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래식이라는 틀 안에서 자유롭게 연주하는 영혼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가령, 클래식 피아노 레슨 시간에 엄격한 교수님 앞에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재즈 버전으로 연주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는 등짝 스매싱을 감수하고도 손가락의 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바로 존 바티스트라면, 더 이상의 설명은 사실 필요 없다. 그의 음악에서 통제가 아닌 본능과 유희가 먼저 작동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존 바티스트는 유희를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아티스트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클래식의 상징과도 같은 베토벤을 연주했다. 존 바티스트의 앨범 <Beethoven Blues>는 단순 크로스오버를 넘어, 클래식을 유희의 장으로 창조한다. 베토벤의 악보를 따라가는 듯하면서도 경계를 유연하게 흐트러뜨리는 그의 연주는 마치 자유로운 영혼과 클래식의 규율이 맞닿아 새로운 길을 여는 모양새다.
앨범의 첫 곡 ‘Für Elise’, 즉 ‘엘리제를 위하여’는 마치 소년이 피아노 앞에서 장난을 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익숙한 미-레#-미의 선율이 시작되는 순간, 클래식의 엄격함은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존 바티스트는 그 선율을 블루스 특유의 유연한 리듬감으로 뒤틀어내며, 편곡 이상의 변주를 시도한다. 원곡의 구조를 해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색채를 입힌 그의 접근은 가히 대담하다. 왼손은 블루스풍의 쪼개진 리듬을 만들고, 오른손은 즉흥적으로 선율을 흩트리며 완전히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조화롭게 얽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변주가 단순히 ‘클래식을 재즈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 바티스트는 마치 베토벤의 악보와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원곡이 요구하는 규칙 속에서도 그는 자유를 찾는다. 다이나믹한 측면에서 정중동의 미학이 돋보이는 그의 변주는, 듣는 이로 하여금 ‘이게 정말 엘리제를 위하여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하면서도 그 매력을 놓칠 수 없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또 다른 트랙 ‘Waldstein’은 그 자체로 유희다. 클래식 피아노의 정석인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이렇게까지 자유롭게 풀어낸다는 것은 단순히 재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곡의 시작과 동시에 존 바티스트는 주제의 스케일 선율을 먼저 가져와 확장해 인트로로 연주한 후, 본래의 연타 주제를 이어받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주를 시작한다. 이윽고 왼손으로 만들어내는 부기우기 리듬은 청자를 놀라게 한다. 대중적이고 경쾌한 발트슈타인 소나타가 블루스의 리듬을 입으며 다른 곡으로 탈바꿈한다.
존 바티스트의 이러한 변주에는 특유의 재기발랄함이 깃들어 있다. 빠르게 반복되는 주제 위에 과장된 꾸밈음을 얹는 순간, 그의 음악적 장난기는 절정에 달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 장난 속 원곡의 소나타 형식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클래식과 재즈 사이를 오가며 그린 존 바티스트만의 지도이다.
앨범 중반부 트랙인 ‘7th Symphony Elegy’는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의 서정미를 새로운 방식으로 탐구한다. 존 바티스트는 원곡의 장중함을 간결하고 따뜻한 선율로 재해석한다. 그는 피아노를 통해 마치 고원의 풍경을 그려내듯 곡을 단순화하면서도 그 서정을 잃지 않는다. 이는 클래식 원곡에 익숙한 청중에게 신선한 감동을 준다. 또한 ‘따-따-따-딴!’ 주제로 유명한 운명 교향곡 역시 ‘5th Symphony in Congo Square’에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비장한 서두는 이내 운명의 무게감을 벗어던진 재치와 해방감의 곡으로 바뀌며 클래식이 이토록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Beethoven Blues>는 단순히 클래식과 재즈의 경계를 허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존 바티스트는 이 앨범을 통해 음악적 규율과 자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의 연주는 때로는 불안정하고, 다소 거칠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점이 이 앨범의 진정한 매력이다.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음악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결국 이 앨범은 단순한 크로스오버를 넘어선다. 클래식과 재즈라는 두 거대한 세계를 한데 모아, 존 바티스트만의 색깔로 물들인 이 작품은 대작이라 부를 수는 없어도, 그 어떤 대작보다 즐겁고 흥미롭다. 존 바티스트가 이 앨범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음악은 경계를 넘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끝없는 자유를 탐구하고 있다.
혹시 피아노 앞에 앉아 ‘엘리제를 위하여’를 다시 연주해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한 번 장난스러운 꾸밈음을 더해보자. 존 바티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자신만의 음악적 자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