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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프로그램 - <Burning>

by 권도엽|

cover image of 쾅 프로그램 <Burning>
쾅 프로그램 <Burning>Self-released

가사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특정한 음악적 질서에 편입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쾅 프로그램은 문서화하기 어려운 형태의 작업을 선보이는 아티스트다. 이런 성격의 음악을 쓴다는 행위는 쓰는 자의 입장에서는 불안하고 미련한 짓이다. 또 그런 이유에서 쾅 프로그램의 음악은 너무나 적게 알려졌고 또 너무나 적게 말해진다. 역사상 가장 자유롭고 방대한 지면이 허락된 오늘날 쏟아지는 텍스트와 음률은 다양성의 반대편을 향한다. 그러니 이 음악이 성질을 막론하고 나서라도 노이즈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의성어로밖에 적당히 표현할 수 없을 듯한 <Burning> 속 소음 행렬은 대중음악의 미스터리이자 자객이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불사르러 왔다.

앨범 커버 속 화염의 형상은 인간의 것과 닮았다. 이렇듯 <Burning>의 사운드는 기괴하다 못해 영적이다. 재패노이즈 류가 가지고 있는 귀가 저릿할 수준으로 난삽하고 빽빽한 굉음은 드물고, 다크 앰비언트 성향이 엿보이는 반복적 리듬과 돌발적인 음향 처리가 (경우에 따라 신시사이저 같기도 하고, 현악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아예 악기가 아닌 무언가처럼도 들리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흐름 안에는 놀랍게도 적당한 변형이 가미되며 곡에 일정한 전개 양상을 깃들게 한다. 예를 들어 ‘doorhelldoor’의 1분 후반대부터 드럼을 뒤덮어 오는 디스토션과 드론 노이즈는 절정을 연상케 하더니, 2분 45초부터 높은 피치의 노이즈와 (피드백을 연상케 하는) 짧은 드럼음 뒤 즉시 찾아오는 정적으로 극적인 격차를 생성하는 것이 그렇다.

나름의 정념을 가진 노이즈는 퍼포먼스적이라기보다는 확실히 음향에 공을 들인다는 인상을 준다. 적어도 ‘듣는 음악’이라는 설정을 등지지는 않은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음향의 인상은 말 그대로의 인상에 그친다. 독립음악 스토어 만선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앨범 소개에 스스로 적었듯 ‘장면’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하지만, “b-cut들의 뜨거운 묘지”로 기능하는 이단아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은 음반의 취향이 무언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지목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Burning>에는 요구가 없다. 불의 물성도 꼭 그렇지만 ‘House of Hate’나 ‘doorhelldoor’처럼 아리송한 제목이 달린 곡 앞에서 무언가 부연할 생각은 않는 편이 나아 보인다.

간소하게 쾅 프로그램이 의도하고 있는 특징은 상술한 ‘최소한의 인위성’과 ‘노이즈’라는 두 대목 이외에 찾기 어렵다. <Burning>은 완전히 무작위적이지는 않은 노이즈 음악, 또는 노이즈 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앨범은 개념적으로 파악할 여지 또한 거스른다. ‘Catfish’의 여타 트랙과는 달리 차분한 드론/앰비언트적 분위기는 간주곡이나 배경음처럼도 들리는데, 여기서 우리는 음반이 인상과 노이즈를 모두 배반하지 않고 도리어 그 합의점 부근에서 창작되었다는 고찰에 이른다.

현상학자들은 종종 ‘의식의 지향성’을 들어 우리가 가지는 의식이 항상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며, 의식이 반드시 대상을 가진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동양철학이나 신비주의자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의식을 비울 수 있는 그릇이거나, 적어도 비우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그릇으로 묘사한다. 반야심경의 말처럼 모든 색이 공과 같고, 공이 또 색과 같을 때, 쾅 프로그램의 음악과 같이 언어화를 거부하고 음형의 조합과 흐름 속에서만 자리하는 유형의 예술은 보다 순수한 감상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그에 이바지하는 듯 보인다. 본래 글이 없던 것이자 규칙이 없던 것이던 소리에 어느샌가 세워진 지평선을 하나하나 태워 없앤다. 즐거움을 위한다고 말하기에 너무 불쾌하고, 괴롭힘을 가한다기에 너무 정교하고, 새로움을 향한다기에 꽤 무관심한, <Burning>은 말하기 위함이 아닌 침묵하기 위해서, 의식이 아닌 무의식을 향해서, 사유가 아닌 명상을 종용하며 존재하고 있다. 매분 매초 보편의 테제로도 안티 테제로도 기능하지 않고 저편에 서있는 듯한 앨범의 인상은 마치 우리가 음악에 대입하려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결국 잿가루가 되기 전의 발버둥이라고 넌지시 일러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