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카라의 팬이 아니다. 한순간도 카라의 팬으로 살았던 적 없다. 그런데 그들의 전성기 때도 아니고 감격스러운 재결성 때도 아닌 ‘Hello’ 앞에 이르러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다. ‘Hello’가 유난히 아름다운 선율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눈물을 어떻게 형용해야 할까? 음악의 내적 요소에 감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변명을 찾기 시작했다. 감정은 가끔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니까. 나는 다른 이름의 아티스트가 아무런 서사도 얽매이지 않은 형태의 ‘Hello’를 발표한 모습을 상상했다. 눈시울이 차분해지고 냉기를 되찾았다.
이런 감정적 전제에서 가치 판단을 재개한다. ‘Hello’는 좋은 음악인가? 어려운 질문이다. 호불호를 따지기 애매한 작품인 탓이 아니다. 이 질문 자체가 간신히 성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Hello’는 좋은 음악이라는 잣대에 불응한다. 다른 음악을 들을 때 일반적으로 통용하던 감각과 이론, 역사가 무용하다. 한 작품이 매번 같은 공정 과정 아래 판단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아래 ‘Hello’가 품은 텍스트는 외려 음악 바깥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기술의 부단한 발전 끝에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많은 아티스트가 사후에도 음원을 발표하고 있으며 먼저 작고한 멤버를 추억하는 식의 그룹 작업도 상당수 이루어지고 있다. 카라의 ‘Hello’는 후자에 속한다. 2013년 정규 4집 앨범에 수록될 예정이었던 미발표 녹음본을 활용하여 음원을 구성했다. 이에는 5년 전 세상을 떠난 구하라의 목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 이런 사실 관계가 내 눈물의 출처일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여러 사례를 경험해온 내가 어째서 카라에 한해서만 영문 모를 슬픔을 느낀 걸까? ‘Hello’가 연상시키는 최근의 몇 전례로는 작년 발표한 비틀즈의 마지막 싱글 ‘Now And Then’이나 종현의 작고 이후 샤이니의 첫 음반에 수록된 ‘네가 남겨둔 말’ 정도를 얘기할 수 있다. 비틀즈의 경우 멤버의 사후 목소리를 포함했다는 점을, 샤이니의 경우 남겨진 멤버들의 추모라는 점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 두 음악에서 느끼는 감흥과 ‘Hello’의 사례는 미묘한 차이를 지닌다. AI를 이용해 대부분이 손실된 존 레논의 녹취를 복원한 비틀즈와는 비교적 정상적인 여건에서 녹음된 원본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다르고, 종현의 추모를 주제로 작곡/작사를 포함한 전적인 작업이 이루어진 샤이니와 비교해 카라는 미발표 곡에 재착수하여 얻어낸 결과라는 것이 달랐다. ‘Hello’의 존재와 구하라의 음성은 모두 그의 생전 어느 시점을 생생하게 가리키고 있기에 유별나게 다가온다.
떠난 동료를 호명하고 지난 시간을 소환하는 형식. 여기서 ‘Hello’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진실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 된다. 청각적 규격 안에 갇히지 않음으로 일종의 이벤트이자 행위, 혹은 사건이 되는 셈이다. 그것은 초혼에 가깝다. ‘WHEN I MOVE’에서 보여줬듯 여전히 대중적 성공을 거머쥘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10여 년 전 미발표 곡을 굳이 끄집어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카라의 주안점은 다섯 멤버가 함께였던 과거의 자신들을 현재로 불러내어 추억하는 일이다. 그 앞에서 음악은 단지 도구로 전락한다. ‘Hello’와 ‘좋은 음악’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 어휘가 된다.
사변 끝에 다시 음악을 재생한다. 10년도 더 전에 쓰였을 노랫말과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작별을 위한 첫인사. 조금 무모할지 모를 이 말들이 좋다. 구하라가 세상을 등진 후 새로이 만난 다섯 멤버는 그와 함께 함으로 완전해져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Hello’라는 인사말은 구하라에게 보내는 초대장이자 비어있던 자리에 대한 고별이며, 이로 인해 카라는 비로소 온전한 6인 체제를 맞았다. 앨범 아트 속 맞잡은 다섯 쌍의 손. 그 모든 손길 위를 감싸 쥐는 넓고 청아한 하늘. 그곳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6번째 멤버의 손끝이 비단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