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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니 <숨쉬기 운동>

by 최이은|

cover image of 최제니 <숨쉬기 운동>
최제니 <숨쉬기 운동>Self-released

…포크는 처음부터 이랬을까? 기타를 치고 거리를 누비는 음유시인과 캠프파이어를 둘러싸고 연주하는 우쿨렐레는 근래 포크가 보인 정서와 조금 다를지 모르겠다. 과거 그들은 분명하게 노래라고 할 만한 것을 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는 음악 중 가장 노래라고 하는 행위에 심취해 있는 듯한 곡은 사이먼 앤 가펑클의 ‘I Am a Rock’과 같은 것인데, 그들 음악은 난관 속에서도 희망차고, 감동적이고, 또 즐겁다. 가창에서 삶에 대한 긍정과 자신이 느껴진다. 반면 라디오헤드가 ‘No Surprises’에서 들려주는 노래와 엘리엇 스미스가 ‘Everything Means Nothing To Me’에서 뱉는 가사는 너무 무력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전환점은 확실히 얼터너티브 세대였다. 그와 동시에 열린 21세기 음악의 모든 읊조림은 아직 그 자장 안에 있다. 모든 가수가 자신의 음울과 싸우는 중이다.

최제니의 <숨쉬기 운동>은 제목부터 묘한 무력감을 암시하지만, 다소 쨍한 색감의 커버 탓에 이게 정말 호흡을 희망차게 긍정하는 고전적 포크 류에 속하나 의심이 들곤 한다. 노래조차 이런 중첩적 인상을 안고 가기라도 하겠다는 듯 모호하다. 가사를 쓴 사람은 허무를 알고 있는 눈치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떠나갈 거고 나도 언젠간 이 골목을 떠나버리겠지”(‘알지?’ 中), “세상은 우리가 들고 갈 수 없는 것들 투성이”(‘기억속으로’ 中), “아무것도 알 수 없네 나는 모든 걸 포기했네”(‘연습중’ 中), “영원히 알지 못할 마음들이 있다는 게 나는 불편하네”(‘진심’ 中). 하지만 곡의 후반에 이르면 꼬박꼬박 의지를 남겨 놓는다. “그냥 살아가려고 하네”(‘연습중’ 中), “숨을 한 번 쉬어 봐”(‘숨쉬기 운동’ 中), “그리고 남은 건 진심이네”(‘진심’ 中). 최제니의 포크는 포크에서 가장 먼 곳을 반환해 다시 포크로 향하는 과정인가? 외연적으로도 노래라기에 지나치게 말과 같고 그렇다고 장기하의 랩에 비하면 꽤나 노래 같은 소위 얼터너티브스러운 가창은 장르와의 인연을 끝내 놓지 않는다.

음반은 우선 “잊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알지?’ 中)이며, “내 힘으로 하고 싶어도 내 뜻대로 되는 건 없”(‘안정권’ 中)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매일 인사했던 이웃이 어느 날 하늘나라로”(‘연습중’ 中) 가는 순간 앞에서 삶의 의미를 운운하는 일은 대개 신학적 장난처럼 들린다. 그런데도 “오늘의 맡겨진 일을 해야”(‘연습중’ 中) 하고 “누군가에게 간절한 꿈일 수”(‘숨쉬기 운동’ 中) 있는 생은 절연하기에는 너무 무서운 놈이다. 이제 세상은 무의미가 폭로되었음에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마피아 같은 자태다. 와중에 최제니의 소심한 희망이 동일시되는 대상은 몇 없는 등장인물 중 유별나게 자주 나타나는 ‘너’다. 2025년 발매한 첫 번째 앨범 <나 원래 웃긴 사람인데>는 <숨쉬기 운동>과 맥락을 공유하면서도 유난히 사랑 노래 같은 지점이 많다. ‘너’는 내가 다시 웃긴 사람이 돼야 할 이유이자 노래를 바치는 대상이고 또 안부를 묻고자 하는 사람이다. 당연하게도 연인처럼 비치는 ‘너’는 “웃기고 싶”다던가(‘나 원래 웃긴 사람인데’ 中) “응원한다”던가(‘아침’ 中) “불쌍해” 보인다던가(‘미운정’ 中) “자존심 상”하게 만드는(‘쿨하게’ 中) 많은 수식 이상으로는 묘사되지 않는다. 이 사람이 지금 화자와 연인 관계에 있는지, 어떤 관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맺고 있는지에 대한 단서는 전무하다. ‘너’는 두 앨범 안에서 최제니의 독백에 얽힌 존재로 남고 어떠한 직접적인 이야기나 풍경도 드러내지 않는다.

‘너’라는 대상이 지닌 이런 투명함은 그 자리를 어딘가 공란처럼 보이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너’라는 2인칭 대명사는 세상의 모든 타인을 위한 자리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면 음악의 애정이 향하는 방향이 모든 청자에게 향하므로 박애적인 측면이 있다. 이보다 음반을 더 달콤하게 읽는 법도 존재하는데, ‘알지?’에서 “너도 내 맘 잘 알지?”라거나 ‘안정권’에서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라며 연신 너와 나를 묶어내려는 움직임에서 알 수 있듯 ‘너’의 자리에 자신을 기입하는 법이다. 우리가 갈구하는 대상인 ‘너’는 2024년 싱글인 ‘타협점과 침묵의 집’의 앨범 커버와 노래 가사 속 “저 과거에 있는 어리둥절한 어린아이”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고, 또 분명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최제니는 또한 ‘최선을 다해’의 곡 소개에 “최선을 다하길 바라는 사람에게 보내주세요. 그게 타인 혹은 자신이 될 수 있겠죠.”라고 적었다. 발라드 음악에서 줄곧 그러하듯 우리가 울부짖고 호소하는 대상은 물론 대상이라는 합의된 정의에 따라 자연스레 ‘너’로 이어지기 마련이지만, 음울과 무의미 속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잃게 만드는 현대에는 우선 대상의 자리에 스스로를 놓는 방법을 알아야 할지 모른다. ‘숨쉬기 운동’에서 헐떡이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는 대상, ‘진심’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줄 용서와 사랑의 대상, ‘알지?’와 ‘안정권’에서 나와 같은 마음이길 바라는 대상은 타인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이 될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그곳이 우리 각자의 ‘타협점’이자 ‘저녁’이고 ‘보금자리’이며 ‘진심’인 등 모든 노래의 자리가 아닐까. ‘너’와 ‘나’의 글자가 겨우 한 끗 차이라는 건 되게 신비롭고 좋은 일이다. 멀리서 보면 운 좋게 잘못 읽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