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월한 제목 선정이다. 슬랩스틱은 힘을 주지 않고도 과장된 타격 소리를 내는 도구니까. 가볍게 버튼을 누르거나 다이얼을 돌리는 것만으로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일렉트로닉의 특성과도 쉽게 연결된다. 쉬운 조작을 가능케하는 것의 내부에는 복잡한 로직이 있듯, 다단한 음성의 겹이 이 안에 있다. 파고들려면 얼마든 깊숙해질 수 있고, 가볍게 들으려면 한없이 가볍게 흘려들을 수 있는 선택지를 청자에게 쥐어준다.
첫 정규 앨범인 <Damage>가 이랑, 황소윤, 이민휘 등 씬에서 내로라하는 이들의 가창을 담아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그 어떤 피처링도 없다. 아무래도 대중음악에서 가장 익숙한 포맷이 노래인지라 목소리가 들리면 그에 집중될 수밖에. 전엔 초빙한 플레이어들의 문을 두드리는 ‘Portal’ 같이 연결고리 역할을 일임한 듯한 곡도 다수였다. ‘청명’, ‘모습을 바꾸는 요정들’처럼 훌륭한 독주가 참여진의 아성에 가려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허나 이번엔 옴(omm..), 낸시보이, 까데호의 김재호가 몇몇 트랙에서 연주를 덧대주었을 뿐 김도언의 손길이 스포트라이트 중심에 선다. <SLAPSTICK>에서 유일하게 본인의 가창을 담은 ‘스톰’도 괴괴한 꿈 속 놀이공원 삐에로가 건네는 인삿말 같은 느낌이 가득하지, 이 노래를 부른 이가 누구인가가 포인트는 아니다. 성공적으로 이름을 지웠다.
TV로 비유할 수 있으리라. 전작이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는 방식이라면, 본작은 케이블 채널 하나를 틀어놓는 방식에 가깝다. 진중한 드라마도, 박진감 넘치는 영화도, 깔깔대는 예능 프로그램도 있지만 하나에 묶여 흐른다. 기타 줄을 튕겼다 두드리는 소리로 출발해 신디사이저가 바통을 이어받고, 장난스러운 후주가 한 곡에 담긴 ‘나비궁전’이 앨범의 양상을 잘 응축해 보여준다. 사카모토 류이치, 토와 테이 등이 떠오르는 동양적인 색채의 ‘도망자 네온’, ‘넥타이를 사러 가는 길’, 느리다가도 빨라지며 말 그대로 바람 같은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전투 게임 BGM 같은 ‘아기괴물’ 등 다양한 장면이 결집되어 있다. 1, 2분 남짓의 짧은 트랙과 4분에 달하는 곡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안정적인 호흡을 이끈다.
차분한 전개를 띤 ‘생각의 여러 측면’은 초반부의 백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식의 행방을 청각화한 듯 레이어가 쌓이다가 일순간 멎는다. 마치 잠들기 직전 베갯잇에 흩뿌려지는 상상의 나래 같이. 앨범 전반에 걸쳐 이렇듯 소리를 통해 시각 혹은 감각적인 장면을 도출해낸다. 그런가 하면 마지막 트랙 ‘녹색과 분홍색’처럼 비디오와 겹쳤을 때 매력을 만개하는 곡도 있다. 올해 초 원 오트릭스 포인트 네버(OPN) 내한 공연의 오프닝 액트에서 미리 선보여지며 현장 관중의 호평을 이끈 영상이 그대로 담겼다. 육각형의 탐험과 맞물리는 가야금과 전자음의 뒤엉킴이 대미를 장식한다.
‘녹색과 분홍색’은 강렬하고 감각적인 대비를 만드는 보색이다. 동시에 꽃과 줄기의 색으로,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야에 내려앉는다. 앞선 모든 트랙의 꿈틀대는 형태를 여섯 글자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SLAPSTICK>만큼이나 각인되는 타이틀이다. 건반과 각종 악기를 두드리는 행위는 그 자체로는 별 게 없지만, 여러 맥락과 조합을 거치며 감동을 선사하는 법. 이 또한 ‘녹색과 분홍색’ 같은 대비를 닮았다. 콘트라스트는 늘 실재보다 빛나기 위해 차용하는 방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