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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바퀴를 거부한 세 번째 탈피, 실리카겔 <Ballad of You>

by 정기엽|

cover image of 실리카겔 <Ballad of You>
실리카겔 <Ballad of You>CAM

한 번의 성공적인 변신은 우연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하나의 밴드가 두세 번 이미지를 비틀어도 매번 설득력을 갖춘다면 그것은 실력이다. ‘NO PAIN’의 히트 이후 ‘Tik Tak Tok’, <POWER ANDRE 99>, ‘BIG VOID’에 이르러 몸집을 불린 실리카겔은 <Ballad of You>를 통해 거대화를 촉진한다. 밴드 씬 바깥까지 이름을 알린 전작의 방식을 거듭하는 대신, 그 성공을 재료로 스케일이 커진 음악과 또 다른 얼굴로 태어난 것. 이 앨범에서 ‘윤회’는 이야기의 소재인 동시에 실리카겔이 변신하는 방식이다.

고철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던 <POWER ANDRE 99>에서 벗어나 첫 트랙부터 1980년대로 돌아간 듯하다. 로봇을 다루더라도 손에 쥔 인간이 더 돋보이던 시절. 전설적인 트리오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YMO)가 레퍼런스로 느껴지는 ‘Dr. BOB’은 기계적인 이미지를 무리해 지우지 않되, 전에 없던 경쾌함을 더했다. 새의 지저귐 같은 엔딩과 더불어, 중저음이 어울리던 보컬이 “SUPREME” 이라며 고음역을 내지르며 새로운 서사의 시작을 알린다.

여러 인터뷰에서 가사에 대해 “추상적인 느낌과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는 편”이라 언급해 왔지만, 이번엔 언어를 통한 정서적 서사가 존재하는 듯 보인다. 가장 먼저 공개된 싱글 ‘BIG VOID’의 “She’s innocent” 라는 주장 속 ‘그녀’가 초반부터 여러 장면에 포착되기 때문. 모종의 불만을 해소하고자 갈망하던 약 혹은 치유의 존재를 만나고, 중독되다가 후회로 타오르는 맥락이 떠오른다. Avoid하려다 A Void에 빠져드는 과정. 아트워크 속 반복되는 굴레와 같은 쓸쓸한 걸음도 ‘Up Quark’ 등에 담겨 주된 정서를 이룬다.

모든 중독은 ‘다시 태어난 듯한 희열감’을 반복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되기 마련. 그 도취를 맞닥뜨린 전개가 ‘Melatonin 88mg’부터 ‘Molecular Gastronomy’까지 펼쳐진다. 담뱃불처럼 도화선을 태우는 ‘Melatonin 88mg’를 보자. 네 멤버의 협연이 응축된 1절 후 베이스 솔로로 문을 여는 변주가 이어진다. 이 구간이 금기가 되었든, 마성이 되었든 무언가 직면한 모습을 빼어나게 담았다. 곧장 난해한 관악기의 울먹임으로 태동한 ‘Crybaby’는 속도감 있는 드럼과 신디사이저로 질주를 표현한다. 사이키델릭 아트가 떠오르는 초현실적인 달리기가 금세 막을 내리면, ‘Molecular Gastronomy’는 이 찬미를 짧게 회고한다. “This is new stuff”. 애플과 연계한 프로모션에서 이 곡을 두고 “기분 좋은 음악”이라 언급했던 점을 두고 보면, 어느 해석을 거치더라도 환희의 박제임은 분명하다.

벌레가 보이지? 그것도 살아 있어. 고작 반년밖에 살지 못하지만.
잠자리는 그보다 더 짧아. 부모가 되고서는 고작 3일을 살 뿐이야.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이 불행하다고 한탄하지 않아.
자신에게 주어진 일생동안, 열심히 자라고 먹고 사랑을 하고 알을 낳고 만족스레 죽어가는 거야.
그 일생동안…. 살아 있는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데즈카 오사무 <불새> 중에서, 불새의 대사

발매 전 여러 매체를 통해 <Ballad of You>가 불교 개념인 ‘윤회’와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불새>에서 영감받아 탄생했다고 밝힌 바 있다. 불멸의 존재를 둘러싼 고대부터 수만 년 후 미래 인간 군상을 그린 작품의 의미는 결국 니체의 영원회귀와 겹친다. 반복 자체를 긍정하고, 스스로 찾는 의미로 허탈감을 지우는 것. 밝고 짧게 타오르다 재가 되는 연결고리로부터 느낀 술회가 빛나는 곡은 타이틀 ‘Manpasickzuck’이다. 허상을 불에 빗대 소유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재를 바라보는 허탈함과 쓸쓸함이 반복되는 멜로디에서 쳇바퀴를 돈다. 마치 ‘Andre99’와 ‘Desert Eagle’의 정서를 뒤섞은 듯한 이 곡의 백미는 후반이다. 라라라- 되뇌는 챈트 전후로 다프트 펑크를 연상케 하는 이펙트가 보컬에 섞인다. 곡 안에선 잡을 수 없는 찬란의 날갯짓을, 곡 밖에선 고공 행진을 거듭한 커리어의 여유를 증명한다.

‘Manpasickzuck’을 기점으로 이 앨범에는 성스러움이 비집고 들어온다. 제목과 상반되게 오르간 연주로 교회의 문을 연 듯한 ‘You Just Wanna Have Fun’은 이전까지 타오른 잿더미를 쓸어 담는다. 전반부의 휘몰아친 계절이 지나고 고요한 울림이 끝맺을 때쯤 제목이 다르게 보인다. 쾌락이 주는 재미는 멎고 비극이 눈을 뜬다. 이제 ‘Crime Scene’을 수습할 시간이다. 이쯤 오면 주제가 매우 무겁게 다뤄지는 것 같지만, 음악은 오락 영화가 다루는 범죄처럼 장난스러운 면도 있다. 마침 같은 온도의 영화 <밀수>의 음악에 장기하와 함께 참여한 김춘추의 이력이 떠오른다. 산울림, 신중현 등 1970년대 록의 재치가 담긴 사운드트랙과 비슷한 궤도를 밟으며 후반부로 청자를 인도한다.

여기서 잠깐, 본작에 큰 영향을 준 개념이 윤회라고 했다. 시대를 옮겨갈 뿐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사. 실리카겔의 디스코그래피를 탐독한 이들에게 이 “반복”은 재미 포인트를 남긴다. ‘Metamorphosing’의 여흥구가 5년 전 24분 넘는 대곡 ‘S G T A P E – 0 1’ 12분 무렵에 등장한 것이나 ‘S G T A P E – 0 2’의 마지막 부분 속 ‘Postpink’의 스포일러가 그렇다. 전자는 인디 록과 종교 음악에 가까운 웅장함이 뒤섞여 있고, 후자는 MTV 시대의 팝 록 같은 가벼운 전환을 도모한다. ‘BIG VOID’ 또한 실리카겔 커리어에 전례 없던 디스코 느낌을 수용했지 않던가. 이처럼 여러 감상의 궤적에서 영향을 받아 온 흔적이 곳곳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복각이라기보다 재해석이라는 점. 같은 악보를 연주하더라도 지휘자나 악단의 조합에 따라 늘 다른 해석이 따르는 클래식처럼 말이다.

‘Dr. BOB’에서 1980년 일본 전자음악이 자연스레 떠올랐다면, 서정적이게 음반의 문을 닫는 ‘Accident’는 7080으로 포장되는 국내 록 발라드를 닮았다. 특히 코러스가 들어서면서 가을과 겨울 사이, 낙엽과 연모의 감정이 휘몰아치면서 다시 혼자 남겨진 이를 노래한다. 어덜트 컨템포러리에 가까운 따뜻한 구절을 담고 있지만, 밴드 특유의 거친 질감도 도입부터 섞었다. 이렇듯 과거의 유산이 실리카겔의 손짓에 의해 다듬어진 양상도 마찬가지로 윤회를 음악에 담는다. 방식의 차이일 뿐 되풀이되는 순환점이 언어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담겨 있다.

작년 싱글 ‘南宮FEFERE’부터 이들은 이른바 “쇠맛” 이미지를 서서히 벗어나고자 한다고 암시했다. 생각해 보면 이 밴드는 매번 안주보다 탈피를 감행한다. 날것, 야생에 가까운 <실리카겔>, 정제되고 깔끔한 <POWER ANDRE 99>, 극과 극을 오가며 넓은 스펙트럼을 담은 <Ballad of You>에 이르기까지. 고유한 스타일에 있어선 일관됐더라도 한 번도 답습을 허한 적은 없다. 많은 것이 반복을 이룬 앨범이지만, 머물렀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아레나에서 단독 공연을 열 정도로 커진 덩치, 그 규모에 걸맞은 앨범이 나왔다.

텅 빈 느낌은 남더라도 분명히 더 가벼워질 거야.
영화 <썬더볼츠*> 중에서

마블 영화 <썬더볼츠*>에 나오는 대사다. 작중 혼돈을 일으키며 흑화한 캐릭터에게 트라우마를 지우기 위한 연대를 요구하며 블랙 위도우가 건네는 말인데, 이 앨범의 테마와도 어울린다. <불새>의 많은 이들이 그렇듯 대개 영원을 바라지만, 영원은 없다. 반대로 말하면 무한한 공허도 없고, 언젠가는 마무리된다. 실리카겔이 노력의 반복을 통해 음악적 이미지 탈피를 해냈듯, 한평생 동반할 것 같은 허망함도 연거푸 굴리면 크기가 작아진다. 한 명의 감상자로서 앨범의 화자에게도, 이 음반을 듣고 위안을 찾고자 한 청자에게도, 영화 속 캐릭터에게도 전하고 싶던 말이다.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를 담은 시니까.

p.s. 참, 그 캐릭터의 이름은 밥이다. 다른 인격이 될 때는 보이드… ‘Dr. BOB’과 ‘BIG VOID’가 떠올라서 고른 비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