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이렇게 어둡단 말인가……. 이미 온 세상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다……. 이미 나는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돌아보지조차 않는다! 목구멍 속에서 푸르르 떨고 있던 공포가 갑자기 터져나왔다. 남자는 입을 쩍 벌리고, 짐승처럼 외친다. “살려줘!”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중 (민음사, 김난주 역)
소설 <모래의 여자> 주인공은 곤충 채집을 나섰다가 모래 구덩이에 갇힌 채 사람들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책의 끄트머리에는 실종 신고 최고장과 판결문이 적혀 있다. 작품이 발표되던 60년대부터 줄곧 일본의 사회적 문제였던 실종 사건은 매년 8만에서 10만명에 이르는 신고 건수를 지니고 있다. 단순 신고 건수로는 그렇다 할 수치가 아니지만 타국에 비해 장기 미제 실종 사건으로 분류되는 비율이 높은 편이다. 소설과 같은 유사한 연대에 이미 이런 현상을 다룬 <인간증발>이라는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고 지금까지도 비슷한 주제의 작품이나 연구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언론은 일본 장기 실종 사건의 특수성을 주로 자발성에서 찾아낸다. 신분을 엎고 제2의 삶을 위해 스스로 실종을 감행하는 이들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아베 코보도 이에 집중한 듯 소설의 첫 장을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라는 섬뜩한 문구로 트고 모래 구덩이에 감금 당한 남자가 끝에는 자발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결말 즈음 한 집에 살던 원주민 여인은 남자의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구덩이 밖을 나선 참이다. 그리고 아마 그다음이 우희준의 <아, 진실이라는 모래알이 내 발밑을 찔러서 따갑다!>가 묘사하는 쪽이다. 제목은 물론 ‘편도표’와 같이 소설 내에 직접 언급되는 낱말을 차용하며 노랫말을 이끌고 있고, 음반 발매 한 달 뒤엔 소설의 에필로그 격의 이야기가 담긴 뮤직비디오가 공개되기도 했다.
1. 뮤직비디오와 초현실주의
소설을 집필한 아베 코보는 초현실주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모래의 여자>에도 진한 영향이 남아 있다. 우희준의 뮤직비디오는 이와 맥락을 맞추어 꿈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파트를 구분할 때 등장하는 이미지로 초현실주의 화가 레메디오스 바로의 두 그림을 채택하고 있으며 그중 하나의 제목은 <테이블 위의 눈>이다. 당연하게도 초현실주의는 미시세계에 관한 작풍이다. 무의식, 현실과 감각의 해체, 미스터리로 넘쳐나는 세계관은 일반적인 시각적 규격 너머에 형상을 이루고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명처럼 이미지는 배반한다.
뮤직비디오가 서서히 위아래로 닫히는 프레임과 초점이 나간 화면, 모래 묻은 눈두덩을 보이듯 우희준도 시각에 대한 불신을 기반으로 말하고 있으며 초현실주의 작품이 으레 그렇듯 눈을 앞세웠을 뿐 다른 감각이라고 우대하지도 않는다. 영상 초반부 자막은 심신이원론을 인용하며 “내 신체는 나와 상관없이 있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신체는 모래와 어느 정도 동일선상에서 파악된다. 다만 “내 경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몸”이라는 말로 자아가 결부된다는 조건 하에서는 몸을 내 일부로 인정하되 모래는 “전 존재의 감정적 소묘”라는 말로 거리를 둔다. 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주체라고 간주하는 신체와 대상이라고 간주하는 모래의 양극을 한 걸음씩 좁힌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몸은 껍데기인 반면 모래는 화자에 의해 관념이 씌워진 독특한 대상으로 재고된다.
본격적으로 소설의 에필로그가 시작하는 것은 아이의 작명이다. 여자는 성녀로부터 딴 “루치아”라는 이름을 짓는다. 덧붙이기를 “모래를 뒤집어쓰고도 천진하게 웃을 수 있는” 아이일 거라고 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의 독백이 시작되는데, 아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엄마는 태어났을 적부터 그래왔다고 하지만 본인은 믿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그 근거로 누군가 눈을 가져가는 꿈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과 감각에 대한 인상이 남아 있는 점을 든다. 아이는 성녀 루치아의 환생인 걸까? 루치아가 순교 과정에서 눈을 잃고 신성을 얻듯, 아이는 남자에게 지옥 같았던 모래를 시각 외적으로 찬미한다. 루치아에게 그러했듯 아이에게 모래알은 진실이다. 따가운 진실이다. “도저히 내가 보는 것을 본다고 할 수 없었거든요.”라고 마치는 아이의 말처럼 진실은 항상 눈밖에 나 있다.
2. <아, 진실이라는 모래알이 내 발밑을 찔러서 따갑다!>
우희준이 한 해 만에 내놓은 3장의 음반은 점진적인 변화를 띤다. ‘나는영영모를것들만궁금하지’의 프릭 포크적 면모나 인스트루멘탈 트랙을 포함하는 특징은 여전하나 록에 가까운 문법에서 포크로, 또는 응용하는 악기에서는 재즈의 기운도 강해졌다. 점차 느슨해지고 희미하게 들리는 보컬도 매우 인상적이다. 이는 뮤직비디오에 쓰인 내레이션에서도 드러나는 특징으로, 감각이 일으키는 상이 주는 명료함의 환상성을 깨우치려는 초현실적 시도로 보이는 동시에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가사의 내용은 소설과 뮤직비디오의 내용을 미리 섭취한 태도로 보이며 다양한 시점이 오간다. 일례로, 언뜻 들으면 소설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듯한 ‘두 발로 움켜쥐기’는 이내 “서울”을 언급하며 당사자의 시점을 훌쩍 뛰어넘는다. 앨범 내 요소에 이르러 내러티브는 주관적이고 복합적인 국면을 맞고 있다.
뮤직비디오와는 주제의식도 궤가 달라진 모양이다. 초현실에 대한 갈구는 ‘나는영영모를것들만궁금하지’ 정도에만 드러나고 ‘모래의 여자 (아프다구요)’는 어떤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며 ‘두 발로 움켜쥐기’는 도시인의 불안정한 일상, ‘편도표를 쥐고’는 소설 속 키워드를 다른 시점에서 풀이하고 있다. 여기도 “고통”이라는 말이 되풀이되어 아픔에 대한 언급은 이어진다. 그러니 가사 속 내용은 소설과 뮤직비디오와의 연계성 만큼이나 우희준의 전작들과의 관련성도 짙다. 그가 줄곧 노래 삼았던 실존적 고통이란 ‘모래의 여자 (아프다구요)’의 가사처럼 “커다란 흠”이지만 “당신은 모르”는 것으로, 즉 비가시적 상처다.
따갑지만 보이지는 않던 진실의 외양이 헤아려진다. “두발로 땅을 움켜쥐지 않으면” 금방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항상 괴물과 함께 잠을” 자는 듯한 기분. 그러나 우리는 그런 현실을 끊임없이 외면하는 것으로 극복한다. ‘편도표를 쥐고’ 속 이야기는 그런 것이다. 소설에서 아베 코보는 “편도표”를 “어제와 오늘이, 오늘과 내일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맥락 없는 생활을 뜻한다.”라고 규정한다. 시간적 단절은 자아에게는 치명적 고립이다. 그리고 후술 하기를 “편도표를 손에 쥐고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왕복표를 거머쥘 수 있는 사람에 한한다. 그렇기에 돌아오는 표를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지 않도록, 죽어라 주식을 사고 생명보험에 들고 (…) 절망에 차 도움을 구하는 편도파들의 아비규환을 듣지 않기 위해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이고…”라고 말한다. ‘편도표를 쥐고’에도 비슷한 묘사가 있다. “알 수 없는 것은 모르고 마주치지 않았으면 해/너는 그대로 모른 채로 살았으면 했는데”라는 외면의 암시. 하지만 이것이 바람이라는 점이 이상하다. 모른 채로 살았으면 했는데 알아버린 상황, 그리고 화자는 그렇게 진실을 알아채는 것에 동반하는 고통을 조금 의심하고 있다.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할 수 있었다면 너의 몸이 나를 따라서 고통 받지 않았을까/모든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 모두 멀리 있다면 고통이 악이 되지 않고 모든 죄도 없을까”. 의구심 가득한 문장은 이전의 바람과는 관점이 다르다. 개인의 삶에 한해 우리는 앎에 대한 추구보다 고통받지 않을 것을 바라는 반면 공동체의 삶에서는 유대감을 요한다. 진실을 외면한 행복은 가능하고 진실을 외면한 정의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배부른 돼지의 기쁨을 갈구하고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필요를 안다. 그리고 선택이 뒤따른다. “구원을 바라는 너를 알기로 할까” 하는 망설임이 드리운다.
신화적으로는 판도라의 상자나 선악과, 또 현대에 존재해왔던 수많은 폭로 사건 등. 진실을 향한 도전은 늘 시스템에 대한 도전이었고 따라서 악으로 강조되어 왔다. 진실이라는 모래알은 죽을 만큼 따갑다. 2번 트랙 ‘모래의 여자 (아프다구요)’ 속의 음반과 관한 모든 텍스트 중 유일하게 제안과 같은 문장을 보자. “우리 함께 모여서 상처를 맞대자/벌어진 상처를 다 보여도 좋아/대신 흔적들을 잘 모아 감추자/냄새가 퍼지면 다 몰려올 거야”. 묘한 연대의식 뒤 따라붙는 문구는 이러하다. “너흰 잔뜩 흩어져서 같은 말만 해/어디든 널려 있어 그게 무서워/나와 너 우리는 곧 돌을 맞았네/우리가 하려던 건 이런게 아닌데”. 섬찟한 회의가 느껴지는 결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모래 구덩이에 갇힌 후 찾아오는 마을 주민들에게 호소와 설득을 시도하나 좌절된다. 결국 그가 찾아낸 방법은 모래 구덩이 안에서도 살아가는 법이다. 그는 모래 구덩이 바닥에서 샘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마을 주민들에게 과시할 생각에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탈출을 포기한다. 인간의 무시무시한 인정욕구는 “나는 아주 가끔 망쳐지고 싶어/하지만 너무나 살고 싶지”라는 노랫말처럼 모순적이다. 그것이 튀어나올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갈증을 지레 해소해버린다. 무엇보다 개탄스러운 것은 이 회의 자체가 진실의 일부로 보인다는 것이다. 서울의 어느 지하철, 각기 휴대폰을 보며 가는 군중, 그러다 휴대폰 위로 불현듯 실종 경보 안내 문자가 떠오르고, 사람들이 일제히 그 문자를 무시하고 넘어가는 광경. 그중 거의 모두가 실종자의 이름 석 자를 외우지 못했을 테고, 심지어 누군가의 휴대폰에는 실종 사건을 다루는 미스터리 콘텐츠가 SNS를 통해 보이고 있을 것이다. 무엇을 왜 응시하는지 알 수 없는 아이러니로 꿈틀대는 만연한 일상. 그들은 무사히 출근하고 같은 방식으로 퇴근한다. 왕복표를 쥔 사람들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편도파들의 아비규환에 눈 감을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