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의 창작 주기를 깨트린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의 <CHROMAKOPIA>는 예고와 동시에 수많은 추측을 낳았다. 그중 유력한 가설은 이번 음반에서 그의 새로운 페르소나가 나타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이전까지 본 적 없는 앨범 아트와 MV 티저 속 모습으로 인해 그런 예상은 더 힘을 입었다. 하지만 타일러와 페르소나라는 개념이 보다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단서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데이비드 보위의 <"Heroes">를 닮은 앨범 아트 속 타일러의 제스처. 일찌감치 페르소나를 대동해 음악 세계를 구축한 데이비드 보위에 대한 기시감은 정황 증거로 삼기에 손색이 없었다.
대중음악에서 페르소나, 더 넓게는 역할 놀이 개념은 별로 낯설지 않다. 대놓고 페르소나를 자처한 데이비드 보위의 사례를 차치하고 나서라도, 앨범에 서사를 불어넣어 다수의 등장인물을 생성하는 콘셉트 앨범, 정체를 숨기거나 계속해서 이름을 변경하는 아티스트, 전문 음악인이 아님에도 ‘부캐’라는 관습 아래 가수로 거듭나는 유명인 등. 서사적 요소를 체득하기 어려울 것 같던 음악 안에서도 캐릭터성은 매우 중요한 키워드로 떠올라 있다.
음악을 포함한 일부 분야에서 종종 얼터 에고(Alter ego)와 혼용되는 페르소나(Persona)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을 의미했다. 대중음악 안에서 페르소나가 쓰이는 방식도 본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배우가 배역에 맞추어 자신의 외관과 행동거지를 조절하듯 아티스트는 자신의 작품 속 음악적 색채나 주제에 맞추어 스스로 정체성을 결정한다. 이것은 음반을 개성 강하고 화려하게 만드는 동시에 미학적인 층위를 더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가사에서 특정 주제나 사건을 다룰 때는 직접 화자로 나서 짙은 호소력을 확보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데이비드 보위가 톰 소령이 되어 읊조린 ‘Space Oddity’는 드라마틱한 사운드와 함께 우주에 도달한 감격과 온 주변에 도사리는 공허를 추체험하게 한다.
페르소나의 활용도의 이해를 돕는 국문학의 아주 유사한 전례가 있다. 대중음악의 노랫말처럼 화자라는 개념을 공유하고 미학적 기둥으로 삼은 채 전진한 국내 시단의 한 경향과 세대. 권혁웅 평론가는 이를 “미래파”라고 불렀고 신형철 평론가는 이를 “뉴웨이브”라고 불렀다. 이들의 시적 세계는 화자 개념을 다원적으로 변주하거나 생성하고 해체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일군의 대중음악가와 비슷한 면이 있다. 다음은 각 평론가가 같은 세대의 시인들의 작품을 서술하며 작성한 글 중 발췌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은 중언부언을 중요한 발화의 방식으로 만들었다. 단형의 틀에 욱여넣기에는 시의 전언이 너무 풍부하다, 그들은 음악을 위해 전언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미지가 풍요롭다, 그들은 여러 화자를 무대에 올린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은 존재론적인 통찰에 자리를 물려줄 때가 되었다,” -권혁웅, <미래파>(2005, 문학과지성사)
“새로운 세대의 많은 시들에는 <나>가 없다. 그들은 자명한 <나>를 지우면서 미지의 <나>를 찾아간다. 자아의 나르시시즘을 넘어 점멸하듯 출현하는 주체성의 영역을 탐험한다. 더불어 타인의 타자성을 동일화하는 서정적 메커니즘을 거부하면서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위해 방법적 갈등을 격렬하게 실험하고 있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2008, 문학동네)
이들이 논하는 작품 속 화자는 계속해서 바뀌거나, 인지할 수 없게 되어있거나, 아니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일례로, “내 우주에 오면 위험하다/나는 네게 내 빵을 들켰다//기껏해야 생은 자기피를 어슬렁거리는 것이다//한 겨울 얼어붙은 어미의 젖꼭지를 물고 늘어지며/눈동자에 살이 천천히 오르고 있는 늑대/엄마 왜 우리는 자꾸 이 생에서 희박해져가요/내가 태어날 때 나는 너를 핥아주었단다”(김경주,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중) 같은 식. 화자의 변화 때문에 연극적으로 비치는 이 시는 김경주 시인 본인에 의해 희곡으로 각색되기도 했다. 이와 대조할 음악의 예시로 떠오르는 것은 MF DOOM과 Madlib이 Madvillain이라는 이름으로 합작한 앨범 <Madvillainy>의 수록곡 ‘Fancy Clown (feat. Viktor Vaughn)’이다. MF DOOM과 Viktor Vaughn은 실제로는 동일 인물의 다른 페르소나다. 자기 곡에 자기가 피처링을 한 셈. 가사는 더 가관인데, MF DOOM이 Viktor Vaughn의 여자친구를 뺏어서 MF DOOM을 디스하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본인이 본인의 여자친구를 본인이 뺏어서 본인을 본인이 디스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부모 욕까지 서슴없이 한다. 스스로 일인 다역을 맡아 펼쳐지는 이 가사 역시 다분히 연극적이다.
이런 전제에서 권혁웅 평론가의 “음악을 위해 전언을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일부 청자들에게 단순히 청각적 쾌락 이외의 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듯 간주되는 음악이 종합예술의 형태로 나아가는 현상과 겹쳐 보인다. 페르소나를 자처하는 음악가들은 청각을 위해 음악 감상의 종합적 판단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달까. 더불어 “이미지가 풍요롭다”, “여러 화자를 무대에 올린다”라는 표현도 페르소나를 다루는 아티스트의 비주얼적 탐미 성향을 연상케 한다. 데이비드 보위는 화려한 치장과 MV 연출에 몰두하는 글램록 아티스트였다.
피상적인 연상 말고도 특정 아티스트의 사례가 중첩해 보이는 대목은 “중언부언을 중요한 발화의 방식으로”, “자아의 나르시시즘을 넘어 점멸하듯 출현하는 주체성의 영역을 탐험”이라는 지점이다.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의 <CHROMAKOPIA>로 돌아와서, 그가 숱한 페르소나를 거쳐 자기고백적 어조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알아차린 것이다. 그간 점멸하듯 출현하는 주체성을 중언부언 쫓던 그의 본모습을. 한 사람은 하나의 정체성을 일대일로 내재하고 있을 수 없고, 타일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제각각인 정체성의 서술을 위해 그에 대응하는 캐릭터를 지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가진 다양한 면모의 해리적 형태는 전부 “자아의 나르시시즘을 넘어” 온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 본인임에 다름없었다. 우습게 말하면 그 어느 나라에도 타일러의 페르소나들은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실존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몇 가지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그 이름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이름 중 그 무엇이 진짜 <CHROMAKOPIA>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까.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 글쎄, 알고 있겠지만, 그의 가장 잘 알려진 그 이름마저 그의 실명은 아니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출발점을 회귀한다. 페르소나라는 낱말은 수많은 단어가 그렇듯 수도 없이 인용되고 사용되어 현재에는 더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페르소나’ 자신조차 페르소나를 지닌다고 생각하니 아이러니하다. 일례로 분석심리학의 대가 칼 융의 이론을 들어볼 수 있는데, 속한 사회의 요구에 따라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인간의 심리와 성격을 페르소나라고 칭했다. 말하자면 가족과 함께 있을 때의 나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상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해당 집단들이 각기 다른 사회적 역할을 내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힌트를 얻는다. 대중음악의 페르소나는 칼 융의 페르소나를 부분적으로 닮아 있다.
우리는 퀸이 계속해서 새로운 장르로 거듭날 때 평단의 냉담한 반응을 떠올려야 한다. 글램록에서 하드록, 오페라록을 거쳐서 디스코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는 장르의 디스코그래피는 고유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록 장르를 신앙처럼 떠받치던 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Hot Space>에 이르면 밴드의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마저 음반을 멸시한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소녀 팬의 열광에나 의존하는”(존 레논) 비틀즈를 단숨에 예술가의 지위로 격상한 <Rubber Soul>이나 전에 없던 현대적인 사운드를 들고 나선 더 후의 <Who's Next> 등. 이들은 기존의 성향을 어느 정도 탈피했다는 이유에서 격찬을 받았다. 퀸과 이들 둘 모두 고수하던 기풍을 뿌리쳤을 따름인데 듣는 이의 반응은 어떻게 이만큼 다를 수 있을까?
작가성이라는 단어를 개입시키면 납득은 쉬워진다. 퀸이 데뷔 이래 지속적으로 좇던 장르는 당대에 크게 유행하던 장르였다. 글램록이나 오페라록의 경우에는 비교적 초기작에서 드러나는 성향이기에 어떨지 모르겠으나, 디스코 앨범을 만들 때만큼은 그 속이 뻔히 보였다. 퀸은 밴드의 위태로운 시절과 함께 점점 유행에 편승하고자 했던 셈이다. 작가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비틀즈나 더 후의 경우는 오히려 작가성을 구축하기 위해 디스코그래피를 역전시킨 경우다. 비틀즈는 본래 음반에 커버곡을 집어넣거나 엘비스 프레슬리와 척 베리로 대표되는 본인들보다 한 세대 전의 로큰롤 음악을 즐겨 만들었다. 자작곡 비중을 늘려가며 자아실현의 욕망을 드러내던 그들에게 <Rubber Soul>은 처음으로 완전히 본인들의 작품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자작곡으로 모든 수록곡을 채운 첫 사례는 <Hard Day's Night>이지만, 앨범의 유기성이나 레논-매카트니를 제외한 멤버의 참여도 등을 고려하여 <Rubber Soul>이 주로 비틀즈 음악의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이 음반에서 등장한 다양한 악기와 음악적 실험은 추후 이어지는 비틀즈 사운드의 토대가 되었다. 또, 더 후의 <Who's Next>는 하드록에서 디스코로 변모한 퀸의 사례를 뒤집은 듯, 팝의 문법을 활용한 이전의 음반에 비해 다소 진중하고 세련된 형식을 선보였다. 이런 특성으로 <Who's Next>는 현재까지도 퇴색되지 않는 인기와 예술성으로 더 후의 최고작 입지를 차지하게 되었고 대중적으로도 매우 흥행하였다. 이들의 변화는 외면에서 내면으로, 작가성을 추구하기 위한 발판이었던 셈이다.
비틀즈의 레논-매카트니 명의 곡들을 두고 아직도 레논이 만든 곡이니, 매카트니가 만든 곡이니 논하는 것에는 다 저의가 있다. 평단이니 대중이니 할 것 없이 우리는 예술가에게 작가성을 원한다. 심지어 음악가 본인조차 그렇다. 존 레논 마저도 자신의 로큰롤적 지향과 폴 매카트니의 바로크 팝적 지향을 구분 짓는 발언을 자주 했으니까. 칼 융적으로 말해 음악이라는 사회는 예술가라는 개인에게 작가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 예술가의 꿈과 역량이 우리의 기대보다 비대한 경우에는 필시 한 음악적 테두리와 다른 음악적 테두리 사이를 건너뛸 수밖에 없다. 칼 융이 제시한 전제에 이대로 갇히고 말 것인가, 아니면 청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음악적 외도를 실천할 것인가. 돌이켜 보면 데이비드 보위는 이 질문에 아주 명쾌한 대답을 한 셈이다. 그는 서로 다른 음악적 역량을 서로 다른 이름을 통해 내보인다. 지기 스타더스트의 탄생이다.
음악가는 가면을 쓰기로 했다. 편향적 기대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비전을 충실히 수행할 분신을 생성한다. 그것으로 작가성의 훼손을 방지하는 동시에 미적 지향까지 달성한다. 각 페르소나마다 부여된 세계관과 설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감상자는 입맛에 따라 한 아티스트의 특정 캐릭터를 옹호할 수도 있다. ‘나는 MF DOOM보다 Victor Vaughn이 더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 둘이 동일인이라고 굳이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페르소나라는 개념에서 본체는 따로 나뉘지 않는다. 그들은 평행하고 동등한 관계에 있다. 그것은 가명(假名)이 아니라 이명(異名)이다. 여기서 같은 개념을 공유하며 문학에 종사한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게 된 가상에 대해 “그들이 진짜 존재하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았던 게 나였는지 그건 확실치 않네”라고 말하고, 리카르두 레이스라는 이명으로 발표한 시에서는 “나는 그저 느끼거나 생각하는 하나의 장소”라는 표현을 쓴다. 말하자면 그는 자아라는 장소를 상시 임대 내어놓는다. 칼 융의 말마따나 일상생활 속에서도 연신 페르소나를 갈아 끼우는 우리에게 사실상 본체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기에, 예술 안팎으로 우리는 수많은 페르소나의 집합(흄의 다발 이론을 떠올려 보자)으로 존재한다. 이제 페르소나의 의미는 한편 더 넓어진다. 얼굴 위에 덧씌워진 탈이라기보다 나란히 선 두 개의 얼굴. 이 정의가 비로소 첫 챕터에 남겨둔 질문에 대한 소견이다. 모든 페르소나는 동일선상 위에 있다. 그 무엇이 실체라기보다 그 모든 것이 실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