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소연의 커리어는 (여자)아이들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LATATA’나 ‘LION’으로 대표되는 모색기를 지나 ‘TOMBOY’의 놀라운 성공을 기점으로 (여자)아이들의 음악적 주제의식과 수사, 캐릭터는 곧 전소연 개인의 것과 별반 다름 없는 것으로 독해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대중과 평단은 팀의 성공을 전소연의 음악적 업적으로 환원해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후 (여자)아이들에게 제기된 비판 역시 전소연 개인의 패착과 한계로 수렴되어 논의되곤 했다. 실제로 수진의 이탈 이후 유연하게 그룹의 장르적 색채를 확장했던 일은 전소연의 영리한 선택이라 볼 수 있었고, 이후 제기된 비판들 — ‘Wife’, ‘퀸카’, ‘Nxde’ 등의 초보적 메타포와 일차원적 묘사, ‘Super Lady’, ‘Good Thing’의 치명적 실패 — 역시 전소연 개인의 패착으로 진단할 수 있었다. 한 명의 멤버가 K팝 그룹 내에서 이 정도의 작가적 중요성을 보여주었던 경우는 앞서 BIGBANG의 G-DRAGON이나 블락비의 ZICO의 사례와 유사하며, 그런 의미에서 전소연의 작가성은 K팝 씬 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작 <끝내주는 인생>에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명확하다. 다양한 멤버의 개성을 하나의 맥락에 조율해야 하는 그룹 활동과 달리, 솔로 앨범은 보다 선명하고 개인적인 작가성을 표출할 만한 절호의 기회가 된다. 우리는 전소연의 첫 개인 정규 앨범이, (여자)아이들에서조차 보여주지 못했던 전소연 개인의 작가성이 드러나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전소연 본인 역시 본작을 “29세 전소연이 정말 많이 담긴 앨범”이라 소개한 만큼, 본작은 (여자)아이들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순도 높은 개인의 자아를 들려주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작품 내에 산재한 여러 기시감이 화자 본래의 자아를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다채로운 색채를 자랑하는 앨범의 각 트랙에는 각각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는 레퍼런스가 존재한다. 예컨대 타이틀곡 ‘퇴사할게여’는 익스의 ‘잘 부탁드립니다’가 가진 음악적/정서적 톤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icebluerabbit’은 최근 몇 년 사이 급부상한 Rage/Digicore 계열의 문법을 따른다. ‘STAR’는 Kesha와 Katy Perry로 대표되는 2000년대 일렉트로팝 구성에 Charli XCX의 ‘Guess’를 끼얹은 꼴이며, ‘Amigo’는 티아라, 원더걸스 등과 함께 K팝의 한 축을 구성했던 디스코 기반 K팝 스타일을 재현한다. 이토록 작품 내에 다양한 레퍼런스의 형태로 드러나는 타 아티스트/장르의 흔적은 전소연의 자아가 작품 전면에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고, 작품 내 자아의 안정적인 형성을 저해한다.
물론 참조 자체를 문제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참조의 결과가 참조 대상의 원형에 지나치게 가까이 머무른다면, 이는 필요 이상의 노골성과 기시감으로 변모할 수 있다. 그리고 본작이 아티스트의 자아와 매우 밀접한 앨범임을 고려할 때, 이는 청자로 하여금 작품의 핵심 주제에 접근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을 내재한다. 예컨대 3번 트랙 ‘icebluerabbit’은 근래 변용을 거듭하는 Rage와 Hyperpop, Digicore의 일반적인 자장에서 벗어나지 않아 아티스트의 존재감을 장르의 색채 아래 가둬버리고, ‘STAR’의 코러스는 ‘Guess’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전소연이라는 인장 위에 <BRAT>의 인장을 덮어버리고 만다. 물론 ‘퇴사할게여’가 ‘잘 부탁드립니다’를 변용하는 방식이나 ‘Amigo’가 과거 디스코 영향 K팝의 질감을 활용하는 방식은 오마주와 키치의 관점에서 각각의 곡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할 수 있겠으나, 앨범 단위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토록 다양한 참조가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본작의 구조는 작품 내 자아의 정의를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각 트랙에 존재하는 레퍼런스의 존재감이 전소연이라는 하나의 자아를 응집하는 중력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셈이다. 그리고 본작이 다름 아닌 '29세 전소연이 정말 많이 담긴 앨범'을 자처했다는 점에서, 작품의 이 기시감은 사소한 흠결을 넘어 아티스트 본인이 스스로 내세운 전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 된다.
작품의 응집성을 저해하는 요소는 비단 레퍼런스의 노골성에 그치지 않는다. 본래 다양한 레퍼런스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K팝 정규 앨범의 관성적 울타리 안에서도 작품의 구성은 의문을 남긴다. 작사/작곡을 개인이 직접 수행 및 발화하여 그 작가성 자체가 작품의 응집에 기여하는 여타 작품들과 달리 제작자와 실연자가 일정 부분 분리된 K팝 앨범은, 태생적으로 부족한 작품의 개연성을 증대하기 위해 작품 내 유사한 질감의 트랙을 인접시키는 전략을 취해 왔다. 대체로 템포가 빠르고 색채가 강렬한 트랙이 전반에 배치되었으며, 느리고 감성적인 경향의 트랙은 후미에 배치되곤 했다. 이 단순하고 명료한 배치를 통해 작품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서서히 하강하는 가상의 청각적 선형 구조를 구성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우리는 각 작품마다의 안정적인 흐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끝내주는 인생>의 구성에는 이러한 K팝의 정석적 구성에 반하는 지점이 있다. 우선 타이틀곡 ‘퇴사할게여’의 최전방 배치는 작품의 점강적 흐름에 정면으로 거스른다. 비교적 강렬한 구성의 ‘Bankroll’, ‘icebluerabbit’, ‘STAR’보다는 침착하고, 부드러운 구성의 ‘그냥 사랑하면 안 될까’, ‘낭만 보내기’보다는 명확히 발랄한 ‘퇴사할게여’는 작품의 선형적 구조상 그 사이 지점에 배치되어야 마땅했다. 만약 유사한 결의 템포와 서사를 공유하는 ‘Amigo’ 전후에 ‘퇴사할게여’가 배치되었다면 작품의 흐름이 더욱 안정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물론 타이틀 트랙의 음원 성적을 고려하여 앨범 최전방에 배치하는 상업적 전략이 팝 시장에 팽배한 관행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전소연 개인의 작가성과 앨범 단위의 완성도를 보다 중시했어야 할 솔로 정규작이라면, 상업적 관행과 함께 작품의 서사적 설득력을 보다 비중 있게 다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청각적 완결성과 상업적 전략 사이 필연적 저울질에서 후자의 쪽을 택한 <끝내주는 인생>은, 그 결과 첫번째 트랙에서 두번째 트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한 번, 그리고 대단히 이질적인 방향을 고수하는 ‘야채 싫어 송’에서 또 한 번 균열이 생기고 만다. 특히 일견 진지해 보이는 작품의 태도를 단번에 어그러뜨리는 ‘야채 싫어 송’은 그 배치 자체에 의문이 드는 지점이다. 워낙 도드라지는 톤을 지녀 작품 어디에 놓였어도 집중력을 흩뜨렸을 ‘야채 싫어 송’은, 차라리 앨범 내 서사의 일부로서 배치되기보단 중심 서사와 분리된 별개의 존재감으로서 존재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작품은 언어적 서사의 층위에서도 동일한 붕괴가 반복된다. 현대인의 피로를 위로하며 "후회하지 말자"고 다짐하던 화자(‘퇴사할게여’)는 곧이어 다 퍼주기만 했던 연인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히고(‘Bankroll’), 이내 자신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는 존재로 전환한다(‘STAR’). 그 직후 아무 맥락 없이 야채가 싫다고 투정을 부리다가(‘야채 싫어 송’), 클럽에서 춤을 추고(‘Amigo’), 별안간 스스로의 취약성을 고백한다(‘그냥 사랑하면 안 될까’). 이토록 변곡이 큰 화자의 서사 사이 어디에서도 인과나 발전, 혹은 의도된 대비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그저 각 트랙이 별개의 서사로 존재할 뿐이다.
전소연은 이 앨범을 통해 자신의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자아를 보여주려 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본작은 다채로운 음악적·서사적 색채라는 점에서는 그 다면성을 성실히 구현한다. 그러나 다면성과 응집은 서로 다른 층위의 문제다. 여러 개의 면을 보여주는 것과, 그 면들을 하나의 입체로 조립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며, 본작은 전자에서는 성공하지만 후자를 위한 설득의 장치 — 난분분한 질감들을 하나의 자아로 수렴시킬 최소한의 연결고리 — 를 끝내 마련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설득 장치의 부재는, 문장 단위로 내려가면 더 정교한 형태로 재현된다.
가장 사소해 보이는 지점부터 짚어보자면, ‘퇴사할게여’의 “이팔청춘 후회하면 어때요”라는 구절은 그 언어 자체로 작은 의문을 남긴다. 간혹 만 28세로 오인되는 ‘이팔청춘’이라는 단어는 본래 만 16세 무렵을 뜻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만 16세는 퇴사보단 자퇴에 가까운 나이이며, 만약 만 16세의 청년이 실제로 퇴사를 고려한다면 이는 당사의 노동법 위반을 의심해볼 만한 사안이다. 물론 ‘이팔청춘’이라는 단어가 발생할 당시에는 해당 연령이 성인에 해당하였다고는 하나, 만 16세라는 명확한 기준이 있는 단어를 굳이 가사에 사용하여 청취에 혼동을 야기할 당위는 없었다.
이토록 의문을 남기는 단어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단 하나의 용례는 ‘이팔청춘’을 청춘의 사실상 동의어로 썼다는 것인데, ‘이팔청춘’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청춘과 동일시됐는지를 고려해본다면 이는 오히려 작가의 본래 의도에 반하는 꼴이 된다. 우리나라에 ‘이팔청춘’이라는 단어가 사실상 청춘의 동의어로 정착하게 된 계기는 민요 ‘이팔청춘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국내 연구에 의하면 ‘이팔청춘가’의 노랫말은 ‘떠난 임을 그리워하는 홀과부에 대한 노래’, ‘청년들의 권학을 훈계하는 내용의 노래’, ‘남녀의 연애와 애정에 대한 내용의 노래’로 구분된다. (이보형, 1996, p.115~152) 청년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응원하는 ‘퇴사할게여’는 이 세 사례 중 어느 하나에도 해당하지 않으며, ‘청년들의 권학을 훈계하는 내용’과는 정면으로 반한다. 결국 전소연이 사용한 ‘이팔청춘’이라는 단어는 언어의 본의와 언어적 당위, 문화적 의미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게 되며, 단지 느슨한 사용으로 남을 뿐이다.
간혹 전소연의 언어는, 전소연 본인의 언어와 상충되기도 한다. ‘퇴사할게여’를 둘러싸 “이미 충분히 부유한 전소연이 무슨 자격으로 현대 회사원의 피로를 연기하는가” 하는 기만 논쟁이 존재하기도 했다. 물론 나는 이 논지에 대해, 아티스트는 스스로와 거리가 있는 페르소나를 대동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허나 이 반박은 ‘STAR’의 발화를 통해 스스로 무효화된다. “난 천억이 넘고 널 살 수 있어”라는 발화는 정확히 '퇴사할게여'의 서사적 설득력을 저해하는 그 부유함을, 다른 누구도 아닌 화자 본인의 입으로 과시해버리는 꼴이 된다. 그 순간 <끝내주는 인생>의 페르소나는 더 이상 현대 회사원과 동등한 경제적 지위의 존재로 읽히지 않으며, 그 이중성은 충분히 청자에 대한 기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곡을 향한 세간의 기만 비판을 본인이 스스로, 본인의 작품으로서 정당화한 셈이다.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한 그녀가 능력 있는 프로듀서이자 K팝을 대표하는 재능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더불어 다양한 장르와 서사를 넘나드는 개별 트랙의 안정적인 작편곡 능력 역시 본작에서는 충분히 드러나 있다. 허나 본작 <끝내주는 인생>이 정녕 이토록 다양한 서사를 그녀의 중심 자아에 응집해내고, 전소연의 의도대로 그녀의 끝내주는 인생을 효과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냐는 데에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서사와 발화의 개연성을 상실하며 자아의 응집을 완전히 놓쳐버린 작품에는 전소연이라는 하나의 매력적인 자아보다 타 아티스트의 레퍼런스와 그녀의 공인된 재능, 서사의 부조화가 더 선명하게 들린다. 결국 <끝내주는 인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전소연의 끝내주는 인생이라기보다는 그녀의 끝내주는 취향에 가까우며, 앨범은 그저 이를 어수선하게 묶어 놓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