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SPO 돔 같은 대형 공연장에서 국내 밴드가 공연을 한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개장한 지 30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처음 입성한 내수 밴드는 故신해철의 넥스트(N.EX.T)였다. 넥스트의 베이시스트 김영석은 신해철 10주기 다큐멘터리에서 1995년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센 음악들이었는데, 그런 팀의 공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보러 왔다는 것 자체가 제가 그 무대에 그 당시에 있으면서도 낯설었어요.”
이 언급은 2026년 실리카겔의 경우에도 그대로 대입할 수 있다. 다소간 난해하다는 피드백도 직면하는 팀이 국내 초대형 공연장에서 퍼포먼스를 성료시킨 이틀은 여러모로 상징적이었다. 실리카겔 <Ballad of You>의 콘셉트가 생명과 사건의 반복을 그린 만화 <불새>에서 영감받았던 걸 헤아려 보자. 1995년 넥스트의 공연에서도 3집 곡들이 여럿 연주되었고, 실리카겔도 이번 공연에서 3집 전곡을 연주했다. 하나의 평행 세계를 보는 듯이 느껴졌다.
두 시간 무렵 공연 또한 평행 세계를 횡단하는 과정이었다. 새 앨범 시즌을 알린 2026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무대가 떠오르는 오프닝, 뮤직비디오에 기초한 ‘Dr. BOB’과 ‘Manphasickzuck’ 연출 등이 <Ballad of You> 활동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몰입할 여지를 더했다. 2017년 ‘NEO SOUL’을 리믹스해 EP에 수록했던 DJ 소울스케이프가 공연 전 디제잉을 맡았던 점, 마지막 곡으로 1집 타이틀 ‘9’를 연주하며 꽃가루 속 ‘헬로루키’ 우승 순간을 재현한 점도 실리카겔이 쌓은 무수한 과거의 조각을 집약한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Desert Eagle’, ‘Ryudejakeiru’ 등 기존 레퍼토리의 연주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쟁점은 이렇게 손에 익을 대로 익은 트랙과 신곡 사이 밸런스를 어떻게 맞추는가였다. 록 페스티벌 주역으로 거듭나게 만든 곡들 사이 임팩트를 신보로 끌어당기기, 그 미션을 각종 연출에 힘입어 당당하게 성공시켰다. 환각 속으로 뛰어드는 화면 끝에 최웅희의 베이스 솔로 후 협연이 인상적인 ‘Melatonin 88mg’, 피아노 솔로이던 ‘You Just Wanna Have Fun’을 전자 클라리넷과 기타가 이끄는 편곡으로 탈바꿈하고, 드럼이 없던 ‘Up Quark’에 드럼을 더해 사이키델릭한 매력을 배가한 전략 모두 뛰어났다.
가장 황홀한 경험을 남긴 신곡은 ‘Manphasickzuck’이었다. 기타와 베이스가 주도한 소리의 쾌감, 커다란 무대를 양껏 활용한 연출의 쾌거가 한 데 모였다. 하얀 배경에 나무 그림자가 자리 잡고, 그 위에 새가 반짝였다. 고대부터 아득한 미래를 횡단하는 만화 <불새>처럼 한 곡 안에서 배경을 여러 차례 바꿨다. 반짝이는 바다부터 노을, 숲속을 가로지르는 4분 사이 만감이 교차했다. 보컬 김한주가 역방향으로 터덜터덜 걷다가 곡의 피날레를 가창하던 모습은 앨범과 곡의 핵심 메시지인 ‘윤회’를 무엇보다 뇌리에 깊게 각인했다.
사진 출처 | Instagram @haanbink
‘불새’의 흔적이 <Ballad of You> 수록곡에만 머문 건 아니었다. 다수의 곡에서 불새는 곡선으로 휘어진 조명으로 그 날갯짓을 드러냈다. 가장 찬란하게 움직인 순간은 ‘Tik Tak Tok’에서 포착됐다. 인트로 ‘T’의 버튼 누르는 소리와 펼쳐진 빛의 향연, 신디사이저 음에 맞춰 화면을 채우던 사람의 형상이 기타 연주와 함께 새의 활공으로 바뀌었다. 공기 흐름처럼 여러 갈래로 찢어진 4인 합주와 새하얀 빛이 교차한 7분간의 비행은 관객이 가장 뜨겁게 화답한 순간이었다. 폭주하는 애드리브 끝에 모두가 기타리스트 김춘추의 이름을 외쳤다.
이렇듯 화려한 일대기에서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sister’, ‘APEX’, ‘BIG VOID’의 연속 타격을 택하겠다. 각각 정규 1, 2, 3집의 메인 테마를 한 데 배치하여 실리카겔 디스코그래피를 짧은 시간 안에 집약했다. 공연 내내 날갯짓을 펼친 곡선 조명은 ‘sister’에서만큼은 관객을 향한 손짓처럼 느껴졌다. 함께 환희를 즐기자는 손짓. 이후 ‘APEX’를 통해 분노를 남김없이 비우고, 무지갯빛과 컨페티를 쏟아내며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장식한 ‘BIG VOID’를 마치며 멤버들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행복하다는 표현을 잘 안 쓰는데, 지금 행복한 것 같아요.”
“저희가 한계를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저희만의 일이 아니라 많은 동료들의 염원을 담고 항해를 하는 느낌이에요.” 김한주가 대형 공연장 KSPO 돔에 입성한 소회를 밝히며 덧붙였다. 그 말처럼 군 전역 이후 거듭 전진한 실리카겔은 수많은 동료들과 협업 및 발전을 도모해 이 자리에까지 왔다. 이번에도 그렇다. 멤버들이 눈앞에 있어도 상단 스크린을 바라보게 할 만큼 멋진 영상을 만든 전재민과 김한빈, 내부를 감싼 향기로 후각을 채운 브랜드 러쉬(LUSH), 지난 공연에 이어 감독을 맡은 아지카진 매직 월드의 송기호 등 유수의 스태프가 음악 외 영역을 맡았다. 커리어 최대 규모의 무대에서 그 크기에 걸맞은 보폭을 만든 모두 덕분에 에너지를 양껏 충전할 수 있었다.
스테이지 가장 높은 곳에 멤버들의 초상을 중계하는 4분할 화면이 있었다. ‘Juxtaposition’이나 ‘Kyo181’의 후주에선 초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격한 연주에 열중한 멤버들이 떠오른다. 생각해 보면 실리카겔이 지금처럼 높아진 위상을 갖게 된 이유도 열띤 연주에 있다. 오직 소리를 좇는 탐구와 구현. 요령 없이 음반과 라이브의 퀄리티로 관객을 모아 상업적 성공의 지표로 인식되는 공연장을 채웠다. 그래서 더욱 반가운 쾌거였다. 2016년 400명을 수용하는 라이브홀에서 있던 하루의 단독 공연이 2026년 이틀간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찾아온 아레나로, 나아가 첫 아시아 투어로 성장했다. 항해는 계속된다.
조명과 VFX 등을 맡은 TEAM NODE 유튜브에서 콘서트 전체 무대를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