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전진희 인터뷰 : 사계절을 살아낸 손끝에서 시작된 <雨後 uuhu> ①

by overtone | 

고요한 사슴처럼 자신만의 템포로 계절을 응시하다, 풀을 뽑듯 아름다운 순간을 건져 올리는 그녀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지만 애써 덤덤한 목소리로 ‘쓰러짐’에 관한 동의를 구한다. ‘나의 연약함이 나를 이길 때 쓰러져도 괜찮나요? 사실 난 이제 버틸 힘이 없는 것 같아요…’

이어지는 ‘우후’ 허밍은 우산 없이 맞는 비처럼 머리를 적시고, 피아노는 포슬눈에 한 걸음을 내딛기 조심스러운 밤길처럼 겨울의 입김을 일으킨다. 날 것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호흡까지 살려 표현한 진짜 예술가가 건넨 ‘공감의 손끝’에 빗장이 풀린다. 이윽고 얻게 되는 건 마음의 안식이다.

‘숨을 연주하는 손’을 가진 전진희를 만났다. 2010년대 인디씬을 차분하게 관통해 온 고요하지만 단단한 사람. 그룹 하비누아주로 2016년 ‘한국대중음악상’까지 오른 성실한 뮤지션이자, 자신의 콘서트 무대에 밴드와 그랜드 피아노, 스트링 퀄텟을 한데 올려 연주와 연출까지 모두 해내는 전방위적인 음악가. 서울 동교동 작업실은 초록색 포인트 인테리어에 사카모토 류이치, 키스 자렛 등의 조각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어 편안하면서도 이지적인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갓 나온 테이프 굿즈를 조심스레 내밀며 “타이밍 좋으시네요”라고 말하는 전진희는 홀로 모든 것을 관장하며 우뚝 선 다정한 프론티어처럼 보였다.

전진희 인터뷰 : 사계절을 살아낸 손끝에서 시작된 <雨後 uuhu> ① main image▴ 정규 6집 <雨後 uuhu> 앨범 사진. 출처 : 본인 제공

Part 1. 우후

- 이번 앨범 <雨後 uuhu>를 만든 계기가 궁금해요.

“강아솔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됐어요. 제가 <아무도 모르게>(2023)을 발매할 때쯤에 앨범 제목에 대해서 고민하던 중, 이 친구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 ‘우후 어때?’하는 거예요. 자기가 지금 ‘주술회전’을 보다가 ‘우후’라고 소리 지르는 대목을 봤는데 그 말이 ‘비 온 뒤’를 뜻한다면서, 잘 어울리지 않겠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앨범에는 ‘비’와 관련된 내용이 없어서 ‘언젠가 하게 되겠지’라며 고맙다고 하고 말았는데, <아무도 모르게> 발매 후에 문득 제가 몇 년 전 비 온 뒤에 써놓은 곡이 갑자기 떠오르는 거예요. 다음 앨범은 ‘우후’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비 온 뒤의 장면을 그려내며 시작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 그때 그 곡이 ‘雨後 after rain’인가요?

“네 맞아요.”

- ‘雨後 after rain’은 처음에 딱 주제만 잡아두신 상태였나요?

“벌스(Verse) 8마디만 있던 상태였어요. 그냥 영상으로 짧게 찍어놓은 상황에서 ‘우후’라는 제목을 붙이고 끝까지 정리를 해봤죠.”

- 작업하실 때 피아노 즉흥 연주를 비디오로 촬영을 해두시나 봐요.

“스케치는 거의 그런 식으로 시작해요. 비디오나 음성 메모로요.”

그녀의 결과물은 클래식이나 작업 방식은 즉흥 연주 기반의 재즈에 가까웠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음표를 새기며 무의식을 단절하기보다 그 과정마저 과감히 생략하고 ‘날 것’의 흐름을 따르는, 그래서 이후에 다시 악보로 하나하나 옮기는 고단함을 감수했기에, 인위적이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의 음악이 나올 수 있었다.

- 항상 피아노를 중심으로 곡 작업을 하셨는데 이번에는 약간 현악기의 비중이 높아졌어요. 아까 말씀하신 ‘현악기에 관심이 생겼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걸까요?

“네. 좀 더 장면에 집중하자는 생각이었어요. 그전까지는 제가 피아노 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표현하자는 생각이었다면 이제는 정말 ‘어떤 장면’을 표현하고 싶다.”

- 어떤 장면일까요?

“어느 날 오후에 비가 온 뒤 세상이 다 젖어 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꽃봉오리가 막 피어오르는 순간을 떠올렸어요. 그 소생하는 듯한 느낌, 그런 장면을 좀 표현해 보려고 했어요.”

앞선 ‘雨後 after rain’의 2분 11초경 등장하는 전환부에서도 꽃이 피어나는 순간의 적막함, 축축한 대지와 이 세상과의 사이에서 무언가가 탁 움트는 그런 장면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 그 소생하는 느낌이 스트링 사운드와 맞닿아 있을까요? ‘그럼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에 나오는.

“그런 것 같아요. 참 희한하게도 이번 앨범 프로듀서인 우메바야시 타로(Umebayashi Taro)도 편곡을 다 해서 보내면서 ‘꽃이 피어나는 장면을 표현했어요’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설명 안 했거든요. 그래서 너무 신기해요.”

첫 트랙부터 피어오르는 현악기의 생명력이 ‘비 온 뒤’라는 앨범 제목과 맞아떨어지면서 맺히는 상 같은 게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아노 앨범이겠거니’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처음부터 들려오는 스트링 사운드는 소위 말해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느낌. 물론 긍정적인 의미이다.

- 우메바야시 타로와 어떻게 작업하게 되셨나요?

“이메일을 보냈어요. ‘우후’라는 주제로 곡을 모으면서 스트링을 반주 스트링이 아닌 (피아노와) 같이 가는 그림으로 넣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던 찰나에 벨로주 박정용 대표님을 만났는데 ‘아오바 이치코 들어봤어?’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스트링과 함께하는 라이브 앨범을 추천해 주셨어요. <Ichiko Aoba with 12 Ensemble (Live at Milton Court)>(2023) 앨범이었는데, 집에 가서 듣자마자 열 번을 넘게 돌려 들었던 기억이 나요. 너무 아름다워서 자꾸만 숨을 멈추게 되더라고요.

현악기의 편곡이라든지 그림이라든지. 제가 들어봤던 현악기의 연주와 갭이 느껴지는 연주였어요.

그래서 약간 질투가 났죠. 아오바 이치코라는 사람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음악가로서. 갑자기 좌절했다가 다시 한번 크레딧을 찾아봤어요. 오디오는 누가 했고, 믹싱은 누가 했고 하면서. 찾아보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편곡자가 따로 있는 거예요. ‘중요한 사람이 따로 있었구나’ 해서 그때부터 막 찾기 시작했어요. 홈페이지 찾고, 인스타그램 찾고. 그러고서 그다음 날 바로 메일을 보낸 거죠. 고민도 안 하고. 그 분께서 바로 하겠다고 답장하셨어요.”

우연의 연속은 운명이었던 걸까. 될 일은 으레 일사천리로 된다. 놀라운 실행력과 자신의 직감에 대한 신뢰가 뒷받침된다면.

- 우메바야시 타로의 특별한 반응 같은 게 있었나요?

“데모를 ‘雨後 uuhu’와 ‘그럼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두 곡을 보냈는데 답장에 감탄의 내용이 많았던 기억이 나요. 피아노 한 대인데 이렇게 섬세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놀랍다는 내용의. ‘이 곡들 위에 스트링 편곡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며 대단한 자신감을 메일에 적어 보내주셔서 제가 그걸 캡처해서 읽고 또 읽고···.”

- 현악기와 피아노를 따로 녹음하신 후 붙이실 때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전혀 어렵지 않았고요. 그분(우메바야시 타로)이 저한테 완성된 피아노 녹음 음원을 달라고 하셨어요. 그 소리를 듣고 편곡하고 싶다고. 보통은 안 그렇거든요. 가상악기로 편곡을 완성하고, 그 이후에 본 녹음을 진행하곤 하는데.”

- 그럼 어떻게 녹음해야 하나요?

“피아노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먼저 정해놓고 해야 하는 거죠. 그래서 3월에 윤정오 감독님과 함께 상의했어요. 표현하고자 했던 장면이 너무 명확하다 보니까 공간감이나 질감, 물성 같은게 잘 느껴져야 할 것 같아서, 좁은 공간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를 좀 더 넓은 공간으로 빼서 공간을 일부러 더 만들고, 마이킹도 그런 식으로 조절해서 환경을 다 만들어 놓은 다음에 제가 연주했어요.”

- 소리를 찾기까지 세팅을 바꾸신 거예요?

“윤정오 감독님께서 되게 이런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높으시고 애정이 매우 많으세요. 또 제 음악을 좋아해 주셨기에 사실 그 작업은 어렵진 않았어요. 제가 어떻게 연주하느냐가 중요했죠. 왜냐하면 (환경이) 너무 예민해져 있으니까. 이미 믹스를 해놓은 상태로 피아노를 치는 거니까.

터치가 조금만 세져도 날카로운 소리가 나서 공간과 질감을 아주 예민하게 들으면서 연주하다 보니, 평소에 쓰는 터치의 10분의 1, 2 정도만 써야 해서 녹음이 까다로웠어요.”

- 엄청 고생스러우셨네요.

“고생해서 보냈더니 피아노 연주와 소리가 무척 마음에 든다고 하시더라고요.”

한국에서 스트링을 녹음하는 과정에서는 힘들었다고 한다. 템포에 맞춰서 연주한 게 아니기 때문에, 피아노의 호흡을 스트링 연주자가 읽어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다고. 그래서 직접 지휘했고, 5월에 <JEONJINHEE PIANO 雨後> 공연을 하면서 호흡이 생겼다는 설명이었다. 이제는 한 몸이 되었다는 후문.

전진희 인터뷰 : 사계절을 살아낸 손끝에서 시작된 <雨後 uuhu> ① image2▴ 전진희 단독 콘서트 <여름밤에 우리> 스틸컷. 출처 : weete

- 주변에서 이번 앨범을 듣고 ‘아오바 이치코’, ‘사카모토 류이치’를 연상하는 이유는 뭘까요?

“작년에 디스크 유니온이라는 일본 레코드 샵에서 <아무도 모르게>를 매입하고 싶다고 먼저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쎄 프로젝트를 통해서 앨범을 디스크 유니온으로 보내드리고 판매를 시작했어요. 일 년 뒤 3월에 그 레코드 샵에서 열린 팝업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30~40명이 넘는 일본 팬분들이 공간을 가득 채워 주셨어요. 그래서 ‘이분들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공연을 마치고 작게 사인회를 했는데, 일본어로 적힌 메시지를 직접 보여주기도 하시고, 빼곡히 적힌 편지를 주시기도 하더라고요. 그때 받았던 편지들을 읽고 나니 ‘언어가 달라도 이렇게 큰 공감과 사랑을 받을 수 있구나. 신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또 제가 만든 음악들이 그 나라의 정서와 뭔가 통하는 게 있는지 생각하기도 했고요. 얼마 전에는 도쿄 TV에서 연락이 와서 드라마 음악을 작업하고 있어요.”

- 끌어당기는 정서가 있나 보네요.

“저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에는 미니멀한 피아노 연주를 비교적 심플한 작법으로 표현하는 정서가 아직은 많지 않아서,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납작한 시선으로 보면 동양풍의 뉴에이지스러운 편곡과 작법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 안에서 그렇게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저 같은 카테고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 ‘여린 빛’ 트랙 순서가 흥미로웠거든요.

“계절을 의도하고 쓰진 않았는데 곡을 모아놓고 보니 사계절이 있더라고요. 그중에 ‘여린 빛’은 앨범 작업 가장 마지막에 다다라서 쓴 곡이었어요. ‘내가 결국 이 앨범을 통해 얘기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하고 생각해 보니, 비가 내리던 마음을 겪어내고 우후(雨後)에 여리게 비추는 빛 속에서 사랑을 붙잡고 살아내는 제가 보였죠. 그 빛은 서늘하고 따스한 가을빛 같았어요. 그래서 가을이 오는 순서에 넣게 되었지요.

사랑을 생각하면 ‘힘들었던 과정이라든지, 그런 슬픔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린 빛에 잠겨도 괜찮을 것 같다고 얘기한 건데. 초안은 ‘죽어도’였거든요.”

- ‘죽어도’요.

“그래도 사랑이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 욕심이나 이런 여러 가지 감정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쓰게 된 곡이었어요.”

- 그 트랙 전까지 클래시컬하게 흘러가다가, 발라드 트랙이 나오는 게 너무 흥미로웠어요.

“저도 그래서 ‘여린 빛’이랑 ‘괜찮나요’ 때문에 ‘크로스 오버 클래식’이라는 장르로 구분이 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앞서 활동하시는 아티스트분들 중에도 노래 곡들이 앨범에 있지만 크로스오버 클래식의 장르로 구분되는 경우들을 본 적이 있어서 제 앨범도 그 장르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어요. 발매 이후에 애플 클래식에 들어가게 된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회사가 있었다면 넣지 말라고 했을 거예요. 여러 가지 이면이 있으니까. 근데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고 앨범의 메시지가 분명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 ‘괜찮나요’는 겨울의 느낌인가요?

“저의 어두운 면이 ‘괜찮나요’에 다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음악을 계속하면서 성장하고, 또 책임감도 생기고 포용하는 마음이 생긴 과정이 다 담긴 게 저는 <雨後 uuhu> 같거든요. 그래서 이 트랙은 겨울이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되게 차갑고 시리고 어두운 겨울.”

- ‘20250511 Intro - Live’ 트랙에서 ‘Breathing in Apil’을 다시 연주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4월을 연주할 때마다 너무 ‘안김 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개별적으로 애정하고 있었는데요. 사실 <Breathing>은 순간순간 손가는 대로만 만든 음악이라서 들을 때마다 조금 부끄럽긴 해요. 그래서 공연 때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안아보자’라는 생각을 하며 편곡을 열심히 했어요. 5월 11일에 연 <JEONJINHEE PIANO 雨後> 공연에 인트로로 들려드리게 되었죠.

그 곡은 사실 제가 할머니 묘지에 다녀와서 쓴 곡인데요, 제가 2020년에 아끼는 강아지를 안고서 같이 다녀왔어요. 그날이 뭔가 좀 좋았어요. 4월이었고,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안고서 가장 사랑했던 존재를 만나러 갔다 오는. 삶도 있고, 죽음도 있고, 그 안에서 또 안김을 당하는 것 같은 곡이어서요.”

- 라이브 트랙을 수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그 트랙들을 보너스 트랙으로 넣었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계시는데. 설명을 자세히 하자면, 제가 5월에 공연을 마치고 태어나 처음으로 ‘나 은퇴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 명공연이었나 보네요.

“네. 항상 공연이 끝나면 아무리 열심히 했더라도 후회가 남고, 그냥 내가 잘하고 이런 걸 떠나서 너무 허무하고, 공허하고, 이런 감정이 큰데. 그 공연은 음악가로서 정말 모든 것이 충만해지는 경험을 했어요. 음악하면서 이런 경험을 했다면 이제는 된 것 같다. 생각이 들었죠.

그러고 녹음본을 다 들었는데, 이게 진짜 ‘우후(雨後)’구나.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JEONJINHEE PIANO 雨後> 공연은 폐공장에서 진행됐다. 층고가 높아서 형성된 ‘대성당’ 같은 소리. 리버브가 하나도 걸리지 않은 천연의 소리가 고스란히 담겼다. 유튜브에 전체 영상이 공개됐다.

- 그럼 봄, 여름, 가을, 겨울, 또다시 봄(4월), 여름(6월). 계절의 순환이네요.

“맞아요. 저는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결국 계속 그렇게 돌아오니까요.”

* * *

Part 2. 피아노와 계절

- 피아노로 작업하실 때, 순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연주를 하시나요? 아니면 필요한 장면을 떠올리며 영감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곡을 쓰시나요?

“전자인 것 같아요. 그냥 비 온 다음 날이니까 앉아서 피아노치고, 봄이 시작되는 때니까 또다시 피아노치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찰나인 것 같으니까 피아노 치는. 항상 이런 식이었어요.
진짜 자연스럽게. 억지로 뭐 하는 걸 잘 못해서요. 그리고 너무 억지스럽게 만든 게 과연 맞나? 이런 생각이 좀 들어요.

‘정말 본능에 맡겨서 나와야지만 이게 진짜로 내 것이다’라는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 트랙별로 어떤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쓰셨는지요? ‘summer to fall’은 특정 장면이 있나요?

“여름에서 가을 같은 경우는 되게 짧잖아요. 거의 8월 마지막 주부터 9월 첫 주까지인데. 제가 딱 너무 좋아하는 때인 것 같아요. 여름이 너무 지긋지긋하잖아요.

언제 끝나나. (연애로 비유하자면) 진짜 너무 얘랑 헤어지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갑자기 인사도 없이 가버린 느낌. 그래서 갑자기 마음의 한편이 확 사라진 것 같은 공허함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 2주 동안에.”

영화 <500일의 썸머>를 보듯 계절과 사랑을 메타포로 잇는 감각이 인상 깊었다. 정규 2집에 수록된 ‘우리의 사랑은 여름이었지’(2019), EP <Summer, night>에 수록된 ‘여름밤에 우리 (feat. Wave to earth)’(2021)가 그렇듯 봄, 여름과 같은 계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것은 섬세하게 변화의 흐름을 느끼며 일기를 쓰듯이 피아노로 표현하는 습관 때문이리라.

“사실 여름이 되면 음악가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정말 우리는 여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까. 한 2~3개월 동안에 다른 음악가들은 누구보다 여름이 메인인데, 저와 같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진짜 조용히 있어요.

피드에 올라오는 뉴스를 보면서 ‘멋있다’ 하다가도 ‘우린 안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며 이면적인 부분들을 자꾸 떠올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름이 어떤 뜨거운 게 확 꺼지고서 식어가는 밤이라든지, 또 여름에 아침이 굉장히 적막하고 시원하거든요. 또는 장마 때. 이런 때는 ‘제가 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떤 집착이 시작된 게 아닌가.”

올해도 노들섬에서 성료한 콘서트 <여름밤에 우리>는 그녀의 말마따나 ‘관객의 집중도가 상당한’ 공연이었다. 마치 전진희와 관객의 감정선의 싱크로율이 일치하듯 상당한 텐션이 느껴졌던 현장 분위기. 우스갯소리로 ‘교회 같다’는 그녀 친구들의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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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6집 <雨後 uuhu> 앨범 사진. 출처 : 본인 제공

- 일본 롤링 스톤지 인터뷰를 보니 김광민 선생님께 사사 받으셨더라고요. 어떠셨나요?

“정말 무서우세요. 레슨을 받지 않는 다른 학생들에게는 수업하실 때 굉장히 재미있으세요. 항상 허허 웃으시고 하시는데 레슨만 되면 눈빛이 돌변하셔서. (웃음) 같은 곡을 여러 명에게 똑같이 내주세요. 1대 1도 아니에요. (그룹 레슨이라) 돌아가면서 같은 곡을 쳐야 하는데. 한 주에 한 곡씩 편곡해서 치거든요. 그러니까 비교가 너무 적나라하게 되고.

그래서 저는 선생님 덕분에 남들은 좀 헐렁하게 보내는 대학 생활을 그렇게 못 보냈고요. 무서워서. 그때는 제가 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데 선생님 입에서 ‘아름답다’는 얘기가 나와야 하는 거예요.

둘 중에 하나거든요. ‘넌 똥이 묻었는데 똥이 묻었는지 몰라’거나, 아니면 ‘아름다워’, ‘우주로 갔어.’ 이렇게. 긴 말씀도 안 하세요.

그럼 저는 그 똥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똥이 묻지 않기 위해서 그러면서 대학 생활 내내 ‘그 똥이 뭘까….’ 고민하다가 4학년 때쯤 되면 선생님이랑도 가까워지고 친해지고 하면서 그때는 선생님께서 많은 얘기를 해주시죠.

‘선생님. 곡 잘 쓰고 싶은데요.’ 그랬더니 ‘피아노 잘 치면 돼.’라고 하시고.”

- 너무 당연한 말인데 임팩트가 있네요.

“‘저 노래해도 될까요?’ 그렇게 여쭤보면 ‘노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야.’ 라던지. ‘우리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해도 되는 게 노래야.’라고 얘기를 하시는데. 되게 헐렁헐렁 말씀하시거든요. 근데 그 얘기가 영원히 남아 있어요. ‘맞지. 노래는 아무나 하는 거지.’ ‘곡은 피아노 잘 치면 되는 거지.’ ‘피아노 잘 친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고. 항상 그 마음의 중심에 사랑이 있어야 하고.’ 정말 그런 얘기를 항상 하시는데, 그 추상적인 이야기를 내내 붙들고 살게끔 만드세요.”

- 고민은 학생이 하고요.

“네. 그거에 대한 답은 연주를 직접 보여주시고, 음악을 들려주시는 게 전부였던 것 같은데, 지나고 보니 제가 선생님을 못 만났다면 ‘이렇게까지 섬세한 음악을 했을까’라는 생각은 해요.”

- 완전 하드 트레이닝이네요.

“맞아요.”

- 가르치실 때는 혹시 어떻게 하시나요? (그녀는 현재 실용음악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도 호랑이 선생님인 것 같아요.”

선생님 모드를 떠올리는 순간, 정말로 그녀의 눈빛이 조금은 매섭게 변했다.

“제가 찾아 헤맨 시간과 노력 끝에도 아직 답을 못 찾은 것 같은데, 고민과 좌절했던 시간이 있어서 그나마 성장했던 것 같은데, 그것들을 겪어내는 시간을 외면하는 걸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크죠.”

- 학생들이 엄청나게 무서워하나요?

“엄청나진 않지만, 그래도 무섭긴 하겠죠. 자꾸 잔소리하니깐···.”

- 나중에 가면 또 영원히 남아 있을까요?

“네. 그럴 거라 믿어요. 제가 김광민 교수님의 단호한 가르침 안에서 천천히 성장할 수 있었듯이.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나서도 그 가르침을 붙잡고 살고 있듯이. 제가 만난 수많은 학생 중에 아주 소수라도 그런 성장과 마음을 언젠가 느낄 수 있길 바라고 있죠.”

- 피아노는 언제부터 이렇게 쭉 지금까지 연주하고 계신가요?

“4살 때부터 쳤는데요. 사실 막 집이 그렇게 부유하지 않고 가난했어서, 그렇게 고차원적인 좋은 레슨 같은 건 받지 못했어요. 집이 말 그대로 망해버려서 피아노도 팔아야 하고 이런 상황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교회가 제 곁에 있었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늘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고. 귀가 좀 좋았었는지 어린 나이 때부터 반주를 오래 해서 교회가 저를 키운 것 같아요.”

- 들으면 바로 캐치하시나요?

“저는 어려서부터 반주를 잘했던 것 같아요. 예닐곱 살 때쯤 TV에서 흘러나오는 애국가에 반주를 만들어서 쳤대요.”

- 혹시 피아노에 의지를 하셨던 경험 같은 게 있나요?

“어렸을 때부터 집이 망하거나 힘들거나 그랬을 때도 저는 다른 거 안 하고 피아노만 쳤거든요. 그게 그냥 뭔가 해소되는 느낌이 들고 마음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편안한 언어를 찾은 것 같은. 수식어를 붙여서 설명하지 않아도 설명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다음 회차(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