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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보다 푸른 금빛 성장기, 파란노을의 <Sky Hundred>

by 이승원 | 

cover image of 파란노을 <Sky Hundred>
파란노을 <Sky Hundred>Self-released

말 그대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서울 어딘가, 방 한구석에서 빚어진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의 파란이 특유의 아마추어리즘 미학을 무기로 세계 곳곳에 물살을 뻗으면서 국내부터 지구 반대편까지 수많은 리스너들이 그의 추종자를 자처했고, 무명의 은둔 음악가 파란노을은 그렇게 단숨에 슈게이즈(Shoegaze)와 이모(Emo) 장르는 물론 인디 록 씬 전반을 상징하는 존재로 부상했다. 인디 뮤지션 대부분이 막연히 꿈꿀 만한, 한 편의 만화 같은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자칭 ‘찐따무직백수모쏠아싸병신새끼, 사회부적응 골방외톨이’(‘청춘반란’ 中)에겐 이 기대의 파도가 너무 거대했던 모양. “락스타가 되고 싶었어”(‘청춘반란’ 中)라며 울부짖던 그는 눈 앞에 놓인 컬트적 지위를 잠시 외면했고, 대신 멀리 돌아가기를 택했다. 홀로 은신하거나 군림하기보다 여러 아티스트와의 작업 및 공연에 힘쓰며 스스로 가진 양분을 주변에 공유한 것이다.

씬을 위해서였는지 혹은 막중한 부담을 덜어내기 위해서였는지는 명확지 않지만, 파란노을은 이러한 연대와 화합을 통해 예술적 자아의 확장뿐 아니라 아티스트 본연의 인격적 성장까지 이룰 수 있었다. 혼자 힘으로 쌓아 올리던 이전과 달리 다양한 조력자들을 초빙하여 사실상의 소포모어 징크스를 돌파하는가 하면(<After The Magic>), 방구석에 은둔하던 과거를 벗어나 큰 무대 위에서 관중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기까지. 누군가에겐 작은 발걸음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티스트 본인에겐 무척 무거웠을 발돋움이었다.

<After The Magic>의 후속작이자 그의 4번째 솔로 정규작인 이번 <Sky Hundred>는 이 굳센 도약과도 같은 작품이다. 주변과 손을 맞잡으며 덜어낸, 그럼에도 거대한 기대와 열광의 물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인격적, 음악적으로 성장한 자신과 성장 그 자체를 거칠고도 찬란한 소리로 승화시킨다.

우선 주목할 지점은 소리를 대하는 태도다. 전작 <After The Magic>의 음악적 정제를 비로소 체화함으로써 본연의 격정을 맘껏 뽐내면서도 비교적 부드럽고 섭취하기 편안한 색채를 조성한다. 자신 있게 전진 배치된 보컬은 덤. 감정과 소리에 끌려 나온다는 인상이 강하던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에서의 보컬 구성과 달리 모든 음향적 요소가 함께 발맞춰 달려가는 양상을 그린 본작은 폭발적 성향에도 불구, 그 구조가 상당히 안정적이다.

표현이 이토록 원숙해진 데에는 각 악기를 얹어내는 솜씨의 발전이 주요하게 작용한다. 블랙 컨트리 뉴 로드(Black Country, New Road)나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의 챔버 팝(Chamber Pop)처럼 악기마다의 존재감과 질감을 강조, 점층의 구성적 특징을 수용하였기에 노이즈에서 오는 불안정성의 쾌감을 조금 내어줬음에도 작품엔 사운드 자체의 서사적 쾌감이 가득하다. ‘시계’에서의 활용은 이러한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난 지점. 반복되는 피아노 선율로 콜드플레이(Coldplay)나 킨(Keane)이 가지는 정서적, 음향적 특징을 끌어오면서도 특유의 노이즈 발산을 유지하고 이에 점층적 구조까지 더해 벅차오르는 듯한 감정선을 그려낸다.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이 감정의 분출이라면 본작은 정제된 표현인 셈.

성숙미를 더한 작법에 맞춰 언어 표현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어른스러운 모습이다.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의 염세와 패배주의는 사춘기의 방황이었다는 듯 “고통이 없으면 행복도 없어”(‘고통없이’ 中), “꿈과 야망이 보이는 자들이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히 느껴졌을까”(‘주마등’ 中)의 발전적 태도와 “남이 내게 보여준 진심을 그대로 돌려줄 수 있도록”(‘Maybe Somewhere’ 中)에서 보이는 따뜻한 모습은 자연스레 “익숙함에 홀려 소중함을 잃었네 /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아”(‘시계’ 中)와 같은 진지한 자아 성찰로 이어진다.

이처럼 듣는 이를 화자의 감정에 적극적으로 초대하는 작품은 끝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이렇게 묻는다. “내게 푸름을 없애면 그대 무얼 보려나”(‘환상’ 中). 마지막에 와서야 파란노을은 청자와 비로소 눈을 맞추고는 지금까지 정말 잘해왔노라고, 그 부담감을 멋지게 이겨냈왔노라고, 그 한마디 대답을 우리에게 간곡히 청원한다. 허나 우상을 직접 초빙하여 스스로를 달랜 <독립음악>의 최엘비가 그랬듯 해답을 내놓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의 파랑이 없어도 청춘의 푸름은 영원할 것이라는 <Sky Hundred>의 전언(傳言)과 함께, 백 번 바라본 하늘 끝에 황금빛 해가 뜨는 순간, 파랑보다 푸른 햇빛이 눈부시게 땅으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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