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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자르: Archivos de Radio Piedras, Piedras 1 & 2

by 권도엽 | 

cover image of Nicolas Jaar <Archivos de Radio Piedras>
Nicolas Jaar <Archivos de Radio Piedras>Self-released

니콜라스 자르의 행보는 난분분하고 가닥을 잡기 어렵다. 본명을 거쳐 다크사이드라는 이름으로 듀엣 활동을 하는가 싶더니 Against All Logic의 명의로 독립적인 커리어를 쌓기도 하고, 타 아티스트의 음반에 작곡이나 프로듀서로 크레딧을 꿰차는 건 물론 레이블의 창립자로 자리하기도 한다. 그렇게 산재하는 음악들은 실체만큼이나 혼란스럽다. 단 하나의 음반도 어느 다른 음반과 맞물려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정체 현상을 겪지 않게 하려는 데에 거의 강박적이고, 그 악착같은 기조는 늘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었으며, 칠레 기억과 인권 박물관의 피노체트 군부 독재 희생자를 위한 추모 행사의 일환에서도 역시 정진했다. 그는 이미 같은 주제를 전작 <Sirens>에서 다룬 적 있다. 그렇게 탄생한 곡 ‘Piedras’는 이내 라디오 연극이라는 새로운 매체로 개발되었고 올해 4월 <Archivos de Radio Piedras>라는 제목으로 밴드캠프에 공개됐다.

극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상의 칠레, 무정부주의 단체 ‘Los 0cho’가 인터넷 케이블을 공격해 라디오만이 유일한 매체가 되게 한다. 메타버스와 알고리즘 등의 급격한 기술적 진보가 현실에 대한 자각을 위협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계가 이미 이진법에 의해 나타나는 가상의 것이라는 발언을 한다. 영화 <매트릭스>와 매우 흡사한 설정이다. 모든 이야기는 살리나스 하스번이라는 실종된 예술가를 추억하는 라디오를 진행하는 두 사람에 의해 전개되며 틈틈이 살리나스의 노래와 Los 0cho의 성명이 삽입된다.

주제는 마지막 장인 17번 트랙 (피노체트 정권 집권 기간 17년과 본작의 트랙 수는 일치한다.) ‘archives_de_radio_piedras_017_-_un_nuevo_numero’에서 명료해진다. ‘새로운 숫자’를 발견하면 1과 0의 시스템을 벗어날 수 있다는 Los 0cho의 공지가 들려오고, 두 진행자는 그 숫자를 곰곰이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진행자 중 한 명이 숫자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며 그것이 ‘동굴 속의 연못’이라 말한다. 그는 연못이 숫자가 아닌 동시에 숫자이고, 세상의 달팽이관이자 무작위의 원천이라고 한다.

이 연못으로 말하자면 초반부에 연이어 등장하는 살리나스 하스번의 작품 ‘Desliz’의 극중극 속 공간이다. 내용은 이러하다.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이 사는 마을엔 물이 부족하다. 소년은 화재를 당하는 바람에 동굴 속으로 숨어든다. 화재 이후 소년은 마을 사람들에게 죽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소년은 동굴 속에서 살아간다. 동굴은 눈을 멀게 할 만큼 어둡지만 마을 전체보다도 물이 많은 곳이다. 이 우화는 낯익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뒤집은 듯한 이야기. 플라톤이 그려낸 동굴이 바깥과 단절되어 철학자에게 인도받아야 할 이들의 장소라면 살리나스 하스번의 동굴은 물이 있는 곳이다. 플라톤의 비유가 독재 정권에 걸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억압의 시대에 철학자는 동굴 속에서 활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성은 협소하고 어두컴컴한 지하에서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굴 속에는 물이 있다. 다시 말해 생명력이 있다.

우화가 끝나자마자 울려 퍼지는 살리나스의 노랫말은 더 의미심장하다. “우물 속에 물이 있다. 무기와 전쟁의 잔해도 있다. 그 안에서 시체가 휘파람을 불어도 놀랍진 않다. 양동이를 가져와라. 마셔야 한다. 목이 너무 말라, 우물 속에 핏물이 있더라도 괘념치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물은 물이 부족한 마을의 것 같기도 하고 우화 직후라는 배치 때문에 동굴 속 연못과 은근히 겹쳐 보이기도 한다. 조금 나아가면 피노체트의 발언으로 널리 알려진 “민주주의는 때론 피로 목욕을 해야 하는 것이다.”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물 속 핏물은 피노체트 정권의 희생자의 것이 된다. 약 3197. 피노체트 정권 내내 공식적으로 추산된 사망자 수다. 연못이 숫자라고 할 때, 그 숫자가 3197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cover image of Nicolas Jaar <Piedras 1>
Nicolas Jaar <Piedras 1>Self-released
cover image of Nicolas Jaar <Piedras 2>
Nicolas Jaar <Piedras 2>Self-released

<Archivos de Radio Piedras>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탓에 궁금증을 깨끗이 처리해 주진 못했다. 니콜라스 자르는 이를 배려했는지, 연극 공개가 반년 정도 지난 10월에 음악을 추려 <Piedras>라는 제목 아래 두 편의 앨범을 발표했다. 연극으로 개발되기 전 모든 프로젝트의 시발점이었던 ‘Piedras’의 이름을 되찾고 서사를 덜어내며 보다 음악적 구현에 몰두한다.

첫 번째 작품은 대다수가 살리나스 하스번의 작품으로 설정된 곡들이다. 그는 극 중에서도 칠레인으로 묘사되기에 니콜라스 자르는 ‘Mi Mujer’와 같은 트랙에서 은근히 드러나던 라틴 리듬을 적극 활용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 고유의 음악으로 입각하는 것. 이런 전자음과 라틴 리듬이라는 판이한 장르적 결합은 음악적 기원을 교란한다. 라틴 음악의 기본적 연주 위에 ‘전자음 필터’를 덧씌운 듯 요동치는 독특한 질감. 전부 다 세공되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하고 전부 다 연주되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예리하다.

삽입곡을 가져온 터라 노랫말의 정치적 함의를 지나칠 순 없다. ‘Rio de las tumbas’와 극 중에서 팔레스타인을 호명하며 생사를 논하는 가사는 최근 국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발생하는 여러 참극을 상기한다. 이는 단지 팔레스타인계 칠레가 아랍권 외 최다 팔레스타인 공동체라는 점에 기반한 사실 묘사 정도로 일축하긴 어렵다. 니콜라스 자르는 실제로 밴드캠프의 라디오 연극으로 얻은 수익을 마푸체와 가자 지구 지원 단체에 기부했으며, 앨범의 제목인 ‘Piedra’가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던 아이의 모습에서 영감받았음을 언급한 바 있다.

기획부터 음악적 특성, 그리고 사후 과정까지 철저히 정치적인 성향을 띠는 앨범임에도 두 번째 이야기 <Piedras 2>의 기조는 상이하다. 전자음을 고수하지만 라틴의 색채와 극적인 노랫말을 등지고 앰비언트에 가까운 음향을 구현한다. 분명 유별난 전환이지만 이를 형용할 때 변절이라는 낱말은 시기상조다. 극 전개의 키워드를 적어둔 듯한 트랙명은 앨범이 주제 의식을 등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동시에 그것으로 우리는 <Piedras 2>를 연극의 배경음악이나 막간음악 정도로 추정할 수 있지만, 라디오 연극 외의 매체로 재탄생한 음악을 그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다시 고찰해 볼 수도 있다.

<Piedras 2> 속 전개 상의 특징은 전반부의 앰비언트/사운드스케이프적 지향과 상반되는 후반부의 급격하고 날카로운 전자음이다. ‘SSS1’, ‘SSS2’, ‘SSS3’로 이어지는 마지막 세 트랙은 이전까지 고요하고 명상적인 소리와 대조하여 큰 파장을 지니는데, 이때 니콜라스 자르가 구현하는 것은 서사적이기보다는 정서적인 대상으로 보인다. 전편 <Piedras 1>에서 텍스트에 의한 밀도 높은 의견 피력을 행한 후 프로젝트는 본질로 회귀한 것이다. 그것은 애도이자 위령이다. 사라진 목소리는 묵념의 일환, 구슬픈 전자음은 진혼의 일부, 낯 두껍게 들이치는 자연은 상실의 통감으로 작용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니콜라스 자르의 추모는 침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어떤 소리를 발생시킨다. 이와 관련해 살펴볼 만한 라디오 연극의 대사 두 단락이 있다.

R: 우리는 잠시 한 사람의 삶을 기리고자 침묵의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살리나스. 2022년 10월 25일 실종된 살리나스 하스분 말입니다.

Z: 묵념의 시간? 왜?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잖아… 이봐, 살리는 그런 걸 싫어했어. (…) “죽음은 이미 충분히 고요한 것인데, 굳이 그 위에 침묵을 더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Z: 다음 작품은 “Dónde”입니다. R 씨, 작품의 뒷이야기를 좀 설명해 주세요.

R: 네, 아시다시피 군사 정권은 초기에 국민들과 라디오를 통해 소통했습니다. 기억 박물관은 당시 라디오를 통한 전송물을 일부 소장하고 있고, 살리나스는 그것들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목소리는 걷어내고 나머지만 남겨두었습니다.

‘Dónde’는 앨범에 수록되지 않았지만 위의 서술은 분명히 <Piedras 2>의 단서가 된다. 침묵이 아닌 침묵. 니콜라스 자르는 배경음마저 증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같다. 은연중에 황지우의 시 <묵념, 5분 27초>가 떠오른다.

‘Piedras’

바야흐로 원점이다. 이 유장한 기획들의 원형. 개별 트랙 ‘Piedras’를 제작 순서와 달리 마지막 챕터로 삼은 것은 필연이거나 의무였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Piedras’는 국어로 돌멩이를 의미한다. 니콜라스 자르는 본작의 제목을 이스라엘 군의 탱크에 날아드는 돌과 칠레 반정부 시위 때 시민들이 던지던 돌에서 착안했다고 말한다. 그 말은 어느 음악보다 프로젝트의 본질에 가깝게 들린다.

<Archivos de Radio Piedras>는 돌멩이와 관한 이야기를 별로 비중 있게 묘사하지 않는다. 단지 극의 시작과 말미에 살리나스의 ‘Desliz’의 일부가 수미상관 식으로 흘러나올 뿐이다. 이 노래는 극 중에서 굉장히 드물게 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사와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사물이 지나치지 못할 만큼 강조되는 점은 어딘가 수상하다.

“난 당신에게 이 돌멩이를 쥐라고 말하고 있어요. 아무런 대가도 필요치 않아요. 조금 무겁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죠. (…) 이건 돌이 아니에요. 이건 피리예요, 이건 돌이 맞아요, 잘 들어봐요, 이건 돌이 아니에요, 이건 무기예요, 이건 돌이에요, 이건 투쟁이에요.”

다소 횡설수설하는 듯하나 화자의 행위는 명백하다. 그는 돌을 쥐라고 누군가에게 요청하면서 돌의 정체를 어수선하게 규명한다. 노래 속 돌멩이가 니콜라스 자르의 발언 속 돌멩이와 일치한다고 보면 선동적으로 해석될 여지도 다분하다. 이어서 볼 대목은 극중 라디오에서 전파가 방해되는 동안 나타나는 목소리들인데,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죽은 빅토르 하라나 파트리시오 만스, 파쿤도 카브랄 등 여러 라틴 아메리카 아티스트의 노래를 포함한다. 이들 중 대부분은 정치적인 가사를 노래했다.

“이제 모두들 이미지를 가지고 떠났으면 합니다. 계단에 관한 이미지입니다. 그곳엔 전진하거나 올라서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머리를 짓밟고자 하는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단결한 젊음은 그 누구도 짓밟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래에 머물고자 합니다! 이 빌어먹을 계단이 파괴될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울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계단은 파괴되지 않을 것이다. 인류사에서 단 한 번도 계단은 무너진 적 없다. 완전한 혁명과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았다. 계단의 위 칸에 군림하는 자들에 의해 수많은 젊음이 피로 연못을 만들 뿐. 그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슬프지만 불가능하다. 한데 이미 숱한 비극을 목도한 칠레의 한 아티스트가 2024년에 굳이 “싸우고 또 싸울 것”을 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단을 올라 싸우고 추락하기를 반복하는 아둔함은 어디서 올까. 해답은 이미지에 있다. 이미지를 가지고 떠나면 된다. 이번에는 앨범에 관한 이미지다. 그곳엔 전진하거나 올라서기 위해, 그냥 그렇게 하기 위해, 전진하거나 올라서는 이가 있다. <Piedras 1&2>의 이미지. 저것은 시지프다.

지극히 미니멀한 형상에 과한 해석이 들어서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Piedras>의 앨범 커버를 보자마자 시지프를 직감했다. 심지어 ‘Piedras’라는 낯선 낱말의 의미를 알고 있지 않았을 때에도 그러했다. 신의 형벌로 영원히 돌을 이고 올라가야 하는 사람. 그리고 다시 떨어져야 하는 사람. 그리고 또다시 떨어진 돌을 이고 올라가야 하는 사람. 이 무한한 운동에서 기쁨을 발견한 사람이 알베르 카뮈다. 그는 저서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한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음이 그 자체로 유의미함을 설파했다. 카뮈는 존재하는 것을 즉시 기쁨으로 보았다. 존재한다는 것은 진실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완전무결한 삶 자체이자 한 치의 거짓도 묻지 않은 당장의 현실이다. 우리 현실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 그는 이것을 창조적인 반항이라 말하고 정오의 사상, 즉 아주 한낮의 사상이라 칭한다. 니콜라스 자르는 이런 이념적 전제 아래 우리를 맑게 갠 진실의 태양광 아래로 인도하고 싶어 한다. 암흑의 동굴 속에서 연못이라는 숫자를 발견함으로써 말이다. 그 연못은 연극에 드리운 미래지향적 세계관과 과거의 목소리를 현실로 치환하는 포털인 셈이다. 마치 달팽이관이 진동을 전기적 신호로 치환하듯, 이진법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실존의 토출구다.

Nicolas Jaar

‘Desliz’는 살리나스 하스번의 노래다. 살리나스 하스번은 2022년 실종됐다. 노랫말을 짐작하면 그는 새로운 숫자인 연못을 발견했고 1과 0의 세계를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똑같이 새로운 숫자의 위치를 알고 있었던 라디오 진행자 역시 결말부에 이르러 사라지고 만다. 이진법과 디지털 파시즘이 만연한 가상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현실에 걸맞게 자신의 이름을 고쳐 쓴다. 니콜라스 자르. 살리나스 하스번은 니콜라스 자르다. 같은 음악을 하고 다른 이름을 가진다. 과연 가닥을 잡기 어려운 행보다.

살리나스와 마찬가지로 음악의 이해를 위해 동원한 플라톤과 카뮈 같은 이름도 이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역사적 사실은 투과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가상이기도 하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기록과 현재다. 그러나 예술적 체험은 과거나 미래에 대한 고찰로 현실을 사유할 토대를 마련한다. 우리에게는 기원전의 플라톤과 20세기 카뮈, 그리고 2022년의 살리나스의 이야기를 들려줄 2024년의 니콜라스 자르가 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현실을 한 데 헤아릴 수 있는 저마다의 달팽이관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와 음악을 전부 듣고 난 후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물론 음악을 즐겼으니 그것으로 끝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가벼운 논제가 아니다. 이 글이 사운드를 중점적으로 논하진 않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본 라디오 연극에서 사운드적 요소는 핵심이 아니다. <Archivos de Radio Piedras>에서 사운드는 차라리 도구라고 해야 한다. 이것을 비판할 수도 있다. 그리고 보다 음악적 구현에 집중한 <Piedras 1&2>를 옹호할 수도 있다. 나는 이쯤에서 같은 주제에서 태동한 두 개의 작품을 서로 대치시키는 잔인한 상황을 제시한다. 텍스트로부터 인도받은 지독한 현실과 형체가 없는 사운드의 허구적 아름다움, 그것은 <Archivos de Radio Piedras>와 <Piedras 1&2>, 2022년의 살리나스와 2024년의 니콜라스 자르, 1과 0 혹은 새로운 숫자, 돌멩이를 드는 일과 내려놓는 일, 계단을 오르는 일과 부수는 일,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의 다른 이름이다. 두 세계 중 당신이 지지할 수 있는 세계는 단 하나다. 선택은 자유다. 그렇지만 그 자유란 것은, 역시 카뮈의 말을 빌려 말하면,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다. 니콜라스 자르의 프로젝트와 변형이 구축한 것은 결국 그 기회다. 당신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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