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e regardai, et voici, parut un cheval d'une couleur pâle
Celui qui le montait se nommait la mort, et le séjour des morts l'accompagnait
Le pouvoir leur fut donné sur le quart de la terre, pour faire périr les hommes par l'épée, par la famine, par la mortalité, et par les bêtes sauvages de la terre그리고 내가 보니, 청황색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의 이름은 ‘사망’이고, 지옥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칼과 기근과 죽음과 들짐승으로써 사분의 일에 이르는 땅의 주민들을 멸하는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 Mandy, Indiana, ‘Sevastopol’ 中 (요한묵시록 6:8, RNKSV 譯)
맨체스터 기반의 밴드 Mandy, Indiana의 두 번째 정규작 <URGH>는 인간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을 명시하며 그 서두를 연다. 파멸을 암시하는 듯 괴랄한 노이즈가 시작부터 예고 없이 귀를 짓이기고, 이어지는 고압적 인터스트리얼 진행 위에서 보컬 Valentine Caulfield는 기계의 목소리로 요한묵시록을 읊는다. 지상 인류의 1/4를 파멸할 권리를 지닌 불가항의 4기사, Mandy, Indiana는 그중에서도 첫째 정복의 백기사를 강조하며 본 작품이 재앙적 지배에 관한 작품임을 시사한다. 곡 후반부에 들어 갑작스레 등장하는 성가 연주는 이러한 맥락에서 어딘가 섬뜩하게 들리기도 한다.
크림 반도에 실존하는 도시 이름이기도 한 ‘Sevastopol’이 곡의 제목으로 채택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들이 현재 세바스트폴이라는 도시를 둘러싼 군사적/문화적 갈등 자체를 풍자하거나, 여러 차례의 군사적 충돌이 벌어져 왔던 세바스트폴의 역사적 특징을 드러낸다고 해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만약 그랬다면 정복이나 역병을 뜻하는 백기사보다는 전쟁 그 자체를 뜻하는 적기사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더 적절했을 테니 말이다. 세바스토폴은 일종의 메타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백기사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정복을 위해 수많은 개인을 희생시키는 국가와 국가 간의 갈등인가? 유럽과 세계 전역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구조의 모순인가? 개인과 개인 혹은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억압의 행태인가?
굳이 따지자면 <URGH>의 주제는 이 모든 종류의 재앙적 지배를 총체적으로 아우른다. 국제 정세를 뒤흔드는 국가 단위의 정복 전쟁부터 소시민을 자연스럽게 억압하는 정부의 억압, 이를 구조적으로 모방하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폭력까지, 현 세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모든 지배력은 모두 작품의 배경이 된다. 나아가 개인을 향하는 이 총체적 지배력은 (백기사가 역병을 상징하기도 하는 만큼) 수 년 전 창궐한 코로나19 혹은 그 기간 동안 밴드 멤버들을 괴롭힌 신체적 손상 등을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지배는 폭력의 형태로 개인을 억압하며, 개인의 시선에서 서술되는 본 작품은 결과적으로 이 모든 폭력에 대해 개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 된다.
물론 이 기록은 여러 종류의 지배에 대한 개별적 반응을 그대로 필사한 것이기에 어떠한 논리적 구조나 체계적 서사의 형태를 띠지 않고 각각 독립적인 감정의 형태로 존재한다. 일정한 음향적 톤이 존재하긴 하지만, 작품 전체가 하나의 서사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그 각각의 폭력에 대한 저항적 반응이 한 개체의 톤으로 발현될 뿐이다. 나아가 “URGH”라는 짧은 신경질적 신음으로 대표되는 이 반응들은 매우 즉각적이고, 반사적이며, 때때로 무의식적이다. 본작의 지배적 폭력을 상징하는 정복의 백기사(그리고 이를 포함한 묵시록의 4기사)가 흔히 재앙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그 어떤 개인이 재앙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잘 훈련된 전문가의 경우가 아니라면 뭇 혼란하여 비명을 지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과 정신분열을 반영하는 작품은 복잡한 수준의 사고를 완강히 거부하며, 서사 또한 해체되어 오롯이 비명의 형태로 존재한다. 재앙을 맞닥뜨린 각 신체 기관이 제각기 다른 이상 신호를 보내듯, 비트와 노이즈, Valentine Caulfield의 음성이 저마다의 비명을 지르며 섬뜩하고 불쾌한 앙상블을 구성하는 셈이다.
이들이 전작에서 가장 크게 변화한 점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전작이자 정규 데뷔작인 <i’ve seen a way>가 일종의 서사를 중심으로 구조적인 형태를 보였다면 본작은 고유의 노이즈/인더스트리얼 사운드 틀을 남겨둔 채 그 구조를 철저히 해체해 흔들어 보인다. 뼈와 살, 신경이 분리된 앨범의 커버처럼 음향의 각 층위, 각 악기는 조화를 위해 움직이지 않으며, 그 자체로 거세게 진동, 분출한다. 정교하고 기하학적인 전작의 커버 대신 선택한 마젠타-시안-옐로우의 도발적 커버 아트 또한 이러한 정신분열적 사운드의 표상일 것이다. 물론 Mandy, Indiana와 Daniel Fox는 이러한 무질서를 관망하는 수준의 작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재앙적 현장 속에서 정신과 육체의 부조화는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품 곳곳에 구성적 센스를 발휘하여 막대한 진동을 하나의 음성 형태로 귀합해낸다. 예컨대 강간 가해자를 향한 살의를 드러내는 ‘Magazine’에서는 테크노 영향의 비트가 그 섬뜩한 경고를 독특하게 전개하고 있으며, ‘Dodecahedron’에서는 벌스의 3음절 반복이, ‘Cursive’에서는 Alex MacDougall의 드럼 연주가 각각 그 역할을 수행한다.
왼쪽부터 Mandy, Indiana - ‘Magazine’, ‘Cursive’, ‘Sicko!’ 싱글 커버. <URGH>의 커버 아트를 각각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필터로 투영한 모습이다. (원작: Carnovsky - Vesalio)
그렇다면 <URGH>라는 작품이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커버 아트의 원작자인 Carnovsky에게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도 있겠다. (<URGH>의 커버 아트와 같은) 삼원색 중심의 독특한 화풍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부부 듀오 Carnovsky의 전시에서 관객은 빨강, 초록, 파랑의 색상 필터를 제공받는데, 이 각각의 필터를 눈 앞에 갖다 대고 작품을 바라보면 마젠타-시안-옐로의 색상 중 일부가 검은색으로 변색되고 일부는 희미하게 사라져 나안(裸眼)으로는 관찰하기 어려웠던 각 형상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앨범에 앞서 발매된 싱글의 커버 아트가 이러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URGH>을 관찰하는 방식이 이러한 방식과 유사하다고 가정해 보자. 각색의 신음이 교묘한 중독성으로 결합한 추상적 비명 속에서, 우리는 표정으로 드러나는 단도직입적 분노(초록색)을 볼 수도, 육체적 훼손에 울부짖는 골격(빨간색)을 볼 수도, 아니면 신경 단위에 새겨진 저항 의식(파란색)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Mandy, Indiana는 이 중 어떤 형상에 집중하고 있을까? Carnovsky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깊고 미스테리한, 심리적이고 모호한 파란색 필터를 가장 선호한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Mandy, Indiana는 모든 종류의 청취를 환영하고 있지만, 파란색 필터로 본 <URGH>의 형상은 마치 우리에게 더 이상 참지 말고 일어나 행진하라 (”Lève-toi et marche.” ‘Dodecahedron’ 中)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고, 우리의 인간성은 그들의 거짓말, 폭탄과 증오보다 더 중요한 것이니까. (”L'avenir nous appartient et notre humanité Vaut plus que leurs mensonges et leurs bombes et leur haine” ‘ist halt so’ 中)
파장이 긴 ‘빨강’에서 짧은 ‘파랑’으로 변화할수록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았던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의 심리적이고 감성적인 측면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파란색 필터를 가장 좋아한다. 이 파란색 필터를 사용할 때 육안으로 가장 구별이 어렵고 미스테리한 분위기의 그림이 드러나도록 작품을 구성한다. 다른 색의 필터에서 보이는 또 다른 그림들에 비해 명확하게 잘 보이지 않아, 파란색 필터로 작품을 볼 때 사람들이 유난히도 눈을 더욱 찌푸리며 오랫동안 작품을 보는 광경이 연출된다. 이 부분도 우리 작업의 재미있는 부분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대상을 볼 때 첫인상에 단정지어 유형화시키곤 하지만, 막상 그 대상과 함께 지내며 깊이 알수록, 우리의 판단은 바뀌기도 하고 혹은 오히려 그 대상의 성격을 명확하게 판단 내리기 힘든 경험을 한다. 파란 필터는 가장 깊이 있는, 심리적으로 내재된 모호함을 상징하거나 원형에서 가장 변이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파란 필터의 속성 때문에 관람객들은 스토리를 구성하기 위해 다른 필터를 사용할 때보다 보다 더욱 바라보는 이미지에 집중하며 상상력을 발휘하게 된다.
- Carnovsky, 2018, 에비뉴엘 아트홀과의 인터뷰 중에서
https://blog.naver.com/a_arthall/221392660050