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부터 감상자의 태도는 보안검색적이다. 사람들이 예술에 ‘진짜’라는 허망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 물리적으로 인식할 대상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고차원적 개념예술을 멸시하는 동시에 그에 반하는 상업 예술의 수용 역시 거부한다. 이를 힙스터라고들 하고 홍대‘병’이라고들 부르는데, 논점은 이 같은 조롱에 있진 않다. 논점은 예술을 규정하는 일이 무의미하고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 이면에, 개개인의 미적 가치관을 형성할 때만큼은 그런 담론이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관 서술로 해서, ‘내가’ 생각하는 ‘진짜’ 예술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원초적으로 고려할 만한 문제다. 예술을 옥죄기 위해서가 아닌 자아 형성의 일환으로 견해의 각축장인 예술에 참여하는 일이다.
유독 이런 경향이 강하고도 오랫동안 이어져 온 지대는 아무래도 대중의 수요가 전폭적인 대중음악이다. 그중에서도 꼽아보면 국내 힙합의 두터운 커뮤니티 층을 언급할 만하다. 국내 힙합은 음악의 안으로나 밖으로나 유구한 논쟁의 역사를 지닌다. 자극적인 노랫말이나 멋들어진 아티스트의 차림새 때문만은 아니다. 힙합 씬의 부활이나 도약을 위해 자행되는 일이 디스전과 같은 일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힙합이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말’과 깊숙한 관계를 띠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논쟁을 낳는 것은 논쟁이다. 힙합은 견해의 가장 직접적인 각축장이다.
그렇다면 ‘리얼 힙합’이란 당최 무엇인가 하는 수많은 견해에 선진과 격이 어떻게 답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놀랍게도 그들의 견해는 선문답에 가깝다. 풀이 죽은 힙합이 잃어버린 것은 그야말로 ‘말’이었다. 본질의 상실. <패솔로지>는 그것을 가짜가 아닌 다른 것으로 부를 수 없게 만들고, 비로소 ‘말’이라는 형식을 통해 ‘말’한다. 선진과 격의 이름 아래 직접 행해지는 말과 ‘시대에 기대어’와 같은 트랙에 노골적으로 싹튼 다른 누군가의 말. 그런데 여기서 이 두 발화는 대치한다. 고통과 암울을 쥐어짜듯 뱉어내는 선진과 격의 목소리 외에 인용된 목소리는 앨범에 의해 비판받을 만한 내용을 발언한다. 두 ‘말’은 싸운다. 이는 필연이다. 구어의 이데올로기는 격전이다. 문어는 기본적으로 단정적이고 차가운 표현법이기에 청자를 몰입시키거나 체험시키는 반면 구어는 듣는 이로 하여금 참여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토론. 구어는 문어보다 명확한 화자를 전제하는 주관적 서술법이다.
멀리서 보는 것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는 것이 비극이라 했던가. 이 말을 바꾸어 간접은 희극이고 직접은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시대에 기대어’에 인용된 목소리는 충분히 엄중한 조언으로 존중받는다고 보기 어렵다. 사랑을 빙자한 억압과 위선. <패솔로지>는 이 조언을 거부한다. 내면에서 내뱉어지는 말이 아닌 들려오는 말에 대한 반발이다. 저항성을 대표하는 장르 속 자명한 본질의 복권이다. 인위적이고 화려한 대신 묵묵하고 생동감 있게 나아가는 비트는 노랫말을 돋보이게 하며, 거기서 느껴지는 찐득한 그루브 역시 사회와 음악을 접착해 두려는 “이번 생을 향한 결지”(‘본질’ 중) 같다.
그런데 이 결지는 위험하다. 이 결지가 등지는 인용된 목소리란 “부모님의 가르침, 윤리와 사상”(‘300 Nursery Ryhmes’ 중)의 유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대중의 목소리이고 사회에 만연한 목소리이다. 이 점이 <패솔로지>를 “대중음악이 아니”(‘매체’ 중)게 만든다. 그는 성찰을 위해 대중은 물론 자신의 자아와 과거사까지 물색하며 헤집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가 생각하기에 “디스토피아는 집단의 획일화”다. 말하는 법을 잊은 힙합은 “신념과 교환한 마취제”다. 마취제 대신 신념을 택한 그는 세상의 만연한 이들을 전부 뒤로 한 채 온전한 고독으로 침전한다. 이때 한 문장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번에도 인용된 것이지만, 이번에는 목소리가 아니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 서면으로만 남은 목소리다. 사르트르의 그것은 “타인은 지옥”이라는 선언이다.
타인은 지옥인가? 타인은 지옥일 수 없다. 타인의 타인인 나 자신은 타인으로 명명 가능함에도 지옥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이 지옥”이라는 명제는 결국 연역적으로는 도출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객관 서술이 아닌 주관 서술로 변환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어쩌면 ‘타인’이라는 개념은 이를 내재한다. 다시 묻자. ‘나에게 있어’ 타인은 ‘나에게 있어’ 지옥인가? 그렇다. 그러고 나니 이런 논법도 가능해진다. 타인은 지옥이다. 세상은 온통 타인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지옥이다. 선진과 격의 고독은 이곳에 도착한다. 이곳은 “다이나믹 코리아”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자유민주주의”(‘열등하기에’ 중)의 모토. 타의와 자의의 중요도가 비등한 사회의 원칙은 의견차를 인정하는 것이고, 문제는 거기서 비극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타인의 눈은 가시”다. 그리고 이 말 앞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첫 번째 깨달음이 비극과 동행한다. 이 비극의 토대를 우리가 직접 일구었다는 사실이다. “긍정과 부정 이전에 진실을 알길” 원치 않는 타인의 집합으로 중대사는 결정 나고, 그렇게 유토피아는 현실상의 것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린 허상으로 도망친다. 앨범의 주인공 역시 그렇다. ‘유토피아’의 화자는 “디스토피아라 불려지는 나의 유토피아”로 도망한다. 가사 속에서나 존재하는 그곳. 세상은 아직 이 음반의 마지막 트랙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이 현존하는 사회의 병리학이고 패솔로지다.
다시 음악적인 차원으로 돌아와서, 환상으로 도망친 음악을 마취제에 패배한 신념이라 비난해야 할까. 하지만 <패솔로지>는 콘셉트 앨범치고는 덜 오페라적이며 이야기보다는 말의 향연이다. 따라서 마지막 트랙을 결론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진상을 낱낱이 파악하고 아나키에 가까운 유토피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음반의 결말은 마취보다 개탄에 가깝다. ‘유토피아’는 사운드적으로도 전혀 황홀하지 못하다. 자조 섞인 농담 같은 말투. 극단에 가까운 공허. 지독하게 현실적으로 묘사한 세계관을 돌연 넘어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앨범이 탐구하는 병리학의 일환일지 모른다. “단지 태어난” “목적 따윈 존재하지” 않는 “지식의 저주”의 산물인 생의 피투성을 감내하지 못한 개인의 초상 혹은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현실이 이룩할 수 있는 최선의 유토피아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패솔로지>가 명시하지 않는다. <패솔로지>는 유토피아가 아닌 유토피아가 아닌 어떤 것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말’은 단서다. 그 말의 내용이 아닌 ‘말’이라는 형식이다. 중요한 것은 이기는 말이 아닌 더 나은 ‘말’이다. 스스로 “긍정과 부정 이전에 진실을 알길” 원치 않는 타인이 아닌 “긍정과 부정 이전에 진실을 알길” 원하는 타인이 되는 일. 그것이 나의 말이건 다른 이의 말이건, 타인이 본질적으로 지옥이건 지옥이 아니건 중요치 않다. 현대에 그 지옥문을 여는 것은 우리다. 열쇠는 그 지옥을 곧이곧대로 지옥으로 대하고 타도할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우리가 벌인 비극을 다시 우리의 손으로 거둘 수 있다는 자유민주주의의 또 다른 원칙. 나 또한 타인의 개념으로 편입될 수 있기에 역지사지의 논조로 타인이 필히 지옥이라는 객관 서술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이것으로 미뤄보아 진정한 견해의 각축장이 마련되는 곳이야말로 비로소 유토피아다. 다시 한번 서면의 말로, “이분법 사라지는 곳에 낙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