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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ARIRANG>, 고개 앞에서

by 이예진|

우리는 아리랑을 늘 곁에 두고 살았기 때문에 따로 찾아 듣지 않는다. 청취 경험이 쌓이면서 ‘이미 아는 음악’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고, 그 프레임이 아리랑을 듣기 전에 닫아버렸다. 음악이 뿌리를 드러낼 때 청자는 거슬러 올라간다. 이 앨범이 그 방향을 겨냥했다는 건 분명하다. 문제는 그것에 얼마나 가까이 닿았는가다.

아리랑은 어떤 음악인가

아리랑은 정의된 적이 없다. 강원도에선 후렴이 다르고 진도에선 또 달랐다. 같은 이름 아래 다른 소리가 수백 년을 살아남았다. 그러면서도 공유하는 정서가 있었는데, 끝내 하나의 말로 묶이지 않았다. 체념이라고 하면 너무 가라앉고, 의지라고 하면 너무 일어선다. 둘 다라고 해도 뭔가 빠진다. 결론이 없는 정서. 고개를 넘기 전도 아니고 넘은 후도 아닌, 넘는 중의 소리다.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날 것을 알면서도 걷고 있는 자가 부르는 음악이다.

이 앨범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것 하나다. 넘는 중의 소리를 만들었는가.

두 개의 문법

cover image of BTS <ARIRANG>
BTS <ARIRANG>BIGHIT Ent.

넘는 중의 소리는 그렇게 ‘울어야 할 자리’로 굳었다. 이 앨범의 주제를 접하는 순간 한국인이 느끼는 묘한 거부감은 ‘답습에 대한 공포’다. 클라이맥스에서 울려 퍼지는 아리랑, 국뽕이 차오르는 공식, 여기서 울어야 한다고 정해진 길. 이 공식은 감동 포인트를 미리 표시한다. 자발적으로 감정에 도달하기보다 끌려가게 만든다.

이번 앨범의 프로듀싱은 두 개의 문법을 동시에 의식했다. 하나는 아리랑의 문법. 다른 하나는 아이돌의 문법이다. 아리랑의 문법이 감정의 길을 정해두는 형식의 문제라면, 아이돌의 문법은 감정의 종류를 정해두는 내용의 문제다. 아이돌 음악에는 암묵적으로 허용된 정서의 범위가 있다. 에너지, 긍정, 희망. 이번 앨범을 두고 ‘피로하다’라는 반응이 나오는 건 그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돌이 슬픔과 체념을 노래해선 안 된다는 기대 자체가 또 다른 코르셋이다. 이 앨범은 그 코르셋을, 쨍하고 밝은 트랙이 단 한 곡도 없다는 것으로 거부했다.

멜로디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다크하고 침체된 분위기를 택한 것은 그 두 개의 문법을 거스르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앨범은 그 문법을 완전히 내려놓지 않았다. 아리랑을 직접 소환하고, 에밀레종을 전환점에 놓았다. 그 공식의 기표를 쓰면서 공식의 문법을 거부하려 했다. 그 거부의 분명한 증거는 아리랑을 타이틀곡 클라이맥스에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쉬운 선택을 피했다. 그 긴장감이 이 앨범 전체를 관통한다.

고개 너머

그 공식대로 소환된 아리랑은 딱 한 번 쓰였다. 첫 트랙 ‘Body to Body’에서. 래핑과 본조 아리랑의 병치. 그런데 이 결합은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겉돌 수밖에 없었다. 전반부에서 이미 오토튠과 랩 중심으로 음가를 지워버렸기 때문에, 아리랑이 등장하는 순간 고양되는 것이 아니라 동떨어진 또 하나의 요소로 착지한다. 튀어야 할 자리에서 그냥 얹힌다.

가사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총 칼 키보드 다 좀 치워”, “뭘 체면 따져 내려놔, 야 인마” 뒤에 등장하는 “솟구치는 겨레의 마음”은 앞선 언어와 공존할 수 없다. 이 앨범이 ‘Body to Body’라는 제목에 충실하게 하나됨을 말하려 했다면, 에너지의 방향이 분노가 아니라 합류였어야 했다. 그 문법을 피하려다 택한 언어가 분노였다. 분노로 달군 자리에 체념은 내려앉지 않는다. 이 트랙은 그 공식도, 아리랑도 되지 못했다.

‘Aliens’는 다르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을 소재로 삼으면서, 보컬 라인이 “Aliens”라는 제목과 동일한 훅을 직접 받아 올려준다. 랩과 보컬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그 방향이 아리랑과 닿는다. 낯선 땅에서 걷고 있는 자가 내는 소리. 이 트랙이 앨범 안에 있어야 할 이유가 생긴다. 다만 그 연결이 가사에 너무 기댄다. 김구와 중모리를 직접 불러야 닿는 정체성이라면, 아직 설명의 언어다.

‘FYA'는 이 앨범에서 비트적으로 가장 충족감 있는 트랙이다. 주류 팝 문법의 Diplo, 실험적 색채의 Jpegmafia와 Flume. 상반된 두 세계의 균형감이 소리로 구현됐다. 그런데 그 위에 올라탄 것이 'fire'다. ‘Aliens’이 가리키던 방향과 무관하다. ‘2.0’도 마찬가지다. 군 공백기 이후 새롭게 태어난다는 선언이다. ‘Aliens’에서 한 번 열렸던 방향이 여기서 닫혀버린다. 그 채로 전반부가 끝난다. 의도된 배치였다면 그 단절이 어디선가 회수됐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

전반부는 아리랑을 향한 몸짓들로 가득하다. 직접 차용(‘Body to Body’), 자기 선언 (‘FYA’, ‘2.0’). 아리랑과 가장 가까웠던 ‘Aliens’조차 가사에 기댔다. 방법은 다른데 아리랑과의 거리는 같다. 전반부가 이미 고개를 넘은 자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넘는 중의 소리인데, 전반부는 이미 넘어서 돌아보는 소리다. 그 간극이 아리랑과의 거리가 된다.

‘No. 29’는 그 거리를 의식하고 초점을 다시 고개로 가져온다. 밀도 높은 사운드가 일순간 사라지고, 에밀레종 소리가 파형이 꺼질 때까지 1분 38초간 흐른다. 단절은 실제로 만들어진다. 앞에서부터 쌓아온 에너지를 소리로 비우는 것, 그 자체가 이 트랙의 언어다. 과감한 선택이다. 다만 상징을 모르는 청자에게도 이 침묵은 기능한다. ‘왜 멈추나’라는 의아함이 ‘SWIM’의 연약한 선율이 들어오는 순간 소급해서 읽힌다. 비워진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선율이 남는다. 에밀레종을 몰라도 ‘No. 29’는 음악적으로 기능한다.

SWIM

후반부에 그 공식을 상징하는 장치는 없다. ‘Body to Body’처럼 아리랑 샘플을 직접 넣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트랙들에서 감각적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 있다. 설명하지 않아도 남는 것. 전반부가 아리랑을 물리적으로 소환하려 했다면, 후반부는 아리랑의 결을 음악 안에서 길러냈다.

그 정서를 가장 정확하게 구현한 트랙이 타이틀곡 ‘SWIM’이다. 이 곡의 후렴구가 귀에 남는 이유는 선율의 구조 때문이다. 3도로 내려앉았다가 2도씩 되짚어 오르는 움직임이 고리처럼 맞물린다. 도약 없는 읊조림. 경기 아리랑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도 2도 위주의 순차진행이라는 점에서 이 선율과 결이 닿는다. 완전히 걷히지 않은 희뿌연 조성 진행. 방향도 결론도 없이 그저 헤엄치고 있는 소리. 스윔, 스윔. 메아리처럼 자답하는 그 호흡 구조도 아리랑의 방식이다. 이 곡이 앨범에서 살아남는 데는 편곡 전략도 있다. 드세고 다크한 트랙들이 멜로디를 소진했기 때문에, 이 단순하고 연약한 선율이 끝까지 남는다. 전반부의 선택이 여기서 회수된다. 넘고 있는 자가 내는 소리. 이 앨범에서 아리랑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닿은 트랙이다.

BTS <ARIRANG>, 고개 앞에서 image2▲ SWIM 후렴구 선율. 하행과 상행이 고리처럼 맞물린다.

그러나 앨범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One More Night'은 프리코러스에서 사이키델릭 오르간으로 좁게 조인 다음 하우스로 터뜨리는 구조다. 조여든 만큼 터져야 하는데 드롭에서 ‘fantasy’가 공허하다. 빌드업은 있는데 해방감이 없는 트랙이다. ‘Into the Sun’은 사랑과 희망으로 정서를 끌어올리며 앨범을 닫는다. 아이돌의 문법을 거부했는데 앨범은 희망으로 닫힌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건 의도된 선택일 수 있다. 하강의 정서로 내려온 앨범을 그대로 닫으면 완결성이 없다. 올려두고 닫아야 한다는 감각. 그런데 그 올림이 너무 쉬운 방식으로 이뤄졌다. 아리랑은 고개를 넘는 중의 노래다. 이 트랙은 이미 도착한 자가 부르는 노래다. 완결성을 얻으려다 주제를 잃었다.

고개 앞에서

아이돌에게 허용된 정서의 범위를 거부한다는 건 결국 이 앨범이 슬픔과 체념을 택했다는 것이다. 후반부가 그걸 실제로 구현했다. ‘SWIM’이 그 증거다. 전반부의 모든 시도는, 직접 차용이든 정체성 선언이든 자부심의 언어든, 아리랑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지 아리랑이 아니었다. 설명한 순간 아리랑은 아리랑이 아니게 됐고, 설명을 내려놓은 순간 아리랑이 들렸다.

앨범이 아리랑에 닿은 순간은 ‘SWIM’ 하나였다. 나머지는 그 주변을 맴돌거나 아예 다른 곳을 향했다. 그러나 그 하나가 존재한다는 것, 일곱 명이 함께 만든 음악에서 아리랑의 본질이 단 한 번이라도 구현됐다는 것은 기록할 만하다.

지금 타국에서 누군가가 1896년의 소리를 듣고 있다. 처음 그 소리를 낸 것도 타국에 있던 이들이었다. 그 소리가 어떤 귀에 닿는지, 어떤 욕망이 그것을 불러냈는지와 무관하게, 소리 자체는 아직 정의된 적이 없다. 고개를 넘기 전도 아니고 넘은 후도 아닌 소리. 이 앨범도 그것을 정의하지 못했다. 아리랑은 원래 그렇게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