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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준 <선모>

by 이승원|

cover image of 우희준 <선모>
우희준 <선모>Self-Released

“Every separation is a link”

  • Simone Weil

우희준의 음반은 언제나 해석을 요한다. 문학, 철학 방면의 폭넓은 관심과 이해를 가진 그녀의 글은 종종 많은 문학적 비유와 철학적 상징, 심리적 성찰로 점철되어 있다. 그녀의 소리 역시 그 자체로 즉각적인 이해나 모더니즘적 경탄을 유발하는 류의 소리가 아니며, 그렇기에 그녀의 작품은 일련의 해석 과정을 통해 표상보다 더 깊이 이해될 수 있었다. 그녀의 작품이 흔히 시에 비유되는 것 또한 그런 이유이며, 데뷔작 <심장의 펌핑은 고문질>의 경우 역시 인간으로서 그녀가 느끼는 수치심에 대한 시의 모음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그녀의 직전 EP, <아, 진실이라는 모래알이 내 발밑을 찔러서 따갑다!>의 경우는 그녀의 이러한 서술적 특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작품이었다. 아베 코보(安部公房)의 <모래의 여자>(砂の女)를 기반으로 한 이 앨범에는, 해당 소설을 읽지 않고서는 단번에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과 난해한 소리들이 가득했고, 그래서 우리는 작품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글과 소리를 ‘해석’해야만 했다. 때때로 소리 그 자체로서의 감상을 집중적으로 요하는 작품도 더러 있긴 하지만, 저의의 존재가 분명한 우희준의 작품은 분명 그런 류의 작품과는 거리가 있었고, 그녀의 작품을 그 자체의 인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작품이 가지는 탐구적 재미를 놓치는 일이었다.

<선모>

그녀의 두 번째 정규작인 <선모> 역시 그녀의 이전 이력처럼 다양한 문학적/철학적 비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작품이다. 마광수의 검열작 <즐거운 사라>를 투영한 5번 트랙 ‘즐거운 사라’나 앙투안 볼로딘(Antoine Volodine)의 <미미한 천사들>(Minor Angels)을 연상시키는 클로징 트랙 ‘미미한 천사’는 대표적이며, 이들 외에도 다양한 상징어들이 작품의 의중을 한 꺼풀 덮어 가리고 있다. 나아가 본 작품은 ‘즐거운 사라’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트랙이 가사가 없거나 그 존재를 명확히 탐지할 수 없는 연주곡으로, 이해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언어적 요소조차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작품을 온전히 인상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위한 단서는 작품의 소리 이외에 없으며, 그것만으로 그녀의 의중을 온전히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심지어 <모래의 여자> 정도만 읽어 보아도 이해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전작과 달리 본작은 다양한 출처의 상징어들이 트랙 타이틀의 형태로 난분분하게 분포되어 있다. 결국 우리는 그녀의 저의를 탐지하기 위해 이 난분분한 문학적 상징을 해석할 필요가 있고, 나아가 작품의 개인적 배경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해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정보는 그녀의 최근 개인사에서 찾을 수 있다. 몇몇 인터뷰에서 그녀는 <선모>를 실제 한 친구에 대한 작품이라 밝히며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우희준에게는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선모>라는 타이틀은 우희준 본인과 해당 친구가 함께 쓰던 릴레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며, 본 작품 내에선 그 친구의 인격에 선모라는 단어가 투영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본 작품이 죽은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 의식에서 출발한다고도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친구 선모는 그녀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희준의 소개글에 따르면 그는 하루에도 몇 개의 삶을 살아 시인이 딱 적성에 맞던 사람이었고, 우희준은 그런 그를 위해 기꺼이 철학자가 될 심산이었다. 작품의 우희준은 이런 둘의 상호보완적 유대를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Sappho)와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에 빗대어 회고한다. 선모는 그녀에게 사포 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선모에게 시몬 베유 같은 존재였을 것이라, 우희준은 그렇게 그와의 관계를 되짚어보며 작품의 운을 띄운다.

시인 선모는 왜 세상을 떠났을까. “너를 위해 갖기로 했던 재능들이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친구를 사포로 믿기 시작했다는 그녀의 문장과 여러 연구들이 추정하는 시인 사포의 실제 사인을 통해 그의 사인을 조심스레 자살로 추측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죽음이 자살인지에 대한 여부가 막상 본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정보라 느껴지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선모>의 우희준은 실제로 죽음의 구체적인 과정이나 경위, 실재적 서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작품을 전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소리에는 설명이 없고, 존재가 있다. 작품 내에 유일하게 생동하는 배경은 사랑했던 친구가 현세를 떠나버렸다는 부재의 사실 그 자체이며, 작품에는 그 비통함과 애도의 공기만이 묵직이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실제로 <선모>의 우희준은 친구가 죽은 경위나 사연보다는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변화된 세상에 집중한다. 시인 사포뿐 아니라 사포(沙布)와도 닮은 구석이 있던 선모가 떠난 세상에는 모든 언어가 날카롭고 아프다. 복잡한 어려움으로 세상의 날카로운 언어들을 포용하던 그가 세상에 없으니, 조금의 치찰음마저도 너무나 아프게 느껴진다. 이 맥락에서, ‘제가 곧 나으리다’라는 우희준의 말은 그녀 본인을 <한 말씀만 하소서>의 박완서와 병치시키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고, 선모를 새 시대의 사포로 규정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던 그녀의 행동 역시 비통한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을 잃었던 박완서 작가처럼 큰 비통함을 가진 글쓴이이자 시몬 베유의 궤적을 존경하는 철학인으로서, 그녀는 그녀만의 방식대로 아픔을 극복하려 했을 것이다. 그 방법의 일환으로, 그녀는 마치 세상을 두 갈래로 구분지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수직선상의 비유’라는 개념은, 이 시각에서 존재와 인식, 가시적 세계와 가지적 세계를 선분 위에 구분했던 플라톤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선모의 육신이 생명력을 잃은 가시적 세계와 그의 영혼이 여전히 지각의 틀 안에서 존재하는 인식론적 세계, 그녀는 세계를 이렇게 두 갈래로 구분함으로써 친구가 사라졌다는 부재의 감각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지고, 그 고통을 경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식론적 세계에서 비로소 친구와 다시 대담한 그녀는 언어의 기능을 잃어버린 친구를 위해 의도적으로 언어를 비우고 대신 침묵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내 입에는 더이상 말이 없지만, 이 침묵만이 진실히 사랑을 말해”라는 선모의 말 때문일 수도, 조금의 치찰음마저도 아프게 느껴지는 현실의 고통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게 언어를 내려놓은 그녀가 새로이 선택한 대화 수단은 그녀의 또다른 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콘트라베이스로, 콘트라베이스 현의 묵직한 진동을 통해 우희준은 인식 속 선모와 입을 맞대고 내밀한 침묵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콘트라베이스 현의 진동과 마찰, 그리고 정지로 행해지는 침묵의 언어는 일견 온화하고 침착하지만 어딘가 집요하고 서늘한 구석이 있다. 만약 작품이 선모를 향한 단선적 애도에 머무르는 작품이었다면, 소리의 이러한 이중적 질감은 서사적으로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 서늘함이 그녀의 저의 혹은 대화 내용과 연관되어 있음을 암묵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세상을 떠난 본인을 비통히 그리워하는 우희준의 모습을 선모는 과연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선모>의 우희준은 친구의 멈춘 심장을 향해 돌아오라 부르짖기도, 남쪽으로 와달라 울부짖기도 하며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탁들을 쏟아낸다. 친구의 빈 자리를 절실히 느끼며 그의 죽음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고 사포라는 신화적 인물을 빌려 그의 인격을 상징화하는 모습은 마치 고통에 사로잡힌 자의 애처로운 방어기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의 날카롭고 아픈 언어들을 포용하던 선모라면, 이런 그녀의 아픔을 시인만의 방식으로 해소해주지 않았을까.

소설적인 진실

작품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소설적인 진실’은, 이 맥락에서 그 해소의 과정과 화자의 깨달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어휘라 할 수 있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Mensonge romantique et Vérité romanesque)의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욕망의 삼각형 도식을 통해 욕망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그 대상을 욕망하게 만드는 타자가 숨어있다 지적했다. 아마디스를 통해 궁극의 기사를 꿈꾼 돈키호테나 예수를 모방함으로써 구원을 꿈꾸는 개신교도들처럼, 모든 욕망은 주체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매개되고, 또 촉발된다.

우희준이 진정 욕망하는 것은 선모의 부재가 앗아간 현실의 행복인가, 아니면 선모의 존재 그 자체인가? 우희준이 인식의 영토에서 마주한 선모는 어쩌면 그 침묵의 대화를 통해 그녀의 왜곡된 욕망 속에 그 타자적 매개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선모 본인이 그 욕망의 타자적 매개체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일깨워줬을지 모른다. 떠나간 선모의 존재를 절대화·상징화하고 그를 처절히 그리워하는 그녀의 낭만적 거짓은, 아마 진실한 사랑과 행복이라는 욕망의 본질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상징화된 친구 선모는, 이렇게 침묵을 통해 스스로 욕망의 삼각형 도식에서 물러나 그녀에게 타자화된 욕망의 실체를 마주하게 했다는 점에서 르네 지라르가 말하는 ‘위대한 소설가’로 불릴 자격이 있을 것이다.

“상상 속의 악은 매혹적이고 다채롭지만 실재하는 악은 지루하고 단조롭다, 반대로 상상 속의 선은 따분하지만 실재하는 선은 늘 새롭다”

  • Simone Weil

그렇게 상상 속의 악에서 벗어나 실재하는 선을 마주한 우희준의 침묵 <선모>는 그 끝에 친구 선모를 ‘미미한 천사’로 규정하며 마무리된다. 살아남은 우희준의 고통, 방어기제와 함께 사포라는 과장된 기표로 상징화되어 그녀의 실재적 선을 가로막고 말았던 선모는 그렇게 비로소 미미한 천사로서 마지막 축복을 그녀에게 내린 채 비존재의 영역으로 행진한다. 마치 ‘즐거운 사라’처럼, 매혹적인 상상으로 세상을 속이는 재능이 없었던 선모는 어쩌면 실재의 선을 마주하는 희귀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까.

<미미한 천사들>의 앙투안 볼로딘이 본인의 사조(앙투안 볼로딘 본인은 사조가 아니라 주장한다.)인 포스트엑조티시즘(post-exotisme) 텍스트 ‘나라(narrat)’를 설명하며 쓴 글을 빌려보자. “어떤 상황, 감정을 포착해서 고정해 주는, 기억과 현실 사이, 상상과 추억 사이의 흔들림을 포착해서 고정해 주는 소설적 스냅사진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무(無)를 향한 행진을 재개하기 전에 잠시 쉬어 갈 수도 있는 짧은 곡(曲)들”... 이 표현들은 물론 ‘나라’라는 텍스트를 설명하기 위한 글이지만 어쩐지 같은 표현을 <선모>에 갖다 대 보아도 그리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아니, 어쩌면 이보다 <선모>를 적확히 설명하는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우희준의 처절하고 애정 어린 침묵을 담은 15개의 나라(narrat) <선모>는, 친구의 죽음을 겪은 우희준의 상황과 감정을 포착하여 고정해 주는, 그녀의 기억과 현실, 상상과 추억 사이의 흔들림을 포착하여 고정해 주는 소설적 스냅사진들이며, 사랑하는 선모가 무(無)를 향한 행진을 재개하기 전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도록 하는 우희준의 짧은 곡(曲)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