿰어냈듯 문화의 파급력은 논리적 정합을 아득히 상회한다.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 논란에도 끄떡없이 울려 퍼지는 애국가, 여전히 유쾌한 <총알탄 사나이>(The Naked Gun: From the Files of Police Squad!, 1988) 속 O.J. 심슨의 모습, 영원히 거장이라 불릴 로만 폴란스키 등. 러시아 언론인 아르테미 트로이츠키가 말했듯 “어떤 서방 기관보다 공산주의 몰락에 더 많은 일을”⁵ 했을 비틀즈의 일원 폴 매카트니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공연하고 블라디미르 푸틴이 그를 환대하는 광경이라니, 이보다 지독하고 얄궂은 바이러스가 또 있을까. 현대는 마케팅이야말로 진짜 예술이라고 말한다.

바이러스성 침투에도 전통을 빙자한 현대에 대한 소비는 진정한 전통에 대한 관심으로 원활하게 이어지지 못한다. 크로스오버 음악은 전통에 대한 관심보다도 크로스오버라는 고유의 장르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낸다. 아직 국악을 내다보는 눈빛에서 지루함은 지워내기 힘들며, 이것이 효과의 실질성에 허점을 생성한다면 아무리 거대한 영향력이라 할지라도 ‘끼워팔기’ 전략은 성립하기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민족 정체성을 언급하는 음악이 흔히 ‘애국자’들에게 갈채를 받는 현상에서 이 전략이 전통을 끼워팔기 위한 것이 아닌 전통에 스스로를 끼워팔기 위한 편승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구권 바깥 대중예술에 성행하는 시대 융합의 문법은 크로스오버라는 이름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듯 전통도 아니며 현대도 아닌 표현양식을 도출한 것이며, 고로 민족 음악과 팝의 관계는 단순 대립이 아닌 변증법적 구조다. 다만 강경한 정과 반의 충돌이라기보다 한쪽이 고개를 수그리고 들어가는 형태이기 때문에 차라리 문화 유전자의 변이 발생이라고 말하는 편이 적절해 보이는 합의 형국은 전통을 소비 논리에서 조금이나마 떨어진 고고학이나 인류학 등 세부 연구 분야로 구겨 넣고 현대를 전통의 색채를 덧입힌 또 하나의 현대로 굳건하게 했을 뿐이다. 즉, 민족 정체성에 동화되어 있는 청자조차 어떤 음악이 민족적이라는 이유로 열광할 필연성은 없다. 그것은 여전히 팝이거나 팝에 구걸하고 봉사하는 노예의 민족성이다.

고전이라 불리는 숱한 사조를 지나 팝에 도달한 서양음악사의 본토에 크로스오버란 대개 클래식과 팝의 융합을 뜻하는 듯 보인다. 정체성의 뿌리가 팝의 뿌리와 다르지 않은 탓에 그들은 공간 간 결합이 아닌 시간 간 결합을 도모한다. 이렇듯 클래식이 누군가에게 민족 음악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고, 과거의 팝 음악도 한 세대나 커뮤니티에게 (인터넷이 가상 ‘공간’이자 SNS/플랫폼 등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성향과 이념을 공유하는 군집이 형성된다는 점에서 이들에게 민족이란 칭호는 수사적으로 무리가 아니다.) 노스탤지어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민족적으로 추억된다면, 음악이 특정 국가나 유파를 기초로 삼는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모든 음악은 개개인의 역사에 있어서 이미 하나의 훌륭한 구성 요소가 아닌가? 하지만 그런 바른 소리가 지금 팝에 의해 일어난 거국적 단일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조금 더 발칙한 관점을 시도해야 한다. 소비적 시각과 미적 시각은 타협할 수 없다. KPOP은 한국의 음악적 국가대표가 아니다. 크로스오버는 한국성이 아닌 서양성에 새로운 텍스트를 헌납하는 형식을 갖추었다. 바흐는 적어도 우리에게는 음악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 헨델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음악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 이 논지라면 판소리와 오페라는 비로소 동격이다.

팝의 우생학: 민족주의는 어떻게 문화제국주의의 아종이 되었나 image2(사진: The Boston Globe)

오리엔탈리즘 – 돌파!

도널드 그라우트는 리듬 앤 블루스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평등한 권리를 위해 투쟁하던 시기에, 백인 틴에이저들 사이에서 도회적 흑인 양식의 음악이 인기를 얻었다는 것은 곧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⁶ 그리고 어느 네덜란드 음악가의 말, “당신처럼 미국에 사는 작곡가들은 작곡이 참 어렵겠습니다. 전통의 중심에서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그에 대한 존 케이지의 답, “당신처럼 유럽에 사는 작곡가들은 작곡이 참 어렵겠습니다. 전통의 중심에 그토록 가까이 있으니까요.”⁷ 동서양 문화 관계에 반드시 따라붙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를 이제서야 꺼내는 걸 용서하길 바란다. 현대적이라기에 너무 낡았고 논하지 않기에는 너무 적절한 개념. 상술했듯 오리엔탈 문화가 서구 중심적 시선에 불쾌함을 표하기보다 역이용하고 종사하는 양상은 강화된 듯하다. 가게 이름마저 한글보다 영어로 짓는 것이 인스타그래머블한 시류다. 문화적 잠식은 자연현상이자 사회생물학적 흐름처럼 나타나 있고, 이에 도전하려는 의식이 미적 지향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예술의 개념적 진보란 언제나 기성 질서의 부정을 통해 이루어져 왔고, 다만 이것이 현재 ‘대중’음악의 국면을 벗어나 있다는 점만이 애석한 구석이며, 사상계가 주목하는 지점도 이 부근이다. 마크 피셔가 ‘대중적 모더니즘’ (Popular Modernism)⁸이라고 칭한 대중적 기호에 의한 순수예술에 대한 경시와 핍박은 전통과 현대, 인종이나 민족성과 같은 정체성의 관계를 넘어서서 민주적인 것과 민주적이지 않은 것의 경계를 숙제로 남겼다. 민주주의 예술, 대중음악이 엘리트주의의 서양음악을 완벽하게 정복한 지금에 보편성은 새로운 질서로 거듭났다. 그럼 이제는 엘리트를 타도한 대중을 타도할 차례인가? 부정의 미학이 그런 보복의 사슬로 이어져도 좋은가? 그것은 거시적인 측면에서 미적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시간에 상당 부분 기대어 있던 예술의 역사란 시간성의 종말 이후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⁹

양차 대전 전후 현대음악에 해체적이고 우악스러운 기조가 등장했듯 토대의 실종을 마주한 대중음악에 염세주의가 드리웠다. 일부 평론가와 리스너에게 지지를 받아온 트리키(Tricky)나 베리얼(Burial)을 비롯한 전자음악의 음울과 퇴폐, 유사 집단에서 ‘혼톨로지’라고 칭할 유령적 사운드, 그리고 존 케이지 이후 촉발된 소음의 우연성을 채택하는 재패노이즈 등의 흐름도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포스트모던 이후 새로운 사조를 기다리다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이들이 자주 논하는 ‘가능성’의 척도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실상 그들의 음악이 충분히 독특하거나 유쾌하지 못함에도 눈치 빠른 청중은 서서히 음악적 종말론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듯한 공허한 소리가 주는 인상은 부정의 미학이 아닌 탈-가치를 지향한다. 전대한 평론가는 저서 <비개념원리>에서 노이즈를 활용하는 음악/사운드 아트의 일종인 소닉 픽션을 더러 “음향적 허구가 지칭하는 바를 명확히 하지 않은 상태로 이루어지는 이론적 시도는 일반화되고 체계화된 이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론을 표방하는 정교한 허구일 뿐이라는 점에서 기만적이다.”¹⁰라고 적었는데, 이 통찰을 달리 적용하면, 실로 소닉 픽션을 둘러싼 텍스트는 충분히 명료하지 않다는 점에서 기만적이지만, 때로는 그 기만 자체에 목적을 두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동시대성의 균열을 목격하고 합리성에 엿을 먹이는 탈-가치적 행보. 개념주의 팽배 이후 이론은 출구가 아니라 미학을 옭아매던 근원이다. 거기서 뛰쳐나갈 방법을 궁리해야 하는 시점에 소닉 픽션은 레자 네가레스타니가 인문학과 음모론을 결합하여 이론 소설을 시도하듯 음향적 허구와 비허구를 충동적으로 넘나들고 있는 것 아닐까.¹¹

이런 제스처의 일종으로 해리 파치가 제3세계 또는 동양에 영향을 받아 제작한 악기로 음악을 ‘짓는’ 것도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한 음악적 척도를 거스르는 시도다. 해리 파치는 나름 탈-가치적 음악을 고수하여 음악사에 이름을 남기는 비타협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개인의 승리일 뿐 문화적 양상의 역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척도를 거부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해리 파치의 승리를 승리로 간주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전위를 칭송하면서 척도의 파괴는 정작 거부하는 (혹은 불가능하다는 인식 탓에 도모하지 않는 것일까?) 아이러니 속에 산다. 해리 파치 외에도 스티브 라이히나 라 몬테 영, 브라이언 이노, 폴 사이먼과 같이 변방의 소리를 수입한 이들이 결국 서양음악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사실은 해체적 시도가 척도 내부에서의 해체에 불과한 순환논법으로 치부될 여지다. 그렇기에 노이즈가 더 이상 개념적 진보를 거듭하지 않으면서도 나름의 지지를 받는 것도 과거 메탈이나 펑크에서 느꼈을 법한 무정부주의적 이념과 예술적 종말론을 가시화하는 것에 마음이 동하는 것뿐이라고 사료된다. 허무나 끔찍함이 우리에게 전율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우울과 자포자기의 심정을 공감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과거 섹스 피스톨즈가 인기 록 밴드가 자신들을 대변하지 못한다며 뛰쳐나와 많은 펑크’족’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포스트모던 이후’, ‘포스트-포스트모던’, ‘포스트 컨템포러리’, ‘메타 모더니즘’ 같은 선형적 예술 사관을 부활시키려는 미흡한 시도는 작금의 세대가 가지고 있는 결핍을 비평적으로 승화한 도착증이다. ‘종말’에게 당연히 ‘이후’ 따위는 없다. 그러니 작금의 사소한 푸념처럼 보이는 각종 저널과 커뮤니티의 예술 운운하는 평문은 시대정신이 사상계를 잡아먹고 난 뒤의 배설물이라 해야겠다.

진혼곡을 쓰다 죽은 모차르트, 청각을 잃고도 음악을 놓지 않은 베토벤, 자신의 영화 속 질문처럼 “영화가 삶보다 중요”하다고 믿었을 프랑수아 트뤼포의 ‘사무라이’스러운 투신적인 예술관은 예술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가치관에서 예술을 위해 죽일 수도 있는 (플럭서스 운동과 관련해 작곡되었던 퍼포먼스형 음악은 관객 또는 연주자를 상해하는 지시문이 적혀 있는 경우가 있었다.) 가치관으로, 또 예술을 위해 예술을 죽일 수 있는 가치관으로 변모했다. (이런 관점에서 음악에서의 노이즈를 자살적인 사운드라고 말할 수 있다.)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언은¹²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많은 반박과 철회를 마주했지만, 대부분의 작풍은 아직도 그 종언의 자장 안에서 허덕이고 있다. 근래 시대적 진단을 감행하는 여러 예술 비평은 그 허무를 마주하는 것에서 멈추고, 사회과학적 이론을 문화적 측면에서 되풀이한 것에서 멈춘다. 예술이 죽고 나면 어디로 가는가? 이 모순적이고 끈질긴 질문은 메아리처럼 다시 돌아올 뿐 대답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이 아닌 우리 모두가 죽음 이후에 있는 유령이다. 이승에 돌아갈 방법은 나도 잘 모르고, 당신도 잘 모른다.

이 글은 공간문화 플랫폼 《공간주의》에서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https://attention2.space/2026/eugenics-in-pop/

-
주/참고

  1. https://truthsocial.com/@realDonaldTrump/116038200403048483
  2.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3. 에릭 홉스봄, <만들어진 전통>
  4. 찰스 다윈, <종의 기원> - 장대익 역/사이언스북스
  5. https://www.dailyrecord.co.uk/news/uk-world-news/revealed-how-the-beatles-brought-down-1034955
  6. 도널드 J. 그라우트, <서양음악사> - 민은기, 오지희, 이희경, 전정임, 정경영, 차지원 역/이앤비플러스
  7. 존 케이지, <침묵> - 나현영 역/포도밭
  8. https://k-punk.org/
  9.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
  10. 전대한, <비개념원리> - 고트
  11.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 윤원화 역/미디어버스
  12. 아서 단토, <예술의 종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