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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김민기 선생님을 추모하며

by 이예진 |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 선생님을 추모하며 main image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봉우리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김민기, ‘봉우리’ 中

“학전이 없어진대.” 선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 때 만난 디제이이자 포크계에 오래 몸담은 뮤지션이었던 선배는 ‘학전 살리기 프로젝트’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70, 80년대 한국 가요를 들으며 그 시대의 정서에 푹 빠져있을 때라 폐관 소식이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시대를 살지 않은 까마득한 후배인 나였지만, 우리 시대 포크 음악이 빛을 잃어가는 것도 모자라 대중문화의 산실이기도 한 그곳의 역사가 끊어질 위기라는 사실이 안타까워 뭐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없을지 찾아본 기억이 난다.

부고 소식을 접한 건 그로부터 일년이 채 흐르지 않은 지금 회사에서였다. 라디오를 떠나 새로운 분야의 일을 하며, 나는 가끔 내 감수성을 어떤 상자에 넣어두고 봉인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라는 첫 소절부터 시작해 노래에 얽힌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와 일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라디오 부스에서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방송하느라 닿지 못하는 바깥의 밤 공기가 살갗에 와닿는 듯했다. 청취자는 김민기를 통해 과거를 추억했다면, 나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절의 순수함과 쓸쓸함 같은 정서를 그렸다. 잠시 다른 시간을 걷게 만드는 위로의 목소리. 그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워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미뤄뒀던 SBS <학전 3부작> 다큐를 그날 챙겨 보면서, 나는 나만의 소심한 방법으로 김민기를 추모했다.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연약한 곳을 향하는 마음 때문에 많은 이들을 품었던 행보와 – 이를테면 공장 노동자들의 결혼식에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작사 작곡한 ‘상록수’나, 배곯는 연극배우들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노동 계약서를 도입했던 일, 매체 출연이 체질에 안 맞으면서도 학전을 위해 20년 만에 출연한 1990년 TV 인터뷰에서 지구의 환경 문제에 관해 이야기 했던 일, 반려견에 대한 애정을 담은 ‘백구’와 동료의 상실을 주제로 한 ‘친구’까지 – 시대를 초월하는 사람과 생명, 그리고 평화를 노래한 김민기는 대중을 위로할 숙명을 타고난 빛이었다.

그 섬광은 내게도 닿았다. 2016년 광화문에서, 영화 <1987>로도 제작된 전설 속 선배들의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내가 거리로 나갈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던 그 일이 현실로 일어났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우리가 남녀노소 불문하고 아스팔트 도로를 걸으며 함께 불렀던 ‘아침이슬’의 힘을 기억한다. 1971년 당시 미술학도였던 스무 살의 순수 영혼이 작곡한 이 노래가 대한민국의 굴곡진 역사마다 민중을 움직이게 할 정도의 힘을 발휘할 거라고는 창작자도 상상을 못했다. 돈, 명예, 권력과 같이 계산이 생존의 법칙인 이 사회에서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노래하는 예술가의 존재는 가히 위협적이었으리라. 재능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신나게 때려서 신나게 맞았다는 고인의 생전 인터뷰가 아프다.

나는 끝으로, 김민기라는 큰 산(山) 없이 ‘가을 편지’를 맞이할 첫 계절을 앞두고, “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작은 연못’ 中)라는 강렬한 가사와 함께 처음 그의 소리를 접한 유년 시절 음악 시간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 곡이 한반도를 은유한, 남북한을 연못 속 붕어 두 마리에 빗댄 곡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지만 그걸 알기 전에도 그 노래로 생긴 감수성이 훗날 조세희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으며 공명하게 만들었으니, 털끝만큼이라도 사회에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주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김민기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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