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LL REVIEW

오랜 침묵이 촉발한 자기표현, 로지 로의 <Lover, Other>

by 권도엽 | 

cover image of Rosie Lowe <Lover, Other>
Rosie Lowe <Lover, Other>Blue Flowers Music

영국 남쪽 말단에 위치한 데번주의 엑시터라는 도시가 있다. 교육도시이자 영국 내에서 유난히 치안이 좋으며, 멀지 않은 곳에 강과 바다, 보호지역과 공원 등으로 도심에 비해 자연 친화적 분위기가 만연한 곳. 그곳에서 1990년대를 겨우 며칠 남겨둔 1989년의 크리스마스이브에 한 아이가 태어난다. 뜬금없이 머나먼 장소의 회고로 운을 띄우는 것은, 이 글이 평전 같은 걸 지향하기 때문도 아니고, 로지 로가 국내에서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기우에 주마간산으로 소개하려는 심산도 아니다. 단지 그의 신보 <Lover, Other>에 관해 쓰기 위해서는 여기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막연한 직감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나열할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앨범 표지를 뒤덮은 주황빛 사이 고개 내민 로지 로의 얼굴, 다른 여러 초상이 입체적으로 콜라주 되어 있는 뒷면, ‘나’로 읽히는 대부분의 가사 속 화자,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까지의 디스코그래피 중 제작 전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본작이 ‘나답지 않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다는 발언. <Lover, Other>는 로지 로에게 유례 없던 자기표현의 장이자 과거와 현재를 엮어 음악으로 쓴 일기장인 셈이다.

cover image of Rosie Lowe <Lover, Other>
Rosie Lowe <Lover, Other>Blue Flowers Music

로지 로는 엑시터의 환경이 암시하듯 TV 하나 없는 목조주택에서 흔한 시골 생활로 유년을 보냈다. 나무를 자르고 채소를 땄으며 디지털보다 아날로그를 선호한다고 말하는 그의 음악은 뜻밖에도 전자음을 토대로 한다. 더군다나 목가적인 시절을 전혀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진취적인 시도와 유연한 구성으로 매 음반을 꾸려왔다. 타국에 비해 실험적 색채를 띤다는 브리티시 소울의 넓은 의미에서의 지역적 영향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사실 그의 이번 앨범 앞에서 장르를 논하는 것은 무용하다. 그것은 얼터너티브 R&B니, 브리티시 소울이니, 브레이크비트니 하는 장르명이 지나치게 경직된 탓이다. 그의 모든 장르명 뒤에는 몇몇 수사가 덧붙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느림’이나 ‘절제’ 같은 단어다. <Lover, Other>에 이르러 이 단어들의 인상은 더욱 강화되며, 전자음악에 대한 일반적인 고정관념과 거리가 먼 이 말들이 그의 어릴 적을 연상케 함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가 대학 시절 단 하나의 악기로 곡 전체를 채워야 하는 프로젝트에 자신의 목소리를 선택해서 참여했다는 일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내 생각에 그는 특별히 보컬에 자신이 있었다기보다 그것으로도 충분하겠다고 여겼던 것 같다. 유년기와 학창 시절을 거쳐 도달한 지금에도 로지 로의 음악은 화려함보다는 충분함을 향한다. <Lover, Other>를 들을 때면, 여기서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겠다, 하는 알량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마치 한 사람의 유구한 개인사처럼 우뚝 서 있다. 

이쯤에서 로지 로의 이번 앨범을 목가적이라고 표현하는 무례를 범하려 한다. ‘Gratitudes’에서 보사노바를, ‘Don't Go’에서 아카펠라 요소를 경유해 표제작 ‘Lover, Other’에서 인스트루멘탈에 도달하는 감수성의 여정은 이전보다 훨씬 투박하고 느긋한 매력을 갖추고 있다. “완벽주의에는 자유가 없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자신이 활약하던 인공적인 장르로 오히려 날 것의 정서를 향한다. 녹음 과정에 끼쳐오는 잡음을 포용하고 사랑과 평화, 올바름에 관해 노래하는 것이다. 다만 <Lover, Other>이 아주 새로운 시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한 가지 더 알아가야 할 대목이 있다.

<Lover, Other>이 로지 로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이력은 팬데믹 이후 첫 발표작이라는 점이다. 그의 직전 앨범은 듀발 티모시와 함께한 2021년 작 <Son>이었고, 여기서 로지 로는 콜라보라는 특수성과 사회적 격변을 맞아 이례적인 작업을 감행한다. 아카펠라와 사운드스케이프, 거친 녹음 상태와 돌출하는 기악의 층위 등의 원형은 모두 이때 미리 ‘실험’되었고, 이는 곧바로 기존의 로지 로의 음악적 경향과 맞물려 <Lover, Other>에 부드러운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전사를 알고 나면 트랙 리스트 최전방과 최후방을 도맡은 ‘Sundown’은 음반의 정체성이자 아주 내밀한 담화가 된다. 찬송처럼 들리는 이 곡은 팬데믹 기간에 자살한 친구 스티브에게 바쳐지고 있으며 노랫말은 절절한 안녕을 고하고 있다. 그런데 “Reprise”로 재수록된 마지막 트랙의 경우 뒤에 다른 가사가 몇 구절 뒤따른다. 절대 나를 떠나지 말라는 부탁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로지 로는 친구와 작별하는 동시에 좀처럼 마음을 말끔히 비워내지는 못했고, 그 잔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응어리지기만 했다.

어렴풋한 짐작이지만 이런 식으로 <Lover, Other>를 헤아려볼 수 있다. 팬데믹 이전에 화려하고 인공적인 로지 로의 음악이 있었고, 팬데믹과 친구의 죽음을 맞아 그것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로지 로가 있었으며, 팬데믹이 지난 후 그것을 털어놓는 로지 로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Lover, Other>는 개인적인 감상과 유년기의 풍경까지도 전부 포괄하는 두꺼운 일기장 한 편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운드를 통해 은연중에 드러나기도 하고 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수많은 것들이 발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Sundown’) 즉, 이 일기장의 뒤쪽 페이지는 여전히 백지상태다. 로지 로는 그 상태로 일기장을 우리 앞에 두고 떠나버린다. 37분이 지나고 이제 스피커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적어야 한다. 지난 몇 년간의 아픔이 ‘날 떠나지 말기를’(‘Sundown’) 바라며. 우리가 사랑한 것들(“Lover”)이 다른 어떤 것들(“Other”)로 소외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미련할 만큼 토속적인 이 감정이란 아날로그를 꿈꾸며. 모든 것을 짊어지고 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Lover, Other>는 상실에 대한 로지 로의 개인적 기록이자 듣는 이에게 잃은 세월을 기록할 여백의 선물인 것이다.

© 2024 overtone. Designed by Dain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