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El País) 우디 거스리의 기타
현재의 우리는 인류 탄생 이래 가장 빠른 기술적·문화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어느덧 우리는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이전의 일상을 떠올리기 어려워졌고, 한때 모두가 향유하던 플랫폼이 순식간에 뒷방으로 밀려나는 일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코로나19의 창궐은 사회와 문화의 어법을 뒤흔들었으며, 최근 몇 년 급격히 성장한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창작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수 세기, 수십 년을 주기로 변화하던 사회는 이제 수 년, 수 개월마다 급변하여 우리에게 그 소용돌이에 적응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원심분리기처럼 우리를 뒤흔드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또 어떻게 버텨야 할 것인가.
우리의 대중음악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음악을 만드는 방식, 유통하는 방식, 소비하는 방식은 지난 수십 년간 거듭된 변화를 겪었고, 새로운 기술과 문화는 그때마다 대중음악을 둘러싼 환경 자체를 새롭게 구성했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약 25년, 세기의 1/4이 지난 지금이 현 세기의 궤적을 돌아보기 적절한 시점이라 판단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이처럼 과거의 전철을 기록하는 일은, 앞으로의 변화를 가늠하기 위한 하나의 이정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이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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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상징은 화염병에서 응원봉까지 왔다. 소위 ‘촛불 집회’가 열릴 때 우리는 그것을 콘서트나 페스티벌에 견주는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결코 달갑지 않을 시위에도 현장은 지나치게 숭고해지기를 원치 않는다. 정치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과거에 그랬던 것보다 더 강하게 음악을 위시한다. 무장 투쟁 같은 것은 한국의 21세기와 동떨어진 말처럼 보인다. 기묘한 광경이 아닌가? 서로 다른 시선과 학문, 입장의 격전지인 정치는 쉽게 따라 부르면서 실천 가능하다. 더 기묘한 것은 정치가 음악을 여전히 활발하게 활용하는 반면, 어떤 음악은 정치로부터 멀어지려 악을 쓴다는 것이다. 음악인은 물론이고 매체 활동을 일삼는 유명 인사는 공적으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정치적 양극화와 미디어 발달로 격렬해진 여론은 극도로 자유로운 표현의 장에서는 어떠한 표현도 쉽사리 행할 수 없다는 역설을 일러준다. 카멀라 해리스를 지지한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트럼프가 한 “시장에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발언은 그 외 모든 유명인에게 해당된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발설하는 것은 그야말로 커밍아웃이라 할 만하다. 어느 한 쪽을 택하면 다른 한쪽에게 위협을 받아야 하는 판국이다. 당신의 정치 성향이 어찌 됐건 사람들은 당신에게 둘 중 하나에 속할 것을 강요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최악이다. 당신은 모두에게 버림받을 것이다. 그러니 멍청한 척을 해야 한다. 그런 건 잘 모른다고 둘러대야 한다. 그러면서도 매번 투표소에 얼굴을 비추어 모범시민으로 행동해야 한다. 참정권, 표현의 자유, 자아실현, 어떤 사람은 그것을 위해 죽기까지 했는데 어떤 사람은 그로부터 도망친다. 21세기와 민중 음악은 무장 투쟁만큼 머나먼 단어다. 20세기에도 부드러운 스탠더드 팝은 인기였지만, 저항 정신으로 무장한 음악가들은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감 없이 행사하면서도 주류 안에서 읽힐 수 있었다. 반면 현대의 음악가가 주류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산은 너무 험난하며 정체성을 감추는 일이 필연적이다.
음악은 본디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다. 원시에 사냥과 의식, 전투나 위험을 알리는 효과음으로 쓰였을 음향은 어느새 악기로 구성됨에 따라 노동, 단체, 종교를 위한 것으로 변모했다. 음악사 책을 펼치면 특정 사조마다 향유하던 계층이나 시대가 명시되어 있음은 당연지사다. 음악은 ‘딴따라’라는 멸칭이 나타나고 쓸모없는 일 취급을 받기 전엔 통념보다 훨씬 실용적인 매체였다. 교가나 군가처럼 시대의 음악적 환경은 매번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에 따라 재편성되었고 과거에나 지금에나 결속에 응용하기 좋은 도구로 자리했다. 민족 음악, 민중 음악, 세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음악 소비 패턴은 우리가 어느 집단에 결속되고자 함에 따라 상이한 기호에 의해 작용하며, 청자가 음악을 향유하거나 소비하는 방식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 평범하고자 하는 사람은 멜론 차트와 알고리즘 곁을 서성이고, 비범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런 음악이 ‘너무 쉽다’고 말한다. 물론 둘 다 악보 한 줄 읽을 줄 모른다 해도. 그러니 정치와 음악의 결탁은 너무 당연해서 언제부터 존재하게 되었는지 따져 물을 여지가 없다. 현대적 선거 로고송이 자리한 것은 모 언론 기사에 따르면 1952년 미 대선 당시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워의 사례가 효시라고 한다.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895) 같은 글은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기발한 선거운동이었다.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 재밌는 애니메이션과 쉬운 노래로 다가가니 친근함은 배가되었고 낙승할 수 있었다.” 선거 로고송의 역사를 논하는 글에서 매우 있을 법한 표현. 다만 놀랍잖은 이 문구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점은 한 국가와 시스템의 향방을 좌우하는 거대 담론에서도 “재밌는” 것과 “쉬운” 것, 그리고 “친근함”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음악, 그것은 정치의 가장 어렵고 지난한 부분을 유머러스하게 소화하고 은폐한다. 민주주의의 난점은 항상 대중의 무지와 관련하여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완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써먹는다.
음악은 일부 예술지상주의적 관점에서 가장 순수한 예술이라 불린다. 모든 예술이 음악적 상태를 희구한다는 오랜 격언은 음악의 가사나 작자의 전기와 같은 ‘맥락’을 추구한다는 뜻이 아닌, 음악의 기반이 되는 사운드의 표상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 미적 감각은 사회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것으로 논해지기 어렵다. 대상이 필요한 회화나 문학과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담아내는 정도에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회화나 문학에서 ‘리얼리즘’이라는 낱말이 가지고 있는 위압감에 비해 음악에서의 ‘리얼리즘’은 어색한 개념이다. 락이나 힙합은 곧잘 저항 정신과 결부하지만, 제목이나 가사, 배경이 붙지 않는다면 음악은 가장 급진적인 작업물조차 정치적 지향성을 띠지 못한다. 그런 속성은 왜곡을 용이하게 한다. 같은 북을 같은 장단으로 두드릴 때 그 광경이 광화문 앞에서 펼쳐지느냐 국회의사당 앞에서 펼쳐지느냐에 따라 역할은 바뀐다. 이것은 신화나 경전에서 언급할 법한 미의 위험과 현혹에 관련한다. 파스칼 키냐르는 <음악 혐오>에서 말한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이다.” 다음은 장정일 작가가 쓴 서평의 일부다. “나치가 체코에 세운 테레지엔슈타트와 폴란드에 세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음악이 흘러넘쳤다. 국제적십자의 사찰에 대비해야 했던 테레지엔슈타트의 경우 위장과 선전에 필요했기 때문에 수용자들의 음악 활동이 권장되었다. 하지만 오로지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아우슈비츠에서도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뉜 수용소 사령관들은 경쟁하듯 오케스트라를 육성했다. 4년 반 동안 대략 110만~150만 명이 살해되었다고 추산되는 아우슈비츠에는 최대 일곱 개의 오케스트라가 운용되었고, 가장 규모가 큰 중앙 수용소 오케스트라는 단원이 150명이나 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여러 가지 기능적인 이유로 쉴 새 없이 음악이 연주되었다. 먼저 열병식을 하거나 수용자들을 일터로 보내거나 복귀시킬 때 행진곡이 필요했고, 새로운 수용자가 입소할 때도 그들의 긴장을 풀어줄 음악이 있어야 했다. 탈출 시도자나 규율 위반자는 가스실이 아니라 공개 처형을 했는데, 이때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희생자를 비웃기 위해 흥겨운 유행가를 조롱조로 연주해야 했다. 예컨대 설운도의 ‘다 함께 차차차’ 같은 것을. (...) SS가 저런 야비한 주문을 한 이유는 자기 기만을 통해 죄책감과 살인의 심각함을 날려버리고 싶어서였다.” “수용소의 음악은 살인자를 정신적으로 마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우슈비츠의 고위 간부였던 요제프 멩겔레와 한스 프랑크가 가스실로 갈 희생자를 선별하는 작업이 끝나면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청해 듣고 감동하여 눈물을 보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아우슈비츠에서는 가해자 스스로 희생자의 연주에서 위로를 얻고 기분을 전환하는 셈이었다.” 음악은 상황에 따라 극단적으로 기능한다. 음악적 아름다움은 아폴론보다 디오니소스를, 디오니소스보다 세이렌을 닮는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452)
정치가 음악을 본의와 달리 활용한 사례는 더 찾아볼 수 있다. 1984년 미 대선에서 레이건 후보가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Born In The U.S.A’를 선거에 사용하며 전쟁에 반대해 당대 미국을 비판하던 노래가 미국에 대한 우상화로 거듭났다. 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허락 없이 여러 대중음악을 선거 유세에 활용하다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멜로디는 거부권을 행사할 줄 모른다. 만일 한 선거의 두 후보가 다른 요소에 있어 완벽하게 동일한 상태라면 선거송이 흥겨운 쪽이 승리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즐거움이 사회의 명운을 쥐고 있다는 인식은 낯설지도 않다. 현대 정치의 격전지인 온라인에서 이데올로기가 전파되는 방식은 유머, 음악, 영상과 밀접하다. 충분히 성장하기 전까지 탈정치화된 집단 취급을 받던 극우 커뮤니티는 한 정치 성향의 거점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가담하거나 경계하는 공간은 이제 현실이 아니거나, 이마저도 낡은 표현이라면, 어쩌면 다시 현실이라고 말해야 한다. 인터넷은 우리가 오프라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는 공간의 지위를 누린다. 인터넷은 가장 광장적인 밀실인 동시에 가장 밀실적인 광장이다. 스피커를 수놓던 목소리는 이어폰의 자리로 옮겨간다.
정치 커뮤니티를 향하는 가증스러운 시선은 그들을 다른 족속 취급한다. 세간은 커뮤니티 ‘일간 베스트’나 ‘디시인사이드’ 유저에 ‘일베충’이니 ‘디씨충’이니 하는 벌레의 칭호를 선사하고 매도한다. 스스로 정상성을 확고히 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혐오의 상징으로 거론할 때, 그것이 자신의 의도를 성립시키기에 별로 이롭지 않은 행위임을 간과한다. 혐오는 그들의 동력이다. 매도는 그들에게 ‘업계 포상’에 불과하다. 그런 게 그저 우스갯소리라고 한다면 정확히 그 말이 맞다. 다만 그 목록에 몇 가지를 추가해야 한다. 현대는 커뮤니티에서 오가는 농담뿐 아니라 언론, 젠더, 정치, 미술, 민주주의, 사고, 전쟁, 제노사이드 등 모든 소재가 코미디가 된다. 우디 앨런의 영화 <범죄와 비행>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코미디는) "비극에 시간이 더해진 것”이라고 말했죠.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던 밤에는 농담을 할 수 없었어요. 절대로요.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농담거리가 되었죠.” 시간이 비극을 농담으로 만드는 일을 정당화시키는지는 의문스럽지만, 적어도 요즈음의 농담은 먼 과거와 가까운 과거를 가리지 않고 농담으로 삼기를 즐긴다. 시간으로든 공간으로든 관계상으로든 당사자의 위치에 놓여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누군가의 슬픔은 희극으로 가장된다. 현대는 과거가 절대로 가능하지 않으리라 여겼던 세계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전쟁이 발발한 당일 전쟁을 소재로 농담한다.
이토록 많은 선결문제는 비추천을 받아 사라지고 없다. 합리성은 커뮤니티의 원리가 아니다. 현실 정치 안의 극우가 음모론과 반지성주의를 두둔하는 경우를 미루어 극우 커뮤니티의 밈 또한 논리에 개의치 않는 유희의 규범을 따른다고 보인다. (물론 이건 그냥 시대상이거나 편의상으로 드는 예다. 좌파라고 반드시 다르지도 않거니와, 애당초 이런 구분은 수십억의 정치 성향을 양분할 수 있다는 기막힌 아이디어의 산물이다.) 밈의 운동성은 밈을 커뮤니티 그들만의 것이 아니게 했다.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던 유희 본능에 커뮤니티의 밈은 모두의 밈으로 빠르게 전환했다. 고로 문화적 형식을 전달하는 일원으로 커뮤니티를 ‘그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대신 ‘우리’라는 표현이 시의적절하다. 분리주의적 시선은 그들이 정치라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셈 치며 담론의 대상이 될 수 없게 만드는 잘못을 저지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이 사용하는 인터넷 밈의 기원이 특정 정치 성향을 띠는 커뮤니티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밈이 전파될 때 청각의 역할은 통념보다 더 굉장하다. 묵음으로 일관하는 쇼츠가 얼마나 보기 드물던가. 어떤 음악은 자체로도 밈으로 간주된다. 근래 대중음악은 곧잘 일반 음원과 배속된 음원을 함께 발매한다. 소비 양상만 놓고 보면 둘 중 무엇이 원본이라 칭할 만한 것인지 단언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인터넷 음악은 우리가 정치 밈에 대해 정치성을 부여하지 않는 과오를 저질렀듯 충분히 음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충분히 음악적인 것과 충분히 음악적이지 않은 것의 구분은 아이러니하다. 음악성을 두둔하는 사람들은 원본의 존재나 실재하는 예술의 가치를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발터 벤야민이 무너졌다고 본 아우라의 폐허에서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듯한 이들. 하지만 만인의 참정권이 보장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에도 아우라가 부여될 수 있을까? TV 토론회의 정치는 진짜 정치고, 커뮤니티의 정치는 가짜 정치인가? 적어도 커뮤니티의 응집력이 이만큼 높아지기 전까지 우리는 그렇다고 믿어온 듯하다. 마찬가지로 음악에서도 ‘해킹송’이나 ‘고추참치송’과 같이 아마추얼한 플래시 음악부터 최근 AI 음악의 가장 빠른 사례로 떠오른 ‘창팝’의 도래는 흥미롭게 파악할 만한 것이지만 충분히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들의 음악이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창팝’이 등장한 해 대중음악웹진 ‘온음’이 이를 올해의 음악 후보로 거론했고, 댓글 창에 막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그 선택이 장난스럽다고 여긴 듯했다. 자신이 소비하며 즐기는 문화에 아우라가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아우라의 해체를 부인하며 자신의 문화를 스스로 평가절하하고, 그러고도 개의치 않으며 다시 그것을 소비한다. 오히려 그 ‘낮은 수준’에 열광한다. 점점 저열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타나토스적 희열과 맹신. 이곳이 인터넷의 가장 험악한 측면이다. 밈은 끈적거리고 물컹거려서 다들 만지기를 꺼리지만, 용기를 내서 누르면 도리어 넓어지고, 때리거나 잡아트려도 부서지지 않고 축 처지거나 늘어나기만 한다. 밈의 성질은 더러운 슬라임과 같다. 인터넷 음악을 진짜의 영역으로 끌어당길 수도 밀쳐낼 수도 없다. 그러는 동안 진짜의 영역은 점점 고립되어 신뢰와 흥미를 잃어가고 가짜는 가짜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권력을 갖춘 가짜로 군림한다.
영화 <밈 전쟁: 개구리 페페 구하기>가 말하듯 극우의 탄생이 ‘웰빙’, ‘욜로’, ‘플렉스’ 같이 과시적이고 멀끔한 삶의 양식과 그를 향한 경쟁에 도태된 이들의 분출구로 나왔다고 한다면 극우는 이질적 존재가 아니다. 문화 이론가 캐서린 류는 <전문, 관리 계급에 대한 비판>에서 말한다. “PMC(Professional Managerial Class)는 자신들보다 낮은 계급을 지배 계급의 눈으로 보았고, 궁핍해진 가난한 사람들과 재빨리 거리를 둘 수 없었다.” “힐러리 클린턴 시절의 민주당은 노동 계급의 이익엔 이제 신경 쓰지 않았는데, (...) 이 나라에서 최고 관직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을 다양하고 기부자들과 친화적인 사람들로 공들여 가꾼 진용을 갖추었다. (...) 힐러리는 PMC 엘리트들이 꿈꾸는 후보였는데, 이는 한때 노동 계급의 이익을 대변해 다루기 힘들었던 민주당을 이 계급이 완전히 장악했다는 신호였다.” 자칭 진보 정치인이 소외와 결핍을 돌보는 것에서 멀어지는 현실 속 사실관계는 당연스럽게도 기성세대가 그다음 세대를 낳았을 뿐이라는 결론에 닿는다. 기성세대가 정상성을 강화하기 위해 일명 ‘외계화’하는 것은 극우 세력만이 아닌 신세대 전체이기도 하다.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세대’ 앞에 알파벳을 붙여가며 특정 나이대의 동향을 특별 취급하는 모습은 이제 신물이 난다. (여기서 사례로 드는 대부분의 예시는 그 역으로도 성립한다.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외계화하는 것과 같이 신세대가 기성세대 또는 노인층을 지칭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며, 몇몇은 스스로를 특정 세대로 규정하는 모습도 보인다.) 고로 ‘재밌으면 다 괜찮은 거냐’라는 성난 질문은 인터넷 세대뿐 아닌 사방을 향해야 한다. 우리가 인스타그램 피드와 유튜브 쇼츠를 넘길 때마다 용인하고 있는 것들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그것은 아우라도 아니고, 아우라를 철폐하는 것도 아니며, 기성 아우라의 반대편에 있는 것에 대한 모순적 아우라를 생성하는 꼴이다. 이 순환논법의 윤리에서 짙은 회의감이 움튼다. 전자음악은 좌파적이고, 컨트리는 우파적이고, KPOP은 젊고, 트로트는 늙었고, 선거철이면 이것저것 죄다 무채색으로 도배되어야 하며, 정치 음악은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트럼프 캠프가 좌파 음악가의 노래를 도용해서 고소당하는 난국에 송라이팅이 정치를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은 지나치게 순진해서 의심스럽다. 정치와 예술이 만나는 장은 종말에 가깝다. 음악과 정치가 결부되어 이야기될 때 음악은 반드시 패배한다. 정치 음악에서 정치성은 탈락하고 새로 갈아 끼워져, 안중에 들 때는 정치적 음악이 아닌 음악적 정치만이 남는다. 해맑지 못한 음악은 그런 식으로 죽는다. 심오한 언더그라운드에 고인 물은 길어 올려져야만 널리 섭취될 수 있다. 시위가 밈이 되는 방식, 폭력이 밈이 되는 방식, 퀴어가 밈이 되는 방식, 파시즘이 밈이 되는 방식, 아우슈비츠가 밈이 되는 방식, 아방가르드가 밈이 되는 방식… 인터넷이라는 정글 속 끊이지 않는 게릴라전에서 음악은 화기일 뿐 목적이 아니다.
현대의 문화적 동향을 살필 때 유희하는 인간, 즉 호모 루덴스는 슬픈 단어로 변한다. 우리는 유희 없이 살 수 없고, 끊임없이 현실 세계로부터 한눈을 팔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어니스트 베커와 같은 작가는 단지 우리가 부정적인 것에서 도피하여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예술을 향한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신에게 스스로를 바치고, 회사에 노동을 바치고, 국가에 충성을 바치고, 사회에 도덕을 바치고, 가족에게 사랑을 바치듯, 끊임없이 행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인류의 지난한 방어기제의 역사를 토대로 한다. 버트런드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하는 말로,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세계는 노예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행위는 우리 안에 내재된 본성이다. 인류의 장래희망은 오직 노예다. 생산하고 소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종인 우리에게 유희란 구원이며, 우리는 행복으로 인해 삶의 고통스러운 진실을 잊고 살 수 있다. 그렇게 정치적 양극화, 국제전, 국가 원수의 암살 시도, 민주주의의 위기, 개인의 고립, 정상성의 강화와 바놉티콘이 우스갯소리가 된다. 헤르만 퇴네센의 에세이 제목처럼 “행복은 돼지를 위한 것”이지만, 우리는 전부 돼지이며, 소크라테스는 없고, 심지어 고대 그리스에도 없었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의 돼지만 있었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에 반미학 운동이 대두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들의 예술에 따라붙는 설명은 대개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 같은 것이지만, 현대적 미적 추구에 대한 혐오라는 설명도 적절하다. 페미니즘 운동이 곧잘 아름답지 않을 것을 이야기하는 연유도 유사하다. 아름다움은 위협이다. 아름다움은 아우슈비츠에서 음악이 기능했던 것처럼, 세계의 토사물 위로 발라진 설탕 코팅이다. 오로지 꼭대기에 설 수 있는 사람만이 진창에서 허덕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반미학이 예술에 일으킨 반향은 혁신적인 동시에 씁쓸하다. 대중은 예술로부터 급격히 멀어졌고, 키치로 가장한 엘리트주의가 심화되었다. 충분히 단련된 관객이 아니고서야 급격한 예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심지어 전위는 점점 아득해지는 어휘다. 더 이상 어디서 어떻게 새로운 개념이 가능할까? 팽배해진 전위는 결국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시스템을 양산한 꼴이 아닌가? 그것이 단지 예술이기 때문에 아무도 손가락질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반미학이 충분히 정치적으로 실천되지 않은 이유는 그곳에 있다. 반미학 역시 많은 대안적 이데올로기가 그러했듯 하나의 이상에 불과했다. 살아남는 것은 언제나 희열과 감동을, 구체적으로는 유효성을 동반한다. 대개의 성공한 예술은 삶이 여전히 살만한 것이라고 말해주는 위로 포르노다. 서점가를 채운 자기 계발서와 투자 비법서, 행복과 삶에 대한 경탄으로 메워진 에세이 사이로 지루하고 어려운 책은 반향이 없다. 차라리 어려운 척할 수 있는 책 정도는 유용하다.
우리는 환각을 원한다. ‘브레인 롯’으로 불리는 밈이 상기하듯 음악 또한 마취적이고 약물적 형태로 곧잘 소비되어 왔다. 사이키델릭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가는 노래방이나 출퇴근 길 우리의 시청각을 장악한 미디어의 향연에서 자신을 고통으로 내모는 구조를 외면하며 정상성을 향한 동력에 스스로를 투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비관적 굴레 너머 음악을 빼내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정치 담론에 발동이 걸린 이들에게 음악은 도구이고, 음악 담론에 발동이 걸린 이들에게 정치는 지루하다. 두 커뮤니티는 다른 카테고리로 엮였기에 절충할 필요가 없다. (세분화된 커뮤니티에서 나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동조할 사람을 구하는 것은 현실에서보다 놀라울 정도로 쉽다. SNS 알고리즘은 대개 확증편향을 유도하기 쉽다.) 여전히 많은 사람의 플레이리스트에 테일러 스위프트와 칸예 웨스트는 공존할 수 있다. 여전히 같은 사람이 테일러 스위프트와 칸예 웨스트를 동시에 조롱할 수 있다. 동시에 누군가는 트럼프의 열성 지지자라는 이유로 테일러 스위프트를 보이콧한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얼마나 미국적 자본주의의 수혜를 받은 인물인가를 고려하면 약간은 우스꽝스럽다. 혐오는 결코 적절하지 않고 긍정은 다소 방임적이다. 이 지옥 같은 합성-필수 요소의 늪에서 어떻게 해야 음악을 꺼내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지옥 같은 음악성 운운하는 자리에 어떻게 합성-필수 요소를 담론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상술했듯 반미학과 탐미주의, 정치와 무관한 사랑 노래나 가사 없는 클래식까지도 정치적 오남용을 겪는 시대에,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말콤 맥라렌의 업장 이름이 시드 비셔스나 펑크, 어쩌면 요절한 반항심을 아울러 묘사하기 훌륭한 문구였다면, 이제는 대중음악 전체를 표현하기도 탁월해 보인다. 음악은 살기에는 너무 타락했고 죽기에는 너무 젊다. 이 이상 무엇을 이야기하려 들 때 금세 키보드 배틀이 벌어질 것이다. 폴란드 영화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것으로 알려진 말.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영화를 하지는 않지만 우리 세상 모든 면이 정치적이다. 그리고 그의 영화 리뷰란에 달려 있는 글. 감독 시선이 너무 편향적임. 이는 같은 시대에 같은 것에 대해 공존하는 두 개의 재앙이다. 재앙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그토록 외면하고자 하는 죽음의 다른 이름이다.
극단의 논쟁은 늘 가치 판단에 대한 갈피를 잡을 틀에 대한 본질 훼손으로 와닿는다. 정치와 음악에 관해 논할 때 우리가 척도로 삼는 가치가 충분한 토대를 기반으로 하는가 하는 문제는 논의 자체의 존립을 위해 다시 부상해야 할지 모른다. 이전의 회의적 논조를 잇는다면 이 문제는 방대하고 근원적이라 제대로 설명될 수조차 없지만, 동시에 이 문제가 대답되지 못할 때 음악에 관한 모든 논의는 부실공사된 고층 빌딩과 같은 모양새다. 무엇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하겠는가? 모든 것이 취향이자 상대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미적 사건의 지평선. 음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분명하게는 존재할 수 없다는 태도. 우리는 이 부근을 서성이며 담론의 무력함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다. 동시에 단순한 최면 효과에서 음악적 가치를 빼돌리고자 하는 야욕도 멈출 바를 모른다.
각각의 원근법이나 관점에는 자족적 의미를 지닌 어떤 자율적 작품이 대응해야 한다. 즉 중요한 것은 계열들의 발산, 원환들의 탈중심화, ‘괴물’이다. 따라서 원환과 계열들 전체는 형상을 띠지 않는 어떤 카오스다. 근거가 와해된 이 카오스는 그 자신의 고유한 반복, 자신의 재생산 외에는 다른 ‘법칙’을 갖지 않으며, 이 반복과 재생산은 발산하고 탈중심화하는 것의 전개 속에서 이루어진다. (...) 상실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 계열은 다른 계열들의 회귀 안에서만 실존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허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 허상을 어떤 단순한 모방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허상은 차라리 원형이나 특권적 위치라는 생각 자체를 반대하고 전복하는 행위이다.
<차이와 반복>(김상환 역, 민음사)에서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탈중심화만이 존재하는 카오스. 그는 어떤 계열이 다른 계열들과의 관계로 인해서만 상이 맺히는 것이라고 본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음악적인 것에 대해 내리고 있는 저마다의 정의도 다른 어떤 개념들의 정의로 인해 정의되고 있고, 그 정의는 또한 다른 개념들의 정의로 인해 정의된다. 동일자 개념의 무력이 폭로된다. 포스트모던 이후 획일한 잣대 안에 읽히기를 거부하는 미술이 제시하듯 절대적인 것은 오직 상대성 뿐이다. 이 가치관 아래 예술은 인식의 저변을 확대하려는 기계로 작용할 뿐 유의미하게 존재할 도리가 없다. 예술에서 본질주의가 성립하지 않을 때 담론은 복잡한 국면에 이른다. 각 작품은 같은 테두리 안에 구분될 수는 없고 몇 가지 서로 다른 요인들로 해독될 수는 있기에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순수성의 패배다. 순수성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의 척도이자 영토이기 때문이다. 만일 들뢰즈적 탈영토화가 모든 영토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한 영토에서 낯선 영토로의 이주를 의미한다고 해도 얘기는 다르지 않다. 대체 이 무지막지한 미적 세계화의 시대에 낯선 영토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이제 아방가르드는 맹목적일뿐더러 심지어 천진해 보인다. 그들은 마치 예술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정말로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예술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극단적 수사지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때 예술은 목적이 되고, 이 질문에 그럴 수 없다고 손사래칠 때 예술은 다른 무언가를 위한 도구가 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전자의 입장은 거짓이다. 그러한 획일적 방안이 권력적이고 폐쇄적이라고 말한다. 해체 이후 미학적 기틀을 다시 세우는 일도 새삼스럽다. 실로 현실의 위치는 후자의 입장과 같다. 절충주의만이 가능한 세계. 여기서 예술 감상은 작가의 의도와 나의 자의식 간의 전쟁이다. 그리고 모든 전쟁이 그렇듯 전쟁에는 승자가 없으며, 치명적인 패자와 덜 치명적인 패자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상술하면서 파악한 정치와 음악 간의 치열한 ‘계열 다툼’이다. 음악이 앞서는가, 정치가 앞서는가? 음악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그것은 존재하는가? 궁금증이 한 바퀴를 돌았다.
획일성을 타도하기 위한 예술적 움직임이 낳은 획일성의 강화를 진단해 보자. 이것은 위의 ‘반미학의 한계’로 논한 것의 연장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마치 예술이란 이름이 지닌 의미를 확장시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벌여도 (심지어는 똥을 싸거나, 범죄를 저질러도) 괜찮다는 듯 움직였을 때, 대중은 동화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예술가를 광인 취급하기 시작했고, 다시 정상성의 척도 안의 삶을 강화했다. 들뢰즈를 시원으로 짚기도 하는 가속주의가 강하게 대두되고 20세기 내내 타도의 대상이던 자본주의는 사회의 전제가 되었다. 획일성은 아직 여기에 있다. 이에 대해 예술이 취한 태도는 점점 강경하기나 했다. 반미학은 쾌락원칙을 등졌다. 즐거운 것이 폭력이라면 즐겁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대중은 다시 그들을 반동분자라 부르며 벽을 친다. 적대감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많은 창작자는 차라리 쾌락이라는 보상을 안겨줄 정상의 옷을 껴입는다. 요즈음 사람들이 경쟁하는 것은 누가누가 더 정상인인가 하는 일로 보인다.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이 정도를 상정할 수 없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철저한 대중예술가가 로맹 가리나 프란츠 카프카가 그랬듯 자신의 작품이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고 차라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예술은 우선 재화이기 때문이다. 이는 동일성에 의한, 정상성에 의한, 획일성에 의한 세계를 타파하기 위한 차이의 예술이 ‘차이의 예술’이라는 영토를 형성하는 모순으로 이어졌음을 가르쳐 준다. 예술의 문법적 차원과 개념적 차원의 해체는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다원성을 확보하는 결과로 이어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해체를 하고 난 뒤의 상태를 향한 또 다른 해체가 이어지고 그 와중에 실질적으로 고착화되는 것은 해체라는 행위뿐이다. 이는 들뢰즈 사상에 대해 후대 학자들이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와 부합하는 점을 지적한 것과 연계할 만하다. 모든 가치 척도를 끝없이 부인하며 옳은 것을 규명할 수 없어질 때 남는 것은 욕망뿐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언더그라운드나 오버그라운드이기 이전에 반드시 어나더그라운드여야 한다는 식. 이것이 달콤하게 들리는가? 이것이 예술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을 이미 전제로 논의를 이어가는 셈이다. 또 한 번의 허무가 남아있다. 모든 방식으로 가능한 예술은 가능하지 않은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술이 그토록 본질주의적 잣대를 상실하기 두려워한 이유는 예술이 근본적으로 속세적 매체였기 때문이다. 본문의 첫 장에서 음악의 시원에 대해 짚었듯, 미적 가치란 인간중심주의적 가치다. (나는 음악의 시원을 밝힐 때 예술이 본질을 갖추고 판단되는 것이 아닌 ‘유용한 생존 전략’일뿐이라고 암시했다.) 그것은 우주와 관련을 맺지 않는다. 인간의 무모하고 위험한 요소는 우주적 의미를 갖지 않는 개체로써, 우주적 의미를 생성하거나 부여받지 못하는 중에, 우주적 의미를 갈구하기는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 영원을 꿈꾼다는 것, 진실과 정당성에 목맨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방대한 우주 안에서 음악의 단위는 그야말로 ‘쪼가리’ 같은 걸로 표현해도 적절하다. 이것은 결국 예술이 멸종하지 않는 한 본질주의을 완전히 상실할 수 없으며, 포스트모던이 앞으로도 영구적으로 현재에 달하는 사조가 될 연유이다. 들뢰즈는 이 사실을 은연중 흘려보낸다.
오로지 도덕만이 우리에게 사유가 선한 본성을 지니고 사유 주체가 선한 의지를 지녔음을 설득할 수 있고, 또 오로지 선(善)만이 사유와 참 사이에 가정된 친근성을 근거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도덕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이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또 참에 사유를 가져다주고 사유에 참을 가져다주는 이 선이 아니라면 또 그 무엇이……?
예술이 정치를 바라는 이유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예술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아니라면, 위에서 언급한 몇몇 위험한 미적 가치론이 정치를 저평가할 만한 것으로 전락시켰을지 모른다. 세계를 바꾸는 예술은 폭력적이다. 세계를 바꾸지 않는 예술은 사소하다. 예술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은 광신도로 불린다. 거장은 없다. 위대함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문장을 바꾸어 볼 수 있다. 가치론은 필시 인간 중심적인 가치론이므로, 우주에 닿지 못하는 가치론일 수밖에 없기에, 음악뿐이 아닌 이 세계의 모든 가치론은 본질을 상실한 채 존재한다. 그것은 들뢰즈의 말대로 어떠한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자인 우리는 예술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충분하지 않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당신이 예술을 사랑한다고 할 때의 사랑이라는 말이 숭배와 관련하고 있다면 그쪽 면을 도려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맹목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예술을 바라볼 때, 이제 인용할 만한 것은 들뢰즈가 아니라 리처드 파인만이 된다. 그가 물리학을 성행위에 빗대며 했다고 전해지는 말로, 예술은 “유용한 결과를 주지만 그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다.” 위대함이 없다면, 위대함 없이 가자. 왜냐하면 곧이곧대로 위대함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당연히 같은 이유로 아무 곳도 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음악은 어쩌면 살기에는 너무 타락했고 죽기에는 너무 젊은 것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것도 죽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는 타락했거나 젊다고도 말하기 힘들, 아르토 식으로 말해 기관이 없는 것이다. 단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음악에 대해 타락했다거나 죽어간다고 보고 있을 따름이다. 음악성을 논한다는 것은 그토록 교조적인 행위다.
음악은 철저하게 사소한 문제로 끌어내릴 때 생존할 수 있다. 음악은 기껏해야 아편이다.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아편이다. 삶을 택하는 것이 곧 아편을 택하는 것이다. 삶인즉슨 아편과의 협상 테이블이다. 행복, 그 존재할 것 같지도 않은 유토피아적 상태에 빠지고, 벗어나고, 다시 쫓고, 끝끝내 돼지가 되고자 헉헉대는 일이 전부다. 그러니 음악이 세상에 이바지할 수 있다던가, 음악이 사회 실천이 된다는 말은, LSD를 하고 나서 속세를 초월하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보다도 설득력이 적다. 음악은 대단한 것을 향해 가는 길이 아니다. 정치도 매한가지다. 좌파와 우파라는 이념 아래 전개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세속적 담론 역시 무력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서로 척을 지고 서로를 규명하는 어떤 이데올로기와 어휘를 생성해나가면서, 그 어휘가 대체 무엇인지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고, 심지어 헤아리려는 시도조차 않는다. 그들에게 정치는 일종의 스포츠나 게임처럼 보인다. 팬의 열성에 따라 승패가 나뉘는 한 판의 시합. 어느 쪽이 이기든 소시민에게 큰 상관은 없는 셈이다. 윌리엄 S.버로스의 말처럼 중독자에게는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고 그저 약물만 있으면 될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태생적으로 삶에 중독된 자들이다. 이 중독은 죽음에 의해서만 나을 수 있지만, 너무 느닷없고 두렵게만 느껴진다. 우주적 의미에서 삶과 죽음은 크게 다를 것 없는 상태임에도 우리의 의식은 관습적으로 치료를 불허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과 정치, 또는 철학을 끊임없이 결부하여 파악하려는 행위는 본질이 아닌 것을 본질처럼 논하는 어투라고 해야겠다. 정치와 음악은 아편과 아편이고, 아편의 담론에 대해 할 말은 많지 않다. 평론은 아편을 소비하기 위한 추천서에 불과할 것이다. 예를 들면 LSD보다는 모르핀이 끝내준다든지 (사이키델릭 록보다는 하이퍼 팝이 좋다든지) 하는 멋대로인 발언이나, 약물의 적정 투여량에 관한 얘기라든지 (앨범의 러닝타임 또는 장르나 리듬에 관한 얘기 등과 같이) 하는 지극히 정보성 발언만이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런 글은 공허하기에, 이 글이 그렇듯, 강력한 문체와 그럴싸한 설명으로 채워 넣어 독자를 삼키려 들지 않겠는가? 그런 걸 사기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본질적으로 충족되어 있지 않은 것을 충족된 양 느끼게 만드는 것. 그것은 동시에 아편이 하는 일과 같은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편에 대한 담론은 즉 아편이라는 말도 가능할 테다. 평론은 미학의 공허를 감추려고 애쓰는 미학의 공허다. 이것이 탈영토화를 가장한 또 한 번의 상대주의 내지는 평등주의의 영토화라던가, 미의 유용성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라 해도, 당신이 옳다고 하는 수밖에 없다. 정말로 음악에 관해 딱히 할 수 있는 얘기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음악을 추천하거나 리스트 업하고 사라져주는 편이 담론의 최선일지 모른다. …그러나 중독자는 어쩔 수 없이 늘 차악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