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식이 무한을 통과하면 우아함이 되돌아옵니다. 우아함은 의식이 없거나 무한한 의식을 가진 인간의 육체로, 그러니까 인형 또는 신에게서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죠.”
“그렇다면” 나는 약간 혼란스러워하면서 말했다. “우리가 순진무구한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 인식의 열매를 다시 먹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맞아요.” 그가 대답했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인형극에 관하여] 중에서
앨범을 듣는 동안 피노키오 속 제페토 노인이 떠올랐다. 작중에서 물고기나 고양이에게도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오르골을 작동시킬 때나 인형을 만들 때도 유머를 잃지 않는 그가. 인형이 아이가 되는 황당한 순간에도 사랑으로 보듬어주는 자상한 손길이 음악을 연주하면 이런 느낌일 테다. 시간이 퇴적되어 불어난 무한한 의식이 우아한 소리를 낳았다. 수년만의 신작은 그가 쌓은 지혜의 산물이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벨과 신디사이저, 기타 등 여러 연주의 조화 속에 “We are mothers” 라는 가사가 반복적으로 불리우는 ‘Note of Mothership’이 대표적이다. LP를 재생하는 어느 곳에나 흔하게 걸려 있는 시티팝 대표 합작 <PACIFIC>이나 국내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 등을 프로듀싱했던 이력 때문인지 타인의 목소리를 사용하는 데는 도가 텄다. 음성 하나하나의 특징, 그로 인해 와닿는 감정을 잘 파악해 3분 안에 면밀하게 배치한다. 순수한 웃음과 시계 초침의 움직임 뒤 발화하는 여성의 노래는 상세한 서술 없이도 책 한 권의 두터운 맥락을 지녔다. 아이에게 노래를 알려주는 장면이나 초원에서 함께 노는 모습처럼 여러 단상이 스칠 만큼 상상력은 열어두지만 그 모든 씬이 따스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음악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물음에 현명한 답을 제시한다.
호소노 하루오미의 음악 궤적과 인생이 음반에 투영돼 있다. 탄생의 찬미와 기품이 넘치는 ‘Note of Mothership’이 그의 생일에 맞춰 발매됐던 점을 고려하면, 인생의 출발점으로 해석하기 충분하다. 이후 미국 두왑 보컬 그룹인 문글로우즈(The Moonglows)의 1954년 곡 ‘Sincerely’를 어쿠스틱 음악으로 재해석한 동명의 곡은 듣는 사람에서 뮤지션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압축했다. 부르고, 바꿔 보다가 만드는 자작곡. ‘Ayurveda’는 1973년 첫 솔로 음반 속 ‘恋は桃色(사랑은 복숭앗빛)’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의 순간을 빛과 색에 빗댄 가사의 유사성과 포크를 기반으로 한 점이 그렇다. 물론 과거가 스친다고 해도, 이 곡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안목을 담고 있다. 이랑과 협업한 적 있는 카쿠도 마나미, 하라다 이쿠코가 코러스로 참여해 이리저리 횡단하는 공간감 사이 안정감을 더한다. 이렇듯 면밀한 배치에서 감상자와 창작자로서 깊이 관찰한 내공이 다시금 느껴진다.
M으로 시작하는 단어를 나열하는 ‘M for Mandala’와 3음절씩 끊어 발음하는 사이 타악기 리듬이 팽배한 ‘Rojiura (Walking Vibration)’은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YMO), 타카하시 유키히로와 결성한 유닛 스케치 쇼(SKETCH SHOW)가 연상된다. 특히 끊어 치는 가창 스타일과 리듬감에 집중한 연주가 흐르는 스케치 쇼 2002년 곡 ‘Wonderful To Me’를 닮았다. 앞서 언급한 두 팀이 전자음악에서 펼친 퍼포먼스를 고스란히 자연적인 작법으로 바꾼 듯 보인다. (본작의 발매 일주일 후, 스케치 쇼 ‘Stella’를 본작의 방식으로 리메이크한 보너스 트랙을 수록하기도 했다.) 전자음악적 작풍과 자연에서 발췌한 소리의 융합이 시간의 흔적을 매만지게 한다. 뮤지션 U-Zhaan의 타블라 연주가 담긴 ‘M for Mandala’와 자갈밭을 즈려밟는 듯한 풍성한 타악 ‘Rojiura (Walking Vibration)’에서 여러 장르를 오가며 소리의 질감을 파악한 이의 세심한 재료 선정이 돋보인다.
따스한 축복이 도사리는 ‘Happy Holiday’를 기점으로 음악은 더욱 과거로 향한다. 배우 나카타 아야카가 콧노래와 나레이션으로 채운 ‘To A Wild Rose’는 미국 낭만주의 작곡가 에드워드 맥도웰의 멜로디를 사용했고, ‘Humming “Dream of Love”’는 프란츠 리스트 악곡 ‘사랑의 꿈(Liebesträume No.3)’를 재해석했다. 또한 다인원의 소리로 녹음한 ‘Figlio Perduto’는 베토벤 교향곡 7번 제2악장을 썼는데, 이러한 클래식 계열 음표의 차용은 마찬가지로 고전 음악을 탐구했던, 수년 전 세상을 떠난 오랜 동료 사카모토 류이치를 떠올리게 한다. YMO 멤버들이 영면에 든 시점에 하루오미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추모는 평생 지속될 것”이라 언급한 점을 미루어 보아, 한 시절을 함께한 동료를 향한 트랙 배치였을 것이라 조심스레 짐작한다.
먹먹한 태풍이 지나고, 평화롭고 장난스럽기까지 한 마지막 트랙 ‘Anemo Wheel’이 연주된다. 호소노 하루오미, 그의 현재 상태에 가장 가까운 음악일 테다. 2001년부터 비정기적으로 호시노 겐, 미즈하라 키코 등 국내에도 잘 알려진 스타들을 대동해 콩트와 만담을 하는 TV 프로그램을 제작할 만큼 스스럼없이 유머에 뛰어들기도 하니까. 여러 팀의 해체와 결성을 거듭한 청년기엔 날 서 있었더라도, 어느새 나이가 들고 무뎌진 그가 택한 방식은 긍정이 아니었을까.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예술가들이 노년에 발표하는 신작에는 삶이 보이곤 한다. 열심히 소리를 탐구하고, 발현하는 데 몰두해 본 호소노 하루오미가 어쩌면 그의 마지막이 될 정규작에 아로새긴 음성 또한 인생의 흐름, 인간적인 면모가 가득하다. 흔들의자에 앉아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26분의 이야기, 아이는 듣다 보면 어느새 편히 잠들겠지만 어른은 출처 모를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