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yoji Ikeda, <data.tron> [8K enhanced version], (2008-2009, photo: Liz Hing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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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음, 밀폐, 돌비, 서라운드, 다채널, 무손실, 출력, 노이즈 캔슬. 우리에게 익숙한 이 용어들은 음악이 아닌 기술에 관한 것이다. 진화한 오디오/레코딩 시스템으로 신화를 구축한 음질은 흔히 ‘좋다’ ‘나쁘다’로 가치판단을 함유한 채 말해진다. 부정성이 말소된 또렷한 청각적 상은 절대적 쾌감을 일으켜 늘 옳은 것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음악은 음질에 관해 거의 전투적인 태세다. ‘라우드니스 워’는 질적 환상을 이용하여 청력을 담보로 기쁨을 주입했다.
음악에 전위적 성격이 들어선 이후 악곡의 요소를 일일이 짚는 해독이 다소 무력해진 점이 음악의 질적 추구를 다른 의미로 변질되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위성의 투박한 매력과 달리 결과적으로 음악은 어떤 측면에서는 더욱 권위적으로 바뀌었다. 클래식 음악이 전문적이고 일회적이며 오프라인으로만 감상할 수 있던 탓에 엘리트의 공간적 권력이 크게 작용했다면 대중음악의 공간 권력은 기술적 차원에서 성행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접할 수 있어도 원하는 방식으로는 아니다. 대개 훌륭한 오디오 시스템의 상징인 스피커의 공간성은 만인을 향한 반면 이어폰의 공간성은 개인을 향한다. 다만 선곡의 권리가 한정된 점은 같다. 때문에 스피커의 음악은 청자와 제공자 간의 합의가 결여된 채 일방향으로 선사되며 그 공적인 특성으로 되도록 완만한 취향의 곡이 선택된다. 정확한 통계를 낼 수야 없겠지만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스피커보다 이어폰에서 재생되는 비율은 주류 음악의 것보다 극심한 격차를 나타낼 것이다.
또한 스피커를 통하는 장소가 제약을 지니기도 한다. 클럽과 콘서트장은 입장료를 받고, 카페와 술집은 소비를 요구하고, 집이나 회사나 학교에 들어서려면 비밀번호든 신분증이든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고, 넓게 보아 실내의 벽과 문의 존재 자체도 물리적 제약이다. 실외에 스피커가 배치된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대개 버스킹은 허가를 받아야 하며 그마저도 너무 시끄러울 경우 민원을 제기할 수 있다. 과한 음량은 범죄이기에 스피커는 지나치게 먼 공간을 차지할 파장을 내뿜어서는 안 된다. 만일 가구와 가구 사이를 넘나들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더 큰 음량과 더 좋은 음질을 자랑하는 동시에 매우 종속적인 스피커처럼 작곡에서도 전자음과 가상악기의 등장은 티끌도 없는 정확한 사운드를 생성하며 음질의 신화를 지탱한다. 본래 작곡의 보편화를 끌어낼 터였던 이것은 조금씩 또 다른 위계를 보탠다. ‘하이퍼 팝’이라는 장르 용어의 함의가 그렇듯 세공된 듯한 촉각적 쾌감에 대한 추구는 늘 기술 발전과 궤도를 함께 한다. (후술하겠지만 물론 해당 장르의 모두가 그런 지향을 띠지는 않는다) 이때 기술과 음질의 나란함이 풍기는 미래주의적 암시는 실제로 하이퍼 팝 프로젝트 큐티(QT) 등지에서 SF와 CF를 차용한 소비주의 경향 이미지로 발현하기도 했다. 보통 소피(SOPHIE)나 아르카(Arca)의 몇 사례처럼 반-소비주의 경향을 더 쉽게 찾아볼 수 있으나 이들 음악이 기계 언어로 반-기계적 태도를 취하는 점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전자음악은 자본주의와 기술 문명의 수혜를 직격으로 맞이한 곳 중 하나다. 한데도 이를 모순이라 부른다면 전자음악은 기술 문명의 급진을 어떻게 비판해야 하는가?
임철민, <빙빙>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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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즈는 음악의 무의식이다.”- 메르츠보우(Merzbow)
과거에 신화는 공동체 의식이나 안위, 질서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는 극화된 상징이었다. 모든 것이 체계화되고 객관화된 현대에 힘을 잃은 옛이야기는 미신으로 폄하되거나 칭얼거리는 어린아이에게 사용하는 얄팍한 수였고, 그렇게 질서란 아예 확고한 하나의 성역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란이다. 여전히 질서의 본위를 유체화하는 법률의 변동성과 윤리의 주관성은 일반적으로 숙고되지 않을 뿐 영구하다. 그러니 대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전승의 몫을 다 한 것이다. 홍콩의 기술철학자 육후이 (Yuk Hui, 혹은 허욱)가 말하듯 과거의 상징이란 소멸했다기보다 현대적 방식으로 대체되었을 따름이다.
그러니 기술에 의한 매체를 기술 복제하는 진풍경에도 기술 완전성은 결함을 끊임없이 마주하고 있다. 이미 생성되어 버린 기술의 신화와 실질적 역량 사이에서 블랙아웃이나 서버 마비, 노이즈나 열화라는 사태가 만연하다. 음악에서 이 오해는 텍스처에 대한 환상으로 떠올라 있다. 우리는 음악의 촉각적 심상이 쾌락으로 직결할 때 ‘사운드가 얼마나 깨끗한가?’가 아닌 ‘어떤 소리인가?’가 판단에 우선시되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소피의 ‘LEMONADE’에 모방된 탄산음이 심상으로 나타나는 적극적 요인은 명료함보다 탄산음료의 개념이다. 녹취되는 ASMR이 순수한 808베이스에 비해 더 감각적인 인상을 남기는 건 아마도 우리가 소리를 순수한 물질이 아닌 어떤 것에 대한 물질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심상은 반드시 이미지다. 대상이 있어야만 명료함의 정도를 매길 수 있고, 고로 촉각적 사운드는 대개 존재가 아닌 요소가 된다.
기술의 뒤안길에 도사리는 불완전성은 노이즈를 통해 가시화될 수가 있다. 노이즈 록, 재패노이즈, Lo-Fi, 레트로 열풍은 처리되지 않은 잡음이 미적임을 지지한다. 그러나 여기서 보다 신비로운 지점은 노이즈 그마저도 불완전한, 아니 불확정적인 면모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노이즈란 매끄러움은 거부하면서도 요소라기보다 존재다. Lo-Fi나 레트로의 노이즈야 LP나 카세트 같은 레거시 미디어의 구현이라 할지라도 재패노이즈 계열의 음악은 해명하기 어렵다. 난잡한 소음 세례로 구성된 이들 음악은 ‘무엇에 대한 소리’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이 칠판 긁는 소리나 의자 끄는 소리처럼 들린다 해도 유사성의 문제에 그치고 모방에 의한 근거로 나아가지 못한다. 노이즈는 매우 순수하면서 인공적이기도 한 역설의 소리다.
둘째로 소음의 상대성이 있다. 한 공간에 음악을 듣는 사람과 TV를 시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자에게는 후자의 사운드가 소음이고 후자에게는 전자의 사운드가 소음이 된다. 갓난애의 걸음마는 누군가에게 가장 소중한 추억인 동시에 아랫집 수험생에게는 악몽이다. 음악에서도 청자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갈린다. 노이즈의 순수성은 대개 호불호보다 쾌불쾌에 가까운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상술한 라우드니스 워의 경우처럼 시끄러운 것은 대체로 성가시고 때때로 아름답다. (논의를 개별 사례에 적용하면 구체적 분석이 가능할 수는 있다. 나는 이케다 료지의 작품을 여타 노이즈에 비해 좋게 느끼는데, 이것이 곡이 지닌 루프나 전개 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반복되는 음이나 모티브 등은 운율을 형성하는 동시에 서사에 대한 모방으로도 사료된다.)
혹자는 이런 노이즈의 양상에서 과거 초현실주의 운동의 결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또한 대상의 불분명성과 쾌의 상대성이 혼재했다. 그들은 예술로는 독특하게도 무의식의 층위에서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전면으로 요구한 분파기도 하다. 노이즈의 경우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경우 인간의 무의식이 아닌 기계의 무의식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미디를 넘어 AI 작곡이 가능한 시점에 ‘기계의 무의식’이라는 명제의 성립 여부는 대답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거의 두려움에 근접한 기대감으로 기다린다. 이를 통해 앞으로는 현재 노이즈의 불확정성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기술이 특이점에 다가선 때 노이즈는 기계적 합리성과 인간적 비합리성 중 어디에 속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이를테면 AI 시대에 할루시네이션이 장르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