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의 우리는 인류 탄생 이래 가장 빠른 기술적·문화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어느덧 우리는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이전의 일상을 떠올리기 어려워졌고, 한때 모두가 향유하던 플랫폼이 순식간에 뒷방으로 밀려나는 일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코로나19의 창궐은 사회와 문화의 어법을 뒤흔들었으며, 최근 몇 년 급격히 성장한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창작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수 세기, 수십 년을 주기로 변화하던 사회는 이제 수 년, 수 개월마다 급변하여 우리에게 그 소용돌이에 적응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원심분리기처럼 우리를 뒤흔드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또 어떻게 버텨야 할 것인가.
우리의 대중음악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음악을 만드는 방식, 유통하는 방식, 소비하는 방식은 지난 수십 년간 거듭된 변화를 겪었고, 새로운 기술과 문화는 그때마다 대중음악을 둘러싼 환경 자체를 새롭게 구성했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약 25년, 세기의 1/4이 지난 지금이 현 세기의 궤적을 돌아보기 적절한 시점이라 판단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이처럼 과거의 전철을 기록하는 일은, 앞으로의 변화를 가늠하기 위한 하나의 이정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원)
* * *
“레코드판이 카세트가 되고
카세트테이프가 CD로 바뀌고
CD가 다운로드, 스트리밍이 되어도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도 살아있네”- 박진영, '살아있네'(2016)
박진영의 장담처럼 매체가 몇 번을 바뀌어도 음악은 살아남았다. 다만 청취 방식은 예전 같지 않다. 듣고 싶은 노래는 언제든 손끝에 있고, 새 노래는 매일 끝없이 쏟아진다. 그런데 우리는 왜 지나간 노래를 다시 찾아 듣는가.
첫 테이프의 기억
god <Chapter 5> (2002) 카세트테이프.
그해 여름 박지성의 슛이 골망을 흔들었을 때 나는 소파에서 뛰다가 머리를 박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응원하던 그때, 목 놓아 부르던 멜로디는 '오! 필승 코리아'(2002)였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윤도현의 목소리와 함께 그때의 경기 장면이 나오면 채널을 멈출 정도이니 당시의 열기는 어떠했겠는가. 같은 해 겨울에도 붉은 열기가 채 식지 않은 가운데 국민그룹이라 불리던 god가 돌아왔다. 전지현의 목소리로 "싫어, 싫어!" 가 담긴 '거짓말'(<Chapter 3>, 2000),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라는 가사로 전 국민의 심금을 울린 '길'(<Chapter 4>, 2001). 두 앨범의 연이은 열풍 끝에 다음 앨범을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당시 god는 축제 분위기와는 달리 어둡고 짙은 멜로드라마를 택했다. "이 감옥에서 나갈 때 네가 서 있을까 / 나 같은 놈을 다시 용서할 수 있을까" 라는 가사의 '편지'(<Chapter 5>, 2002) 인트로가 흘러나오던 순간. 초등학생이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남자의 심정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지만 그럼에도 곡조와 함께 전해진 깊은 감정을 태어나 처음으로 느꼈다.
그 감정의 정체가 궁금해서 나는 지금은 없어진 대형마트 '까르푸'의 음반 코너로 향했다. 주말마다 온 가족이 차 한 대에 타고 가던 곳이었다. 입구의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초코로 먹을지 반반으로 먹을지가 고민의 전부였던 내가 처음으로 학습 용품이 아닌 '음반'을 사도 되느냐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래. 사." 그 한마디에 흰색 플라스틱 경보 센서가 붙은 테이프 하나를 진열대에서 꺼내 고이 쥐었다. 칼로 상단 빗금에 조심스럽게 선을 그어 자국이 남지 않게 개봉하고 투명 케이스를 좌우로 열었다. 자태를 드러낸 흰색 테이프. 그리고 칸막이 안에 담긴 코팅된 속지를 펼쳤다. 화보가 펼쳐진다. 그리고 빼곡히 적힌 가사들. 그야말로 깨알같이 적힌 글자들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Thanks to'가 적혀 있다. 멤버들이 고마운 이들에게 적은 편지를 몰래 읽는 기분이 들었다. 음악을 손으로 만지고, '사랑? 사랑!' 같은 트랙을 TV나 라디오가 아닌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원 없이 들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까지 카세트테이프 형태의 음반 발매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2005년 아이팟 나노가 출시되고 이듬해 내가 첫 MP3 플레이어를 갖게 되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 시기의 테이프는 마지막 불꽃이었다고 할 수 있다. LP, 테이프, CD 같은 이동식 저장매체가 아니라 파일 형태로 음악이 확산되던 그때부터 음반시장의 판도가 바뀐 것은 모두가 아는 얘기다. 인터넷의 등장도 한몫했다. 한국 음반시장은 2000년 4,104억 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01년 3,733억 원으로 9% 감소하며 꺾이기 시작했다.[1] 국내 톱10 음반의 연간 판매량 합계는 2001년 880만 장에서 2003년 330만 장으로 곤두박질쳤다.[2] 나는 문을 닫기 직전의 가게에서 마지막 한 장을 사 들고 나온 셈이다.
음악을 기다린다는 것
카세트테이프에 볼펜을 꽂아 테이프를 되감는 모습.
나는 아직도 내게 라디오를 알려준 친구를 기억한다. "성적을 올리고 싶은데 집중이 안 돼"라는 말에 그 친구는 "라디오를 들어봐"라는 다소 이상한 처방을 내렸다. 그렇게 듣게 된 것이 MBC FM4U <친한 친구>였다. 유행가요 위주의 선곡이 이어졌고 나는 디제이 멘트가 끝나기 무섭게 녹음 버튼을 눌러 한 곡씩 공테이프에 담았다. 그 테이프에는 리쌍의 '발레리노'(2007)가 들어 있었는데 아버지 차로 옮겨간 테이프를 들은 부모님이 "이 노래 뭐냐? 멋있다"라고 했을 때의 보람이란.
카세트 플레이어가 '씹어버린'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꺼내 엉킨 줄들을 구멍에 볼펜을 넣어 되감고 저녁 여덟 시만을 기다렸다. 동방신기가 생방송 라디오에 나오는 날이었다. 들뜬 디제이의 목소리와 함께 코너가 시작되면 녹음 버튼을 눌렀다. 지금으로 치면 위버스 라이브를 클립으로 녹화하는 셈이다. 훗날 RIIZE의 리메이크로 한 번 더 알려진 데뷔곡 'Hug'(2004)에 이어 'Rising Sun'(2005)이 나온 직후 그들의 인기가 한창 뜨겁던 때였다. 하도 많이 들으면 테이프가 늘어져 목소리의 피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이른바 '와우 앤 플러터(wow & flutter)'처럼 재생 속도의 흔들림이 소리의 일부가 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이 시절의 청취 방식에는 공통점이 있다. 음악에 닿기까지 수고가 필요했다는 것. 용돈을 모아 매장에 가고 핫트랙스 오픈런을 하며, 라디오 방송 시간을 기다리고 녹음 버튼 앞에서 긴장했다. 수고를 들인 만큼 음악은 희소했고, 이전 시대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귀하게 들렸다. 희소한 음악을 고르는 권한은 방송국의 선곡표와 음반사의 유통망에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대체로 같은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유행가의 힘은 이처럼 모두가 대체로 같은 문화를 향유한다는 감각에서 나왔다.
수고의 소멸, MP3와 소리바다
2000년대 초반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 iFP-390T.
드디어 내게도 MP3가 생겼다. 검은 몸체에 파란 불빛이 들어오는 감성적인 디자인이었다. 공테이프는 필요 없어졌다. 검색하면 음악 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는 '소리바다'가 존재했기에. 2000년 양정환·양일환 형제가 만든 한국판 냅스터는 2003년 회원 수 2,000만 명을 넘기며 '음악 무료 시대'의 문을 열어버렸다.[3] 2001년 음반 제작자들의 소송, 2002년 서비스 중단과 재개, 2007년 합법 전환을 거쳐 2022년 상장폐지와 파산 수순으로 끝난 이 회사는 한 시대의 부흥과 쇠락을 상징한다. 공들여 만든 음반의 판매량이 떨어지고 핫트랙스 앞에 발매일마다 늘어서던 줄이 사라져가는 동안 음반 산업 관계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런 줄도 모르고 철없이 신나서 내려받았던 무지함을 고백한다. 김현정은 4집 <Wild Beauty>(2001)의 타이틀곡 '떠난 너'에 "MP3 다운받지 말고 제발 사주세요" 라는 메시지를 거꾸로 심는 백마스킹까지 동원했다.[4] 노래 안에 숨겨야 했을 만큼 절박한 호소였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192kbps인지 320kbps인지 음질 정보를 확인해 받고 가수-제목 순으로 파일명을 정리했다. 이때부터 앨범 전체를 다운받지 않는 이상 앨범명은 점점 덜 중요해졌다. 200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가수들이 디지털 싱글 위주로 발매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렇게 채워진 내 폴더는 두 갈래였다. 한쪽은 FreeTEMPO 같은 시부야케이 일렉트로닉 팝, 심야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된 줄리 런던 버전의 'Fly Me to the Moon'. 다른 한쪽은 힙합이었다. 친구들이 장나라와 보아를 좋아할 때 내 마음은 드렁큰 타이거와 주석에게 가 있었고, 밤새 몰래 컴퓨터를 켜두고 받은 영화 <8마일>이 내게 남긴 에미넴의 'Lose Yourself'(2002)는 힙합 디깅의 문을 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세계는 쉬는 시간마다 반 친구들과 한 시간씩 맞교환되었다. "이번 교시 듣고 돌려줄게." 종이 울리면 우리는 서로의 음악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곡 좋더라. 파일 보내줘." 고작 10MB 남짓, 원본과 거의 구분되지 않을 만큼 쉽게 복제되는 그 파일이 음악의 시장가치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음악의 경제적 가치가 하락하자 그 '무게감'도 무료 파일처럼 가벼워졌다.
마지막 광장 '싸이월드'
2004년 싸이월드 미니홈피 화면.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도 거리 응원은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 시절의 음악은 '광장', '거리', '연대' 같은 단어들과 붙어 있었다. 버즈, 김종국, SG워너비의 노래가 노래방에서, 행사장에서, <X맨> 같은 예능에서 울려 퍼졌고 누군가 노래를 시작하면 주변에서 받아 부르는 분위기가 있었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과 <궁>이 남긴 클래지콰이의 'She is'(2005)와 하울 앤 제이의 'Perhaps Love'(2006)까지. 같은 시간, 같은 화면, 같은 노래가 전국 단위의 긴 호흡으로 공유되었다. 오프라인의 연대감은 온라인으로 이어졌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배경음악은 2002년 7월 유료 서비스를 시작해 2005년 11월 누적 1억 곡, 2007년에는 4년 10개월 만에 2억 곡 판매를 돌파했다. 애플 아이튠즈에 이은 세계 2위 기록이었다.[5] 도토리 다섯 개, 500원짜리 곡 하나로 마음의 상태를 내보이던 시대. 당시 국내 음악시장의 규모를 생각하면 기이할 정도의 규모였다.
생각해 보면 차트는 모두가 같은 음악을 들을 때 화력이 세다. 같은 예능을 보고, 같은 드라마를 보고, 같은 라디오를 듣는데 일체감이 안 생길 수가 없다. 1990년대까지가 정보의 제한 때문에 같은 음악을 듣던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정보의 바다가 열렸음에도 레거시 미디어의 영향력이 여전했다. 월드컵이라는 사건이 부여한 일체감도 영향을 미치던 시대였다. 공감할 거리가 흘러넘쳤다. 단단한 공감대가 형성되면 구성원들은 저마다의 지질한 감성을 꺼내 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된다. 프리스타일의 'Y'를 부르며 자조 섞인 웃음으로 빵모자를 눌러쓰던 자태. '오그라든다'라는 말이 아직 없던 시대였다. 채연은 가끔 눈물을 흘렸고, 리쌍의 여자와 남자는 헤어지지도 떠나가지도 못했으며, MC몽은 죽도록 사랑했다. 그러니까 그런 노래들을 누군가가 들으라고 미니홈피에 BGM으로 걸었다. 그러다 헤어지면 미니미에게 X자 마스크를 씌우고 기분을 '답답'으로 바꾼 뒤 에이트의 '심장이 없어'를 걸어두는 투명한 감정 표현이 있었다.
한마디로 '감성의 시대'였으나 그 감성에 값을 치르는 구조는 허술했다. 정확히는 돈이 흐르는 관로가 어두웠다. 싸이월드는 곡당 500원 가운데 35%를 '기획사 및 음반사' 몫의 권리료로, 저작권자에게 5%, 실연권자에게 2.5%를 지급했다. 나머지 57.5%는 플랫폼과 결제 대행사의 것이었다. 그리고 기획사로 흘러간 175원이 정작 노래를 만든 사람에게 얼마로 분배되는지는 개별 계약에 따라 달랐다.[6] 미니홈피 배경음악으로 사랑받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故 이진원이 "일주일에 단 하루만 고기반찬 먹게 해줘"('도토리')라고 노래하다 2010년 세상을 떠난 일은 같은 관로 위에 있다. 2억 건의 감성 구매. 그러나 곡당 500원 중 만든 사람들의 몫은 다 합쳐도 이백 원 남짓이었고 그마저 어떻게 나뉘었는지는 각자의 계약서만이 알고 있다.
차트의 벽돌화
멜론 TOP100 중 일부. 성시경 ‘너의 모든 순간’ (30위), 에픽하이 ‘Love Love Love’ (57위), DAY6 ‘예뻤어’ (60위) 등 과거 발매곡들이 현재 차트에 자리하고 있다. 2026년 8월 31일 오전 2시 기준.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2009)와 함께 2000년대의 문을 닫고 맞이한 2010년대는 페이스북의 등장으로 싸이월드가 밀려난 시대이기도 하다. SNS 판도의 변화와 음원 차트 중심화 속에 그 빈자리를 멜론이 차지했다. 스트리밍 초창기엔 벅스가 강세였으나 시상식 런칭과 차트 중요도의 대두 속에 빅뱅, 2NE1 같은 2세대 아이돌과 아이유, 버스커버스커 같은 뮤지션들의 일간 차트 '전곡 줄 세우기'가 벌어졌다. 달리 말하면 이때까지는 팬덤 스트리밍으로라도 앨범 단위의 청취가 살아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멜론 TOP100'이라는 이름은 2021년에 현재 형식의 차트에 정식으로 붙었지만 그 전신은 '실시간 차트'와 '일간 차트'였다. 자정을 기점으로 실시간 1위가 일간 1위로 이어질지 주목하고, 100위 밖으로 밀려나는 곡까지 챙겨볼 만큼 중요한 지표였다. 그런데 불과 십 년 새 벽돌이 되었다. 국내 음악 동향의 주요 지표였던 실시간 차트는 2018~2019년의 사재기 파동과 팬덤 줄 세우기의 여파 속에 2020년 7월 6일 폐지되었고 24Hits를 거쳐 2021년 8월 지금의 TOP100으로 개편되었다.[7] 그리고 지금 멜론 차트에는 9년 전 발매된 DAY6의 '예뻤어'와 12년 전 성시경의 '너의 모든 순간'이 중위권을 차지하고 있다(각각 60위와 30위, 멜론 TOP100, 2026.08.31. 기준). 몇 달째 같은 앨범이 고정된 채 이게 지난주 차트인지 이번 주 차트인지부터 확인하게 되는 일은 해외 차트에서도 마찬가지다. 차트의 벽돌화는 우리만의 일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주류가 얇아지고 취향이 파편화된 시대에 차트에는 모두가 거부하지 않는 '평균값'의 노래들만 남았다. 갓 나온 음악에 대한 관심은 줄었고 내가 아는 노래로의 회귀 현상이 차트에 정착한 지 오래다. 에픽하이의 'Love Love Love'(2007)가 올해 초 19년 만에 역주행한 것처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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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내가 아는, 들어본 음악'을 원한다.
그런데 그런 음악은 대부분 과거에 있다.
과거에는 음악이 시간을 머금으며 존재하는 게 가능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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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의 노령화에는 플랫폼 이용자의 연령대 변화도 얽혀 있겠지만 그보다 큰 원인은 모두가 같은 노래를 오래 듣는 환경의 부재다. 음악의 순기능인 시대 소환, 시간을 가둬두는 보고(寶庫)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는데 새 노래가 시간을 머금을 광장이 없어진 것이다.
15초의 음악
아일릿의 'It's Me'(2026)를 듣다가 차라리 이 정도의 속도가 '빠름을 넘어서는 빠름'으로 숏폼 플랫폼에 적당하지 않나 생각했다. 재생과 동시에 0초부터 후렴 "Who's your bias? I'm your bias" 를 외치며 시작하는 노래. 어떤 면에서 가장 트렌디하고 약간의 뽕끼마저 K팝답다. 러닝타임 2분 19초. 에스파의 'LEMONADE'(2026)도 15초 안에 "I'll make it LEMONADE" 라는 핵심 구절을 제시한다. 릴스 15초 안에 포인트가 나와야 하니까. 매체 변화가 곡 구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장기하는 유튜브 SPNS TV 슈즈오프 팟캐스트(EP. 113, 2026.6.17.)에서 "'밤양갱'(2024)에 2절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현상은 숏폼 플랫폼이 확산되기 전부터 징후를 보였다. 오하이오 주립대의 위베르 레베이예 고뱅(Hubert Léveillé Gauvin)이 1986년부터 2015년까지의 빌보드 상위권 곡들을 분석한 결과, 1980년대 중반 평균 20초를 넘던 인트로는 5초로 줄었고 제목이 가사에 등장하는 시점도 앞당겨졌으며 평균 템포는 8%가량 빨라졌다.[9] 감정이 무르익는 시간, 맥박의 고점을 기다리는 장전의 시간을 기다릴 인내심이 청취 환경에서 증발하고 있다.
왜 기다리지 않는가. 스포티파이는 30초 이상 재생되어야 로열티를 집계한다. 그리고 스포티파이 데이터를 분석한 폴 라미어에 따르면 청취자의 24.14%가 첫 5초 안에 곡을 건너뛰며 절반 가까이는 곡이 끝나기 전에 떠난다.[10] 5초 안에 리스너를 사로잡지 못한 곡에 두 번째 기회는 드물다. 고뱅은 이 현상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아티스트들은 곡을 문화적 산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광고로 만들고 있다."[9] 리스닝이 아니라 쇼잉의 시대로 옮겨간 지 오래라는 뜻이다. 그래서 리센느의 'Love Attack'(2024)처럼 후렴의 멜로디가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노래가 내게는 카펜터스나 ABBA를 들은 듯 '클래식하게' 느껴지는 역설이 생긴다. 아이돌 음악이 이러한 지형을 이루는 가운데 R&B와 포크, 발라드 가수에게 15초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런데 흐름은 여기서 꺾인다. 음악이 빠르게 소비될수록 느린 호흡의 오래된 매체를 향한 관심이 늘고 있다. 음악 파일은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지만 한 곡이 머금은 세월만큼은 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냉동보존과 해동
LP 레코드의 홈을 따라 재생되는 턴테이블 바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음악은 그 시대와의 거리만큼 시간을 머금고 있다. 그 음악들은 테이프와 LP라는 물성으로 냉동보관되어 있다가 바늘을 얹는 순간 해동된다. 늘어진 피치, 사각거리는 잡음까지. 딱 노이즈의 부피만큼 시간이 들어 있다. 반면 MP3 이후의 파일들은 다르다. 이 파일들은 복제되는 한 100년 후에도 오늘 받은 것과 똑같이 깨끗할 것이다. 완벽한 보존은 달리 말하면 아무것도 머금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 소리에는 시간이 쌓일 공간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이 일어난다. 미국에서 LP는 2020년 매출 기준으로 CD를 앞질렀고 2022년에는 판매량으로도 1987년 이후 처음 CD를 추월했다. 2024년에는 4,400만 장이 팔리며 매출 기준 18년 연속 성장을 이어갔다.[11] 스트리밍이 여전히 대세인 지금 가장 오래된 물성의 매체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셈이다. LP를 플레이할 때 먼지 섞인 노이즈가 주는 따뜻함, 앨범 커버까지 하나의 예술 작품을 구매하는 듯한 감각. 어쩌면 음악으로부터 예술과 시간의 물성을 되찾고 싶은 본능에 가까운 소비다. 역주행도 같은 맥락에 있다. 19년 전 에픽하이의 노래인 'Love Love Love'가 챌린지를 타고 차트로 돌아오는 현상 말이다. 앞서 언급한 리센느의 ‘Love Attack’ 역시 발매 2년 만에 입소문을 타고 멜론 TOP100 1위와 지상파 음악방송 1위에 올랐다.[12] 취향의 파편화를 일으킨 알고리즘을 타고 과거의 음악이 역류해 들어오고 있다. '좋은 음악'은 시대를 타지 않는다는 믿음과 과거 음악이 주는 정서적 충족, 두 가지가 맞물린 결과로 보인다.
왜 우리는 굳이 함께 들었던 음악을 다시 찾는가. 음악에는 나와의 연결만큼이나 타인과, 사회와 연결되고 싶은 욕망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감성으로만 짠 플레이리스트는 정교할수록 오히려 공감받기 어렵다. 나만 아는 노래는 나를 설명해 주지만 함께 아는 노래는 우리를 묶어준다. 노래방에서 아무도 모르는 노래를 혼자 부를 때의 쓸쓸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전주만 나와도 탄성이 터지는 노래, 후렴을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모두의 언어가 된다. 유행가가 촌스러움을 무릅쓰고도 힘이 셌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노래들은 공유한 시간을 함축하고 있었으므로.
끝까지 듣게 만들기
TV에서 유튜브로 무한한 갈래가 펼쳐지며 공유 기억의 농도는 옅어졌고, 그 자리에 개인의 취향이 들어섰다. 어느 쪽이 낫다고는 못 하겠다. 유행의 시대는 추억과 공유 정서를 주는 대신 자기 취향을 함양할 기회를 줄였고, 오늘날의 파편화는 공유할 기억을 줄이는 대신 취향을 허락했으니까. 다만 음악은 이제 둘로 갈라졌다. 15초 안에 모든 것을 쏟고 스쳐 지나가는 음악과 그럼에도 여전히 끝까지 호흡하며 따라가게 만드는 음악으로. 전자의 음악이 시간을 얼마나 머금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유행이 바뀌는 쇼츠의 회전 속도 안에서 소비된 노래는 십 년 뒤 돌아봤을 때 한 해, 두 해 동안 차트에 머물던 과거의 노래들만큼 시간을 머금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머금을 시간 자체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음악가는 기묘한 악조건에 놓인 셈이다. 창작자라면 자신이 만든 음악이 오래 들리길 바랄 것이다. 5초 안에 스킵당하는 환경에서 1년을, 2년을 그 노래만 듣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게 가능할까? 지금 음악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히려 장인정신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15초를 겨냥할 때 4분을 설계하는 사람. 숏폼과 같은 매체 소비와는 무관하게 좋은 음악을 남기겠다는 마음.
오늘도 지구 곳곳에서 십만 곡이 넘는 음악이 발아한다. 그 안에 저마다의 시간이 담긴다. 듣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그 시간은 배가 되고 오늘 발매된 음악이 사반세기 후 다른 형태의 매체에서 시간의 더께를 한 겹 더 얻을 수도 있다.
까르푸에서 흰 경보 센서가 붙은 테이프 하나를 손에 쥐었던 나는 그것이 그저 그 무렵의 유행가 음반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돌이켜 그 앨범을 다시 만져보니 그 물성 안에는 2002년이라는 한 시절을 그대로 감각할 수 있는 소리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 음악은 시간을 머금는다.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이 문장을 실감한다.
참고 자료
[1] 김주완, 「IT가 죽인 음악산업, IT로 부활하다」, 한국경제, 2021.4.25. (한국음반산업협회·IFPI 집계 재인용)
[2] 한국콘텐츠진흥원, 《2011 음악산업백서》, 국내 TOP10 음반 판매량 추이.
[3] 「소리바다, 결국 상장폐지 수순…2만 개미 손실 불가피」, 이코노미스트, 2022.8.26. ; 「양정환 소리바다 대표」, 서울경제, 2012.6.1.
[4] 「초대박 유명 가수 노래를 '거꾸로' 돌려봤더니, 소름 끼치는 일이 벌어졌다」, 위키트리, 2020.10.16. (KBS <스펀지> 32회 소개 사례)
[5] 「싸이월드 BGM 판매 1억 곡 돌파」, ZDNet Korea, 2005.11.7. ; 「싸이월드, 배경음악 누적 판매량 2억 돌파」, 전자신문, 2007.5.23.
[6] 안은별, 「'달빛요정'의 슬픈 유언…"도토리 싫어. 고기가 좋아!"」, 프레시안, 2010.11.9. (싸이월드 음원 수익 배분 요율 및 정산 구조)
[7] 「멜론, 실시간 차트 없앴다…24시간 집계로 개편 "순위 지양"」, 뉴스1, 2020.7.6. ; 「[HI★라이트] 멜론 '24Hits' 차트 도입 그 후…달라진 건?」, 한국일보, 2020.7.17.
[8] 「에픽하이 'Love Love Love', 19년 만의 차트 역주행…샘플링·공연·챌린지 시너지」, 뉴스컬처, 2026.1.5. ; 「샘플링·챌린지 인기…에픽하이 '러브 러브 러브', 19년 만에 역주행」, 뉴스1, 2026.1.16.
[9] Hubert Léveillé Gauvin, "Drawing listener attention in popular music: Testing five musical features arising from the theory of attention economy", Musicae Scientiae 22(3), 2018. (인트로 길이·훅 도달 시점·템포 분석 및 인용 발언)
[10] Paul Lamere, "The Skip", Music Machinery, 2014.5.2. (스포티파이 재생 데이터 분석)
[11] RIAA, 2024 Year-End Music Industry Revenue Report, 2025.3.18. ; 「RIAA 2024 Music Report」, Billboard, 2025.3.18.
[12] 「리센느, 'LOVE ATTACK' 역주행으로 '인기가요' 1위 등극」, iMBC 연예, 2026.7.27.
이미지 출처
대표 이미지. 테이프가 풀려 나온 카세트테이프 3D 이미지 - Anthropic Claude로 3D 렌더링 제작, 2026.10.07.
1. god <Chapter 5> 카세트테이프 - 번개장터 PlayMusic, 「지오디 god 5집 레터 카세트 테이프」 상품 게시물 사진, 판매자 사용 허가, 2026.9.02.
2. 카세트테이프 릴 구멍에 볼펜을 꽂아 테이프를 되감는 모습을 재현한 3D 이미지 - Anthropic Claude로 3D 렌더링 제작, 2026.10.07.
3.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 iFP-390T - 김민정, 「[복GO를 찾아서] ‘출근길이 등굣길이 됐네’…추억의 ‘MP3’」, 이데일리(네이트뉴스 재전송), 2021.2.21. 사진: 아이리버 공식 페이스북.
4. 싸이월드 탄생 5주년 당시의 미니홈피 화면 - 「탄생 5주년 맞은 싸이월드」, 전자신문, 2004.8.31.
5. 멜론 TOP100 차트 - 멜론, 2026.8.31. 02:00 기준 화면 캡처. (이미지 일부 편집)
6. LP 레코드를 재생하는 턴테이블 바늘 - PNGTree, 「Close-up of a vinyl record player with stylus on the record」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